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어때요
여느 때처럼 남학생들 사이에서 줄넘기를 하고 있었다. 몇 분 지났나 시계를 보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처음 보는 여자가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학생도 아니고 학부형도 아니다. 위아래 검은색 운동복 차림인 걸 보니 운동하러 온 회원이 맞다.
'여자다!!! 여자!!' (나도 여자다.)
언젠가부터 체육관에 성인 여성은 나뿐이었다. 초반에는 남편과 같이 다니는 분도 있었고, 대학생 서너 명이 몰려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겨울방학부터 대학생들이 안 나오더니 어느새 혼자가 됐다.
다른 여성 회원이 있다고 해서 내가 적극적으로 다가갈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낯을 가리는 탓에 누가 말이라도 걸까 봐 체육관 바닥만 보고 다니는 편이다. 그렇더라도 체육관에서 동성 친구를 사귈 수 있는 기회가 아예 없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그렇게 투명 인간처럼 스르륵 왔다가 스르륵 가는 체육관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나타났다. 상대방은 응한 적 없는 만남인데 혼자 들떴다. 줄넘기를 하는 10분 동안 어떻게 말을 걸면 좋을지 고민되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참 어려 보이는데 내가 말을 걸어도 되나, 부담스럽지 않을까, 말을 트면 계속 인사해야 할 텐데, 금방 그만두려나,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려나….'
고민만 하다가 두 번을 놓치고, 세 번째 마주친 날 드디어 용기를 냈다. 운동 중에 방해하긴 싫어서, 쉬는 시간에 정수기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칠 기회를 엿보았다. 운동이 다 끝난 다음에야 정수기 옆 사물함 자리에서 짐 싸는 척을 하면서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혹시 최근에 등록하신 거예요?"
"아, 네."
"여자가 잘 없어서 반가워서 여쭤봤어요. 흐흐."
"아아, 네."
"저번 주에 오신 거예요?"
"한 달 전에 등록했는데, 쉬다가 저번 주에 다시 시작했어요."
"아아, 그러시구나. 하하"
나는 사회생활 10년 차이지만 스몰토크에 아직도 약하다. 그녀도 딱히 대화를 이어가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어서 서둘러 인사하고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다음에 마주치면 인사를 해야 하나? 그냥 꾸벅 고개 인사만 하면 되나? 혹시 내가 부담스러워서 그만 나오면 어떡하지?' 말을 걸고 나니 오히려 고민이 늘었다.
복싱은 원래 혼자 하는 운동인 줄 알았다. 정해진 수업 시간이 없고 아무 때나 와서 원하는 만큼 하다가 가면 돼서 헬스장과 비슷했다. 헬스장에서 모두와 인사하지 않는 것처럼, 복싱장에서도 스파링 할 때만 빼면 서로 아는 채를 안 하는 분위기였다. 나도 코치님과 안부를 나누거나 관장님의 주먹 인사에 답할 때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와 교류할 일이 없었다.
스무 살에 다녔던 태권도장은 정해진 수업 시간이 있어서, 같은 수업에 출석한 회원과는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같이 품새를 외웠다. 그때는 그런 활력이 좋았지만, 이제는 회사에서 일과 사람에 치이다가 퇴근하면 혼자 있고 싶은 직장인이 됐다.
그래서 복싱장의 고독함이 좋았다. 복싱장에서는 내 이름, 나이, 직업을 알릴 필요 없고 내가 결석한다고 연락이 오지도 않는다. 시계, 바닥, 샌드백만 보면서 운동하다 보면 샌드백 소리는 ASMR이 되고, 나는 김 회계사에서 김 아무개가 된다.
그런데 혼자여서 좋았던 시간이 1년을 넘어가니까, 그 고독이 외로움으로 바뀌었다. 이제는 파트너와 마주 보고 기술 연습을 하고, 편하게 스파링을 하면서 실전 감각을 키우고 싶다. 혼자 샌드백만 치는 걸로는 한계가 있다. 누구라도 붙잡고 어느 관절이 아프고 어느 기술이 어려운지 수다를 떨고 싶다. 내가 혼자 다른 길로 빠진 건 아닌지 알고 싶다.
복싱 관련 SNS를 둘러보면 초등학생과 성인이 운동 파트너로 친하게 지내고, 여성들끼리 모여서 스파링을 하는 동호회도 있다. 아무도 소외시킨 적이 없는데, 괜히 소외된 기분이 든다. 나는 혼자 하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청춘물을 찍고 있었구나. 그렇다고 내가 복싱장에서 엄청난 우정을 쌓고 싶다는 건 아니다. 어차피 그럴 에너지도, 사교성도 없다. 그래도 짝꿍이 있으면 실력도, 재미도 두 배가 되지 않을까?
문제는, 체육관을 아무리 둘러봐도 내 사교성으로는 쉽게 말을 걸 만한 상대가 없다는 거다. 남자 어른들은 체급과 실력이 너무 차이 난다. 그래서 같이 운동하자는 건 결국 내 운동을 도와달라는 말이 되어버리고 초면에 그런 민폐는 안된다. 패스. 체급이 비슷해 보이는 중학생들도 있지만, 친구들끼리 몰려 있는 사춘기 소년들 사이에 끼어들 배짱은 내게 없다. 패스. 초등학생은 한창 낯선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 어린이 아닌가? 패스.
그런 중에 새로운 여자 회원이 왔으니 놓칠 새라 일단 인사라도 해야 했다. 말을 건 이틀 뒤 다시 마주쳤을 때, 나는 눈인사라도 해야 하나 주춤거렸고 그 사이에 그녀가 먼저 인사해 왔다. 나만큼 작은 목소리인 걸 보니 고맙게도 그녀도 용기를 내준 것 같다. 그 이후로는 시간대가 달라졌는지 다시 보지 못했지만, 이 작은 인연 하나가 복싱을 더 좋아하게 만드는 힘이 됐다.
복싱장에서 4계절을 보내고 나니, 복싱이 정말 혼자 하는 운동인지 잘 모르겠다. 갈고닦는 건 혼자 해야 하지만, 결국엔 상대가 있어야 공격도 방어도 할 수 있다. 그동안 숫기가 없어서 운동 친구를 못 만든 걸 '복싱은 고독해야 멋있다'는 핑계로 덮고 있었던 건 아닐까.
사실 위에서 말한 동호회는 여성 복서라면 누구나 신청 가능하다고 소개되어 있다. 다만 내가 낼 수 있는 용기는 SNS 계정 팔로우가 최대치다. 새 학기처럼 낯선 사람에게 다가가야 하는 분위기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좋아하는 걸 오래 좋아하려면 조금씩이라도 부딪쳐 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