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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 좋아해도 되냐

복싱 어때요

by 김호누

내 마지막 피쳐폰은 '네온사인폰'이다. 전화가 오면 폴더폰 전면부에 전화기 이모지, 문자가 오면 메시지 이모지, 알람이 울리면 시계 이모지가 뜨는, 당시 기술로는 꽤 매력적인 폰이었다. 남편이 이 글을 읽으면 엄청나게 놀릴 것 같은데, 이 핸드폰을 사용하던 당시에 나는 같은 학교 선배를 짝사랑 중이었다. 아침마다 뜨는 시계 이모지를 그 선배한테 온 문자 메시지 이모지로 착각했고, 무리 속에서도 그 선배 뒤통수를 단번에 찾아냈다.

thumb_520390_1213063665_1.jpg 출처: 2008년 산업일보 기사


그 선배에 대한 짝사랑은 짝사랑으로 끝났다. 이후에도 몇 번의 짝사랑과 여러 번의 흑역사를 쓰면서, 내 감정이 연애 감정인지, 단순한 호기심인지부터 잘 구분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경험상 잠들기 직전에 보고 싶으면 연애 감정이더라. 그리고 복싱은 나에게 보통 사랑이 아니다.


자려고 누우면 머릿속에서 섀도복싱 장면이 재생됐다. 스파링을 제대로 해본 적도 없고 자세도 어설프면서, 머릿속에서 왼쪽으로 피했다가 오른쪽으로 공격했다. 때로는 벌떡 일어나 어두운 방에서 스텝을 밟으며 더킹(*)을 연습했다. 남편은 사춘기냐고 비웃었지만 이 에너지를 주체할 수 없었다.

(*) 무릎을 굽히며 상체를 숙여 피하는 회피 기술


출근길이 기대될 정도였다. 체육관에 가야 하니까, 사무실에 빨리 도착해 오늘 일을 해치우고 싶었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낼 때 핸드랩과 운동복이 만져지면 몰래 웃음이 나왔다. 회사 생활 10년, 남편과 사내 연애를 할 때도 이런 적은 없었다.




나는 감사하게도 그렇게 어렵다는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이직한 곳은 전보다 월급은 낮아도 여가 시간이 보장된다. 연애 7년, 결혼 2년 차가 되니 남편과 더 싸울 일도 설렐 일도 없다. 양가 부모님 건강도 괜찮고 우리 산전검사 결과도 이상 없다. 지루하리만큼 평온하다.


20대에는 1인분 어치를 하려고, 서로를 버리지 않을 짝꿍을 찾으려고 늘 불안했다. 정해진 게 없는 만큼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말은 와닿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신분으로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들여다볼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취업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회계사 자격증을 따는 걸로 노선을 정했다. 내 신분이 적힌 명함을 위해서 치열하게 지냈다. 기쁨과 좌절, 성취와 상실 넘나들며 내내 안정을 바랐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바라던 안정을 얻고 나서야 내가 벗어나고 싶었던 불안이 사실은 내게 주어진 가능성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 인생의 경로는 이미 정해졌다. 내게는 이제 엄마가 되고 엄마의 엄마가 되는 일만 남은 것 같았다.


그렇게 정해진 길인데, 복싱이 느닷없이 끼어들었다. 회사도 집도 아닌 곳에서 내 심장을 두드리는 일을 만난 것이다. 그동안 스쳐 지나간 취미와는 달랐다. 자기 전에 생각나면 사랑인 거다. 유부녀가 이래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게다가 쌍방도 아닌 짝사랑이다. 대상이 복싱이니 문제 될 건 없지만, 기분은 묘했다. 결혼식장에서 남편만 바라보겠노라 선언했는데.




요즘에는 새로운 동네를 가면 복싱장 간판부터 눈에 들어온다. 이렇게 많았나 싶다. '다이어트 복싱' 간판이 제일 많지만, '정통복싱' 간판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내 SNS도 복싱 영상으로 가득하다. 모르는 관장님의 섀도복싱 영상이, 썸남의 메시지를 다시 읽던 때처럼 몇 번을 봐도 재밌다.


어느 주말, 남편과 동네 산책을 하다가 어느 미용실 앞에서 "어!"하고 멈춰 섰다.

"복싱장 냄새다!"

시끄러운 하교 시간에 그 선배 목소리만 또렷이 들렸던 것처럼, 뜬금없는 곳에서 나는 복싱장 냄새를 알아챘다.


복싱장은 환기가 안 되는 지하에 있다 보니 눅눅한 공기, 쇠 냄새, 땀냄새가 뒤섞여 있다. 그리고 이를 덮기 위한 디퓨저 향이 섞여 난다. 그런데 미용실 앞에서 말리고 있던 수건 빨래 냄새가 그 향과 닮아 있었다. 알고 보니 내가 기억하던 향은 복싱장에서 수시로 돌리던 수건 빨래 냄새였던 거다.


체육관 현관문을 열면 그 냄새가 마음을 들뜨게 한다. 마냥 좋은 기분은 아니다. 끌리지만 풍덩 빠지기에는 불안하다. 그런데 사랑이 언제 뜻대로 되던가. 언제 식을지 모르는 마음이다. 놓치기엔 아까운 마음이라, 좋아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서 좋아하기로 한다. 출근 가방에 잊지 않고 핸드랩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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