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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링 데뷔

복싱 어때요

by 김호누

"치라구요? 제가요? 어딜요?"


어디를 때리면 되는지, 정말 때려도 되는지, 힘은 얼마나 줘야 하는지, 그러니까 내 주먹으로 코치님을 치라는 말이 맞는지 머리가 복잡했다. 저분이 때릴 데가 어딨다고. 사실, 코치님은 180cm가 넘는 근육맨이라서 때릴 면적이 넓고 나는 팔만 뻗으면 된다.


"잽 배웠잖아요. 아무 데나 일단 한 대 치세요!"


코치님은 내가 치기 좋게 가드도 내린 채로 그냥 서 있었다. 6개월 내내 연습한 잽이다. 왼팔을 피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나는 사자를 마주친 어린 사슴처럼 겁을 먹고 굳어버렸다.




코치님은 내가 기본 기술을 다 배웠을 때부터 스파링을 권유했다. 장난처럼 "스파링 하셔야죠! 오늘 어때요? 저기 저 학생이랑."이라고 물었고 나는 항상 "다음에요."라고 허허 웃으며 피했다. 그런데 그날은 무슨 바람인지, 이상하게 자신감이 생겨서는 코치님의 도발에 응했다. 마우스피스가 없으니 몸치기 (어깨 아래만 가격하는 스파링)로 합의 봤고 코치님은 방어만 할 테니 본인을 샌드백처럼 생각하고 치라고 했다.

스파링은 경기할 때처럼 힘 100%를 써서 싸우는 '풀스파링', 힘을 약하게 조절하는 '라이트스파링', 아예 실제 타격은 하지 않는 '매스스파링' 등 다양하다. 두 사람의 실력과 체급 차이에 따라 한쪽은 방어만 할 때도 있다.


그러니까 나는 맞을 걱정 없이 때리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막상 링에 올라가니 왼손, 오른손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는 물론이고 걷는 방법도 잊어버렸다.


코치님은 아마, 내가 자세도 좋고 미트도 곧잘 치니까, 스파링을 시작하면 눈빛이 돌변하고 달려들 거라 예상한 것 같다. 초보자여도 패기 있게 주먹을 던지며 돌진하는 스타일이 있다고 한다. 나는 아니었다. 코치님의 예상 실패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한두 대 정도 정타를 맞출 줄 알았다. 그동안 기본기가 좋다는 칭찬을 자주 들었고 전완근 힘도 세진 게 느껴져서 자신감이 붙은 상태였다. 게다가 그날은 줄넘기 2단 뛰기를 연속 25개까지 성공한 날이었다. 그래서 6개월 내내 피해오던 스파링에 응할 마음이 들었던 거다.




머리가 하얘졌지만 그냥 그렇게 서있다가 내려갈 순 없었다. 머뭇거리다가 코치님 가슴팍 중앙에 주먹을 꽂았다. 글러브에서 '퍽' 소리가 났고 내 입에서는 '헉' 소리가 나왔다. 사람을 주먹으로 때리는 건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 대로 끝낼 수 없으니 왼손으로 또 잽을 날렸다. 스트레이트 ('원투'할 때 '투')는 꿈도 못 꿨다. 코치님이 적극적으로 피한다거나 가드를 철저히 하는 게 아닌데도 내 눈에는 주먹을 꽂을 기회가 안 보였다. 내가 가까이 가면 멀어졌고 주먹이라도 날릴라 치면 지하철 스크린도어 마냥 가드가 닫혔다. 움직이는 상대를 앞에 두고 나도 같이 움직이면서 주먹을 맞추는 건 엄청 힘든 일이었다. 내가 연습해 온 모든 기술의 목적이 결국 그거란 걸 이제야 깨달았다.


나는 거의 제자리 뛰기로 3라운드를 채웠다. 링에서 내려온 내 어깨가 소금에 절인 김장용 배추처럼 축 늘어졌다.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었다. 배운 걸 아무것도 못 했다는 허탈감에 기가 팍 죽었다. 코치님은 "처음에 다 그렇다"며 격려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회에서 나는 30대 중반의 10년 차 회계사이다. 한 팀의 책임자일 때도 있고 고객사 CFO와 미팅을 하기도 한다. 모르겠어도 전문성을 뽐내며 아는 척해야 하고, 어떻게든 정답을 알아와야 하고, 항상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넓은 링 위에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될지 모르겠는 그 상황이 충격적으로 공포스러웠다.


게다가 체력을 다 쓴 몸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않아서 날 더욱 무력하게 했다. 샌드백을 칠 때는 통통 소리 밖에 안나는 솜주먹인데, 그 솜이 물이라도 먹었는지 3분 내내 들고 있는 게 너무 힘들었다. 스파링 할 때 끼는 글러브는 제일 가벼운 게 14oz (396.89g)이다. 500g도 안 되지만 스파링을 할 때는 5kg처럼 느껴졌다.


코치님은 내가 스파링 맛을 보고 복싱에 재미를 더 느끼게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대실패다. 나는 그날 마우스피스를 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앞으로 스파링을 권유하면 마우스피스가 없다는 핑계를 댈 작전이었다. 맞아서 아픈 것도 아니고 누군가를 다치게 한 것도 아니었지만, 망망대해에서 나침반 없는 작은 배로 항해하는 두려움을 다시 느끼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고 복싱 자체가 재미없어진 건 아니어서, 그 후에도 나는 체육관에 계속 나갔다. 그리고 스파링에서 실패한 '원원투' (왼손, 왼손, 오른손)를 제일 열심히 연습했다. 포기했으면서 언젠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게 아이러니했지만,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놓고 싶었다. 복싱 자체에 싫증이 날지, 스파링에 흥미가 생길지 모르겠다. 그래도 당장은 주먹과 발이 뜻대로 움직이는 감각이 좋아서 연습을 안 할 수 없었다.



P.S. 나는 지금 마우스피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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