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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박또박

복싱 어때요

by 김호누

옆에서 고수가 섀도복싱을 하면 최대한 안 보는 척하지만 절로 눈이 간다. 고수는 마치 춤추는 것 마냥 바운스를 타고 양발 위치를 재빠르게 바꾸고 몸 방향을 90도, 180도로 돌린다. 발을 재게 놀리는 걸 보고 있으면 "복싱은 발로 하는 운동이다"라는 말이 이해가 간다. 스텝이 리듬이 되고, 그 리듬 위에서 공격과 방어가 이어진다.


문득, 내가 복싱이 어려웠던 이유가 춤을 못 춰서였구나 싶었다. 삼십 년 넘게 그루브나 바운스와는 먼 삶을 살았더니 "자연스럽게, 리듬을 느끼면서, 가볍게 움직이시면 됩니다"라는 코치님의 말이 전혀 와닿지 않았다. 그건 아무리 설명을 듣고 영상을 본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힙합 댄스 수업에 등록했다. 마침 SNS에서 눈여겨보던 기초반 선생님이 있었다. 홍보 영상 속 동작은 복싱 고수가 건들거리는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주입식 교육으로 대학도, 직업도 얻었으니 이번에도 수업을 듣고 외우면 리듬감 있는 스텝을 밟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수업은 분명 도움이 됐다. 바운스를 탈 때는 무릎만 굽히거나 고개만 까딱하는 게 아니란 걸 알게 됐다. 발목, 무릎, 가슴을 어떻게 연동시켜서 움직이면 되는지, 무게 중심을 어느 쪽에 두는 게 좋은 지 배울 수 있었다. 입문자도 따라갈 수 있게 기본부터 차근차근 배운 덕에 나는 마트에서 흘러나오는 광고 노래에 맞춰 상체를 들썩일 정도로 발전했다. 다만 그게 전부였다. 어떻게 움직이면 되는지 지식은 생겼지만 몸은 여전히 따로 놀았다.




선수마다 스텝 스타일이 다르지만, 초보자가 제일 먼저 배우는 건 이름도 귀여운 '콩콩이 스텝 (점핑 스텝)'이다. 발을 사선으로 벌리고 제자리에서 콩콩 뛰면서 주먹을 함께 뻗으면 된다. 익숙해지면 몸통 전체를 앞뒤로 한 칸씩, 더 익숙해지면 두세 칸씩 움직인다. 태권도 겨루기 스텝과 비슷하다. 코치님 말로는 콩콩이 스텝만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생활체육대회를 휩쓸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중요한 기본기이자 체력을 키우는 훈련이다.


이 스텝을 처음 연습할 때도 춤 수업 때처럼 내 상하체는 따로 놀았다. 처음 한 달간은 상체는 제자리에 두고 다리만 앞뒤로 움직이는 게 우스꽝스러워서 거울을 보기 싫을 정도였다. 뛰면서 주먹을 내는 건 또 어찌나 힘들던지. 줄넘기를 3분 할 때보다 팔다리가 더 아팠다. 그래서 이 중요한 기본 연습을 게을리했다. 줄넘기를 할 때는 줄을 넘는 척이라도 했지만, 거울 앞에서 스텝을 연습할 때는 힘들면 팔을 내리고 그냥 멈춰 섰다. 코치님이 "계속 뛰세요"라고 할 때까지 쉬었다.


그 힘듦을 견뎌야 스텝도, 주먹도 자연스러워질 텐데 나는 연습을 건너뛰고 한 번에 실력을 얻고 싶었다. 춤 수업에 등록한 건, 복싱을 잘하고 싶어서 "나 이거까지 해봤어"라고 말할 만한 거리였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 기본 스텝을 될 때까지 연습하기 싫으니까 요령을 부린 거다. 월급을 벌고 자본주의 맛을 보고 나니, 내 품을 들이는 것보다 돈으로 해결하는 편리함을 알아버렸다. 춤 수업을 듣는다 한들, 춤도 결국 연습해야 는다. 결제했고 출석했으니 리듬감이 저절로 장착될 거라 믿은 건,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스텝 중에 걷는 모양새와 닮은 '워킹 스텝'도 있다. 두 발을 동시에 뛰는 콩콩이 스텝과 달리, 한 발씩 움직이며 주먹을 내는 방식이라 체력을 아낄 수 있다. 나는 정확히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르면서, 뛰는 것보다 걷는 게 덜 힘들어 보여서 그걸 연습하는 척했다.


초보라면 체력을 아끼는 연습이 아니라 키우는 연습을 해야 하는데, 또 요령을 부렸다. 같은 코치님에게 매일 배우는 게 아니다 보니, 내가 워킹 스텝을 하는 척하면 그날 봐주는 코치님은 '워킹 스텝 진도를 다른 코치님이랑 나갔나 보다'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콩콩이 스텝을 더더욱 대충 했고, 결국 내 스텝은 1년 동안 이도 저도 아니게 어색했다.


스파링을 본격적으로 연습하면서 스텝의 힘을 뼈저리게 느꼈다. 나보다 복싱을 늦게 시작한 것 같은 중학생과 스파링을 한 적이 있다. 그 학생도 나처럼 경험이 별로 없다고 들었지만 3라운드 내내 콩콩콩 잘도 뛰었다. "콩" 뛰면서 잽으로 내 이마를 치고, 또 "콩" 뛰며 뒤로 빠졌다. 현란한 발기술을 쓴 것도 아니었다. 나도 똑같이 배웠던 그 스텝으로 학생은 쉼 없이 움직였고, 나는 그 리듬에 휩쓸렸다. 언제 공격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고, 체력은 금세 바닥났다. 중반부터는 두 다리가 땅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꼼짝도 못 했다. 복싱은 발로 하는 거구나. 당해보니까 진짜 알겠다.


'할 수 있다'라는 건 저런 걸까. 불가능한 무언가를 한방에 해내는 게 아니라 배운 대로 매일매일 연습해서 실패를 줄여나가는 것. 그것을 오래 하는 것. 천부적인 재능이 없는 보통 사람이 자신의 지지부진을 견디고 마침내 자기가 원하는 상에 가까워지는 것.
- 강소희, 이아리,『내일은 체력왕』중에서


여덟 살에 다닌 피아노 학원에서 진도를 나가면, 선생님은 열 번 더 연습하고 부르라며 숙제를 내주고 다음 학생으로 넘어갔다. 나는 내 자리에서 방금 배운 부분 연습을 한 번 마칠 때마다 사과 하나를 색칠하면 됐다. 나는 일곱 번쯤 연습하고 사과는 열 개를 색칠했다.


완벽을 기하기 위해 똑같은 걸 열 번씩 반복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재미가 없다. 삼십 대 중반은, 주어진 숙제를 또박또박 해내야 실력이 는다는 걸 알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아는 나이다. 그래도 어릴 적엔 열 번 중에 일곱 번이나 연습했다는 게 대견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취업할 때 땄던 자격증의 합격 기준이 60점이었다는 게 참 다행이다.


선수들도 링 위에서 습관적으로 건들거리면서 발을 쉬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뭐라고 연습을 소홀히 했을까. "돌고 돌아 순정"이라는 말이 있다. 운동은 돌고 돌아 기본기다. 체육관을 다니면서 복싱 실력도 늘었겠지만 무엇보다 훈련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한 동작을 한 달 내내 연습하는 재미를 조금은 알게 되었다. 요즘 나는 콩콩이 스텝 연습을 열심히 하는 중이다. 이제야 리듬에 따라 주먹에 힘이 실리는 감각이 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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