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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Jun 25. 2024

나는 왜 이렇게 어리석은가?

서문

F.W. 니체가 쓴 <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의 목차를 보면 재미있다. '1부 : 나는 왜 이렇게 현명한가, 2부 : 나는 왜 이렇게 영리한가...' 니체는 헤겔과 달리 생전 인생은 초라했다. 이 책을 마지막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당시 책 한 권 안 팔리는 철학자가 이런 엄청난 목차를 지었다는 것은 한갓 과대망상일 수 있다. 그런데 니체는 죽었고 자비로 출판해야 했던 철학자는 현대에 있어 가장 유명한 철학자가 되었다. 19세기말을 살았던 무명에 가까운 철학자와 21세기의 슈퍼스타 철학자의 본성이 바뀐 것일까? 누구나 사후에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해 볼 때 니체의 명성은 그의 글을 높이 평가한 후대 독자, 특히 철학자들 덕분이다. 자신의 글쓰기 역량이 아니라 순전히 외부 요인 탓이 크다. 개인적 불행이겠지만 니체는 시대를 잘못 타고난 것이다.


나 역시 감히 니체에 스스로를 빗대는 과대망상으로 글을 시작했다. 이유는 서문의 제목을 니체의 목차를 패러디했기 때문이다. 어리석음에 대한 자기 자신의 내부고발을 통해 무지에 대한 메타인지력을 높이고자 한다. 이는 소크라테스가 불특정 다수 그리스인들에게 무지에 대한 일깨움 끝에 헴록(독미나리)을 마시는 사형선고를 받아들인 이래로 딱히 나아진 점은 없다. 여전히 현대인들도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로버트 그린의 <인간 본성의 법칙>을 보면 인간은 평균적으로 자신이 똑똑하다고 여긴다고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근거 없는 자신에 대한 후한 과대평가는 성공을 위한 자신감일 수도 있고 몰락의 징후일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후자의 경우로 끝난다. 자수성가 혹은 성공신화가 대체로 특이사건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사람들은 빠른 성공을 바란다. 특히 농사나 공장근로처럼 더럽고 힘들지 않고 노력이 적게 들지만 보상이 큰 시스템, 이를테면 로또를 선호한다. <빅터 니더호퍼의 투기교실>에 저자는 투기와 투자는 사실상 동일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나 역시 동의한다. 투기라는 단어가 주는 불쾌한 이미지는 화려한 경제용어로 수사된 투자라는 정치적 올바름(PC) 식의 단어 순화일 뿐이다.


대세상승장에 저금리를 이용한 레버리지를 통해 투기 혹은 투자를 시작한 사람들은 순식간에 큰 부를 얻을 수 있었다. 자산 인플레이션에 편승한 사람들은 큰 부를 일궈냈다. 이들은 인플루언서가 되어 소셜 미디어(SNS)를 통해 부를 과시하며 부자 되는 법을 이야기하고 거들먹거리고 있다.


하지만 광란의 1920년대 끝에 대공황, 닷컴버블 이후에 낭떠러지 절벽이 있을지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는가? 당시 투자자들은 반등을 기대했다가 파산하고 투자세계를 영원히 떠났다. 어쩌면 미연준(FED)이 2008년 달러를 천문학적으로 찍어내지 않았다면 이전의 경제침체처럼 자본주의 시스템을 정지했을지도 모른다.


주식 투자자 입장에서는 지난 10여 년은 돌이켜보면 투자 운(運)이 좋은 세상이었다. 국내 부동산 불패신화 역시 (이제는 686이 된) 586과 4050에게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유례없는 경제 성장과 인구폭발이 있었던 대한민국이라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서 스스로에게 의문이 발생한다. 나는 왜 대세상승장에서 투자했는데 손실이 났을까? 이 질문이 앞으로 글의 핵심 화두이다.


먼저 변명을 하자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가 말했던 불확실성인 전쟁 안개(the fog of war)가 펼쳐져 있었다. 미국이 금리 인하를 한다고 해서 기계적으로 주가가 수직상승하지 않는다. 멀리서 보면 우상향 그래프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엄청난 커브가 있었다. 심지어 앙드레 코스톨라니가 유행시킨 기정사실(fait accompli) 효과도 개입하여 호재 당일 주가가 떨어지기도 한다.


레이 달리오가 쓴 <금융 위기 템플릿>을 보면 금융위기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 대처하는 헤지펀드의 현장감 있는 시야를 느낄 수 있다. 결론은 월가의 전문가 역시 대략 짐작은 했지만 미래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볼 수 있다. 닳고 닳은 헤지펀드 CEO가 잘 몰랐는데 그때 나는 얼마나 미래에 대한 인사이트가 있었을까? 또한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후견지명(後見之明), '내 이럴 줄 알았지.'로 생각할 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쉬워 보인다. 하지만 지금 경제상황을 브리핑하고 미래 주가를 예측해 본 뒤 1년 뒤에 열어본다고 하자. 얼마나 많이 틀렸을까? 나는 지금 질문이 어리석었다고 반론을 펼친 것이다. 충분히 실패할 만하다고 자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명백한 사실은 투자에 성공하여 한강뷰 아파트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경제적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비율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들과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심 탈레브가 <행운에 속지 마라>에서 말했던 실패한 투자자의 변명처럼 단순히 운이 없어서인가? 아니면 투자 재능이 없는가, 혹은 무지했거나 리스크 관리에 소홀했던 것인가?


앞으로 내 투기의 정점에서 바닥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그려나갈 것이다. 인기 드라마처럼 기승전결에 따라 원하는 투자성공 해피엔딩은 없을 것이다. 내 흔해 빠진 실패한 투자인생을 고통스럽게 복기하여 소수의 독자들에게 반면교사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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