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어때요
회계사 생활 10년이 되었지만 여전히 고객사와 스몰토크는 어렵다. 그래서 내 복싱 도전기는 한동안 점심시간 대화 주제로 꽤 쓸모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3초 이상 이어질 때, 날씨나 휴가 얘기는 이미 다 했을 때, 새로 시작한 운동 얘기만큼 적당한 것도 없었다. 내가 화두를 꺼내면 상대는 늘 비슷한 질문을 했다.
"어쩌다 복싱을 하게 됐어요?"
"체력이 엄청 좋으신가 보다."
"살 많이 빠지죠?"
"남편이 속 썩여요?"
"누굴 그렇게 패고 싶었어요?"
사실 복싱은 멋있어 보여서 시작했다. 그렇다고 “간지 나 보여서요.”라고 할 순 없으니 집 근처라서 등록했고 체력을 키우고 싶었다는 이유를 꾸며냈다. “저 요즘 복싱 시작했어요.”라고 말하는 것 자체만으로 이미 스스로 좀 폼 나는 것 같았다. 마치 학창 시절 “나 남친 생겼어”라고 말하는 친구들처럼, 괜히 자랑 아닌 자랑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중학교 2학년 때 학교 싸움 짱을 좋아한 적이 있다. 같은 반도 아니었고 친하지도 않은, 세 다리쯤 건너야 아는 사이였다. 잘 알지도 못했고 외모가 훌륭한 것도 아니었지만 학교에서 제일 센 애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멋져 보였다. 그때의 동경이 어쩌면 지금까지 이어진 걸지도 모른다.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 마동석 배우는 복싱을 기본기로 액션 연기를 한다. 강하다. 멋지다. 나도 하고 싶다.
허세라는 걸 안다. 내 외형을 보면 더 그렇다. 나는 키 164cm에 몸무게 49kg, 근육은 없지만 내장 지방은 많은 마른 비만 체형이다. '강'보다는 '약'에 가깝다. 헬스를 2년 넘게 해도 인바디 근육량은 항상 표준 미달이었다. 멘탈도 약해서, 이전 회사에 다닐 땐 6년 동안 해마다 한 번씩 꼭 울었다.
복싱 스몰토크의 끝은 늘 비슷하다.
“다이어트는 필요 없어 보이니까 다음에는 이 운동을 해봐라."
“샌드백에 맞는 거 아니냐."
“스파링에서 한 번 맞고 나면 그만둘 것 같다.”
남편은 아직도 “샌드백에 질 것 같다”며 놀린다.
내가 다니는 체육관은 ‘정통복싱’ 간판이 붙은 건물 지하에 있다. 문 앞에서부터 '띵-' 하고 울리는 공 소리가 들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샌드백 치는 '뻑' 소리가 쏟아진다. 첫날 계단을 내려가며 직감했다. 여기는 다니기만 해도 강해질 것 같다.
여자는 복싱장을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조금은 세 보이는 효과가 있다. 내가 복싱장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겉보기엔 약골인데 복싱을 한다고? 사실은 은근히 강한가 봐'라고 생각해 주길 바란다. 퇴근 후 지하철역에서 버스를 타면 체육관 바로 앞 정류장에 내린다.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나는 지금도 버스에서 내려 공 소리가 울리는 지하에 내려갈 때마다 어깨를 으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