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어때요
집 근처에 실력 좋은 한의사 선생님을 찾았다. 실력이 좋으면 까칠할 법도 한데, 이 선생님은 '솔'보다 높은 음으로 늘 친절하게 진료를 본다. 진료 다섯 번 만에 5년 넘게 무릎에서 나던 '뚝' 소리가 사라졌다. 그런데 복싱 스텝을 좀 열심히 연습했더니 금방 다시 욱신거린다.
"운동하면 무릎이 뜨거워지는 게 염증 때문인가요?"
"어떤 운동하시는데요?"
"...복싱...이요."
괜히 머쓱했다. 이렇게 열심히 치료해 주시는데, 또 다칠 운동을 한다는 게 미안했다.
삼십 대가 관절이 아픈 이유는 대부분 과사용 때문이라고 한다. '과하다'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얇은 허벅지와 손목에 비하면 복싱은 분명 과하다. 소리만 나던 무릎은 굽힐 때마다 시큰하고, 손가락·어깨·손목·발목이 돌아가며 신호를 보낸다. 남편은 내 몸 설계가 잘못된 거 같다며 장모님께 AS를 요청하겠단다.
복싱 때문에 아픈 게 아니라고 부정했지만,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복싱은 내 몸을 단련시키는 동시에 조금씩 망가뜨린다. 심폐지구력은 확실히 좋아졌지만, 그게 전부다. 웨이트를 안 하고 복싱만 하다 보니 근육은 늘지 않았고, 체력 운동도 미루다 보니 글러브를 끼고 3분 내내 뛰면 아직도 숨이 찬다. 그래서 내 몸을 보면 운동하는 사람 몸처럼 보이진 않는다.
관절 때문에 병원을 오가다 보면 돈은 줄고 근심은 늘어난다.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많은데, 나이가 더 들면 산이 좋아질 수도 있는데, 출산 후엔 더 아프다던데. ‘나중엔 수술 기술이 더 좋아지겠지’ 하며 위로하다가도, 소모품이라는 관절을 너무 빨리 써버리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 불안한 마음에 복싱을 할 때 동작을 설렁설렁하게 된다. 회피 기술인 더킹이나 위빙(*)을 할 때 무릎을 살짝만 굽히다 보니 항상 지적을 듣는다.
(*) 무릎을 굽혀 무게중심을 낮추면서 고개를 한쪽으로 숙이거나(더킹),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U자를 그리며 움직여 (위빙) 공격을 피하는 회피 기술
스무 살 코치님은 고등학생 때부터 무릎 MRI를 찍고 소염제를 달고 살았다고 했다. 미트 훈련을 마치면 손목이 아픈 듯 문지르는 모습도 자주 봤다. "어린데 벌써 그러면 어떡하냐"라고 물었더니 "제가 선택한 길인데 감내해야죠."라고 한다. 메달로 스펙을 쌓아 대학에 가거나 선수 생활을 이어간다. 어린 선수들이 선택한 길에서 통증은 일상의 일부다. 무릎 연골이 닳고 손가락 인대가 다쳐도 묵묵히 안고 간다.
이모뻘로서 오지랖을 부려 잔소리를 하고 싶다. 몸이 자산인 직업이니 더 아끼라고, 아프면 참지 말고 제때 병원에 가라고. 어릴 때부터 조심해야 좋아하는 일을 더 오래, 잘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감내해야죠."라는 말 앞에서 더 할 말이 없었다. 어른이 되면서 핑계가 많아지고, 몸을 사리며 손익을 따지게 되었는데, 진짜 좋아하는 일 앞에서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새삼 떠올린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통근을 하고 타이핑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컨디션이면 커리어를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좀 덜 아껴도 되려나.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무릎 관절이 어차피 닳아 없어질 소모품이라면, 쓸 수 있을 때 제일 원하는 곳에 팍팍 쓰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게 복싱이다.
남편이 남자친구이던 시절, 같이 드라마를 보다가 "우리는 저런 전쟁 같은 사랑을 못 했네? 우리도 잠깐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볼까?"라는 농담을 한 적이 있다. 좋아할수록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랑이라니, 마지막으로 한 번쯤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 대상이 복싱이 될 줄은 몰랐지만.
드라마였다면 목숨 바쳐 사랑하며 엔딩을 맞이하겠지만, 내 인생은 엔딩 이후에도 계속된다. 복싱이 너무 재밌어서 아픈 걸 참고 무릎을 더 쓰고 싶지만, 함부로 몸을 바칠 수는 없다. 할머니가 되어 산책하고 여행도 다니려면, 최소한의 관절은 남겨두어야 한다. 더 잘하고 싶지만, 나는 생활체육인이니 선수처럼 모든 걸 걸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무릎을 아끼자니 복싱이 아쉽고, 복싱을 열심히 하자니 무릎이 아프다. 몸을 사려야 할지, 사리지 말아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