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주인공이 성적 매력이 없는 경우로 설정되는 소설은 흔하지 않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자가 주인공에 감정이입하여 읽을 때 느끼는 대리만족을 배반하였다. 역으로 약혼자인 남자가 빼어난 미모를 지닌 설정이다. 뭔가 리버스 트로피 와이프, 남성우월주의 사회를 미러링 하는 느낌일 수도 있지만 시대적 배경 상 페미니즘이 있을 리 만무하므로 아니므로 조금 독특하다.
책의 제목은 미국 뉴욕 워싱턴 스퀘어 공원 인근 저택에 살고 있는 주인공의 설정에서 따왔다. 올드 머니라고 불리는 뉴욕의 상류층이었던 저자의 과거가 반영되어 있으리라. 19세기 말 주거공간이 상업 지구로 변화되는 올드 뉴욕이 배경이다.
주인공 캐서린은 부유한 상속녀로서 연수입이 어머니 쪽으로 1만 달러, 의사인 아버지가 주는 재산을 포함하면 3만 달러가 넘는다. 2009년 역자의 주석에 따르면 당시 1만 달러는 현재 가치로 100만 달러라고 한다.
하지만 능력은 없고 허영심 많아 보이는 남자 모리스 타운젠드를 아버지 슬로퍼 씨는 결혼에 반대한다. 만일 결혼을 강행할 경우 상속분이 1만 달러로 줄어들 예정이다. 잘생긴 약혼남인 모리스는 결국 그녀를 고민 끝에 포기하고 만다. 세월이 흘러 22세였던 주인공은 40대 중년이 된다. 그녀는 사교계 인사로 살아가지만 끝내 독신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상속이 이루어지지만 상속분은 수정된 유언장에 따라 대부분 사회에 환원되었다. 성공하진 못했지만 애 없는 돌싱이고 여전히 잘생긴 중년의 모리스가 그녀에게 돌아왔지만 그녀는 이미 냉담해졌다. 그 모습은 마치 레핀의 명화가 떠올랐다.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일리야 레핀, 1884~1888, 트레치야코프미술관)
소설은 이렇듯 주인공에게 혹은 독자에게 꿈도 희망도 남기지 않고 끝난다. 그래서 이 소설의 장점인 리얼리즘과 의식의 흐름이 현대 소설을 탄생시킨 거대한 요람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덧붙여 말하면 아버지인 의사 역시 운 좋게 예쁜 아내를 만나 그녀의 재산을 상속받았다. 약혼남(모리스)과 아버지(슬로퍼)의 상황은 같지만 끝까지 자신과 여러모로 닮은 사위를 받아들이길 인정하지 않고 딸의 무능력을 경멸했다. 이 책은 주인공 캐서린의 마음이 차갑게 식어가는 과정을 담담히 묘사한 것이며 그것을 일컬어 일종의 성장소설이라 할지도 모른다. 독자에게는 꽤나 우울한 자화상이다.
인상 깊은 구절
생명을 구하는 것이 직업인 사람으로서 자신의 가족에 관한 한 그의 실적은 분명 부진했다. 영민한 의사가 3년 안에 아내와 아들을 잃었다면 의술이나 애정이 부족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하리라. 하지만 우리의 친구는 이런 비판을 모면했다. 말하자면 그는 자책을 제외한 모든 비판을 모면했다. 하지만 그 자책이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했다. 그는 내면적 질책의 무게를 짊어지고 여생을 보냈고, 그의 아내가 죽던 날 밤 가장 강력한 손이 그에게 가한 가책의 상흔을 안고 살았다. 내가 이미 말했듯, 그를 높이 평가한 사교계는 냉소적이 되기에는 그를 너무 동정했다. 그의 불행은 그를 더 흥미롭게 만들었고, 그가 인기를 얻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의사 집안도 음험한 병을 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슬로퍼 씨는 내가 언급한 두 사람 말고 다른 환자들도 잃었는데, 가족을 잃은 것이 명예로운 선례가 되었다.
“그래 그럼, 우리 가자꾸나. 짐을 싸라.”
“타운젠드 씨에게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어요.” 캐서린이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차가운 눈길을 그녀에게 고정시켰다. “그의 허락을 구해야 한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는 그가 허락해 주길 바랄 뿐이겠구나.”
의사가 한 말 중 최고로 계산된, 극적 효과를 최대한 노린 발언이었다. 캐서린은 자기 연민이 스며든 이 말에 마음이 아팠고, 주어진 상황에서 아버지에게 효심을 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어 아주 잘됐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니라 이윽고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께서 그렇게 싫어하시는 일을 하기로 든다면. 아버지 슬하에서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마치 날 경멸하듯 말하면요!” 캐서린은 감정에 북받쳐 말했다. “배 타기 전날 밤 아버지는 그런 식으로 말씀하셨어요.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어요. 항해하는 동안 내내 그 생각을 했지요. 그러고 결심했어요. 다시는 아버지에게 아무 것도 부탁하지 않고,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을 거라고요. 이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아요. 우리 둘이 아주 행복하게 살아야 해요. 그리고 아버지의 용서를 구하는 것처럼 보여서도 안 돼요. 그리고 모리스, 모리스, 당신은 날 절대로 경멸하면 안 돼요!”
하기 쉬운 약속인지라 모리스는 멋있게 약속을 해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보다 더 성가신 일은 없었다.
“절대로 아니에요!” 캐서린에게 뭐라고 말할지 생각을 해놓았지만, 오빠에게는 한 마디의 방어도 마련하지 못한 페니먼 부인이 외쳤다. 그래서 분노에 찬 부정(否定)이 그녀의 손에 쥔 유일한 무기였다.
“그럼 그놈이 집행을 유예해 달라고 청했다고 할까? 좋으신 대로!”
“딸의 순정이 농락당해서 아주 기쁘신 모양이에요.”
“그렇단다.” 의사가 말했다. “내가 그렇게 예언을 했으니까! 내가 옳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건 큰 기쁨이지.”
“그걸 기쁨이라고 하다니 몸서리가 나네요!” 그의 누이가 소리쳤다.
복도에서 그는 안절부절 조바심을 치는 페니먼 부인을 발견했다. 호기심과 체면의 모순된 충동 때문에 그곳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정말 멋진 제안을 하셨어요!” 모리스가 그의 중절모를 탁탁 털면서 말했다.
“그렇게 매정하게 굴던가?” 페니먼 부인이 물었다.
“나한테 조금도 관심이 없어요. 지독하게 냉담하던 걸요.”
“그렇게 냉담하던가?” 페니먼 부인이 애달아 말을 이었다.
모리스는 이 질문을 무시했다. 그는 모자를 쓴 다음 잠시 생각에 잠겨 서 있었다. “그럼 대체 왜 결혼하지 않은 거지?”
“그래 정말 왜 안 한 거야?” 페니먼 부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나서 이것이 설명으로 불충분하다고 느낀 듯 이렇게 덧붙였다. “그렇지만 낙담은 금물이네 다시 돌아올 거지?”
“다시 돌아온다고? 제기랄!” 그리고 모리스 타운젠드는 눈이 휘둥그레진 페니먼 부인을 남겨 놓은 채 집 밖으로 성큼 성큼 걸어 나갔다.
그사이 응접실의 캐서린은 자수 조각을 집어 들고 다시 자리를 잡았다. 마치 평생을 그럴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