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어때요
샌드백을 치면 정말 화가 풀릴까? 사람을 팰 수 없으니 대신 샌드백으로 스트레스를 풀겠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도 온 힘을 다해 뭔가를 때리면 묵은 감정이 조금은 가라앉을까 궁금했다. 막상 해보니 샌드백을 세게 칠수록 손목이 아프고 자세가 무너져서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았다. 한두 번 강력한 펀치를 날리는 것보다, 흔들리는 샌드백을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만큼 쫓아다니며 "팡, 팡, 팡팡" 리드감 있게 칠 때 마음이 진정되고 머리가 맑아졌다.
코치님이 3분 내내 몰아붙이면서 미트 훈련을 시킨 적이 있다. 한 라운드가 끝나자 머리가 핑 돌고 토할 것 같았다.
"헉헉, 숨! 숨 어떻게 쉬어요? 언제 쉬는 거예요?"
그제야 복싱에 맞는 호흡법을 아직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고수들이 주먹을 낼 때 내는 "츠츠"나 "슉슉" 소리가 단순히 멋을 부리기 위한 게 아니라, 호흡을 내쉬기 위한 소리라고 한다. 마우스피스를 낀 채 각자 편한 방식으로 내쉬다 보니 소리가 다양하다고 한다.
나는 그동안 몸에 힘을 꽉 주고 숨을 참은 채로 주먹을 내고 있었다. 헬스를 할 때 힘을 줘야 하는 구간에서 숨을 참고 복압을 유지하라고 배웠고, 그 습관이 복싱에서도 그대로 나왔다. 무산소 운동에서 배운 호흡법으로 3분 내내 주먹을 내니 머리가 핑 돌 수밖에 었었다.
그 이후로는 섀도복싱을 하든 샌드백을 치든, 의식적으로 호흡하는 연습을 했다. 숨 쉬는 걸 잊을 정도로 힘들다 보니, 복싱을 할 때면 인생사가 단순해졌다. 습관적으로 숨을 참은 채 주먹을 내다보면 뇌는 오직 “숨 쉬어!”라는 명령만 내린다. 그 순간, 호흡 외의 다른 일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한국말에는 ‘힘들어서 죽겠다’, ‘배고파서 죽겠다’처럼 ‘죽겠다’는 표현이 유난히 많다. 그런데 복싱을 할 때면 그 어떤 일도 정말로 죽을 일은 아니게 된다. 숨을 들이마시고 뱉을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삼십 년 넘게 생각이 많은 사람으로 살면서 명상에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려 해도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평온해질 수가 없었다.
"내 호흡을 잠시 느껴봅니다."
'잠시? 어느 정도로 잠시? 3초? 5초?'
"내 호흡은 점점 편안해집니다."
'벌써? 나는 아직인데. 벌써 편안해질 수 있는 사람들이면 이 명상 영상을 안 볼 텐데.'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쉽니다."
'배경음악으로 깔린 새소리는 직접 녹음한 걸까? 녹음하려면 장비는 얼마나 챙겨가야 할까? 새 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이걸 들으면 명상이 잘 안 되겠는데?'
복싱을 하면서는 오히려 호흡에 집중하지 않게 되었다. 그저 너무 힘들어서 숨 쉬는 일조차 잊었을 뿐인데, 명상할 때보다 훨씬 더 마음이 차분해지고, 스트레스가 풀렸다. 그래서 하루가 복잡해질 것 같으면 체육관으로 갔다.
아직도 회사에서 실수를 한다. 신입 시절에는 실수 하나에도 필요 이상으로 자괴감에 빠지곤 했다. 그때는 그래도 "잘 몰라서"라고 할 수 있었지만, 이제 '10년 차'란 이름표가 있으니 자괴감에서 빠져나올 핑곗거리가 없다. 다행히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할 사고를 친 적은 없다. 늘 사과하고, 수습하고,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일은 마무리를 잘해도, 그 뒤에 남아 있는 감정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다.
'몇 번이나 봤는데 왜 마지막에 그걸 놓쳤을까. 책임감 없다고 보이기 싫은데. 나한테 실망해서 앞으로 일감을 안 주면 어떡하지.'
잘못한 게 나니까 어디에 하소연할 수도 없다. 남 탓을 할 수도 없다. 그러면 안 됐던 일이니까 "그럴 수 있지"라는 말도 안 통한다. "다음에는 조심하자"라고 넘기려고 해도, 이번에는 왜 조심하지 않았는지 자꾸 도돌이표처럼 되짚게 된다.
스스로 괜찮다고 다독이고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건 잘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동안은 시간을 약 삼아 부정적인 마음이 자연스레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 하룻밤이 지나고 나면 대개 괜찮아지니까, 그날만 잘 넘기면 된다. 다만 야근을 하느라 하루가 길어질 때가 문제였다.
복싱을 시작한 뒤로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체육관에 30분만 다녀와도 금세 괜찮아졌다. 퇴근 후 운동을 마치고 다시 노트북을 펴면, 마치 아침에 새로 출근한 사람처럼 초기화된 상태로 일할 수 있었다.
달리다 보면 식혜 밥알처럼 가라앉아 있던 온갖 생각들이 섞이고 뒤흔들린다. 그 과정에서 잠시 잊고 있던 생각을 다시 떠올리거나 잘못된 곳에 묵혀 있던 마음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는다. 그제야 정돈된 마음 사이로 고민이 또렷하게 정체를 드러낸다.
- 김상민,『아무튼, 달리기』중에서
숨을 헐떡이면서 줄넘기를 하고 샌드백을 치면, 내 안의 식혜 밥알도 뒤섞였다. 앞자리에 있던 부정적인 마음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마음이 앉았다. 복싱장에 다녀오면, 하루의 무게가 가벼워지고 마음이 다시 숨을 쉬었다.
이래서 공부가 안되고 머리가 복잡할 때는 나가서 운동장을 뛰라고 하는 거구나. 한강에 모여 달리는 러너들은 이 좋은 경험을 매일 하고 있었구나. 수험 생활이 다 끝난 다음에야 알게 된 게 아쉽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머리를 비우러 갈 곳이 생긴 게 다행이다. 운동이든 인생이든 힘을 빼야 잘 된다는 건 결국 같다. 숨을 뱉으며 힘을 빼는 시간이, 살면서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