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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Jul 24. 2024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카를로 로벨리

물리학

저자는 일반인에게 양자역학이 무엇인지 가장 쉽게 설명해 주는 이론물리학자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는 이 책에서 철학과 과학의 영역을 넘나들며 양자역학에 대해 이야기한다. 초반에는 대중에게 '명칭'만 잘 알려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공들여 설명한다. 저자는 이 사고실험에 고양이의 죽음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잠들어 있는 것으로 설정했다. 그 점이 꽤 귀엽다.


독자의 흥미를 돋게 하기 위해 이 노련한 베스트셀러 작가는 마치 전기작가의 글처럼 과학자들의 인생사를 끄집어낸다. 그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관련된) 공식을 본문에 단 두 개 소개했지만 하지만 뒤로 갈수록 난이도가 높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기본적으로 철학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 있어야 후반부를 쉽게 완주할 것이다.


양자역학은 여전히 과학 내부뿐 아니라 철학적으로 논쟁이 많은 학문이다. 과학자들은 이 분야가 가장 전망 있다는 증거이다. 칼 포퍼가 말한 과학의 도구인 '가설과 검증'을 준비한 많은 학자들이 양자역학에 집중하고 있다. 반면 철학자는 꽤 받아들이기 어렵다. 


양자역학을 발전해 나가면 서양 철학의 두 기둥인 존재론과 인식론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존재론은 양자 존재의 확률성 때문에 궁극적 실체에 도달하기 어렵고, 인식론은 비가환성*으로 경험주의가 파괴될 위험이 있다.

*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관측 시점마다 값이 달라진다.


저자는 철학자 에른스트 마흐의 주장을 인용하여 이를 통합하려 한다. 실로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를 통합하려 한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의 엄청난 기획처럼 말이다. 저자의 관계론은 정리하면 두 사물은 상관관계가 있으나 관찰자인 제3자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제3자가 없으면 상관관계는 무의미하다. 이러한 관계성은 양자 영역에서부터 커다란 자연의 어떤 층위에서 모두 발견된다. 이러한 해석은 양자역학에 대한 직관적 이해에 도움은 된다. 저자는 신경과학을 통해 의식마저 뉴런과 사물과의 관계로 묘사한다. 엄밀히 말하면 저자는 기계론, 유물론적 사고를 배격해야 한다고 하지만 저자의 뇌신경에 대한 해석은 본질적으로 유물론에 가깝다. 마흐가 러시아 공산주의 유물론 발전에 끼친 영향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그밖에 양자역학과 많이 얽히는 (불교 경전인 <나가르주나>에서 언급한) 공(空) 사상도 나온다. 관계가 없으면 우리는 마치 무와 같이 텅 빈 것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존재는 관계를 통해 존재임이 드러난다는 해석은 독일 관념론 철학자 피히테와 그를 계승한 성공한 친구 헤겔을 떠오르게 한다. 성경과 그를 인용한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여전히 양자역학은 열려있는 학문이다. 저자의 책은 대중에게도 생각의 지평을 온 우주에 편재한 양자 영역으로 넓힐 수 있는 마중물이 될 것이다.


“심신 문제는 우리에게 신비로운 문제이지만, 자연에게는 해결된 문제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자연이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이해하는 것뿐” - 에릭 뱅크스, 저자의 인용 글 재인용



인상 깊은 구절



하이젠베르크의 아이디어는 전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모든 양–위치, 속도, 에너지–을 더 이상 숫자가 아닌 숫자 표로 쓰는 것입니다. 전자의 단일 위치 x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도약이 일어나는 각각의) 가능한 위치의 전체 표 x가 있는 것이죠. 새로운 이론의 아이디어는 기존의 물리 방정식을 계속 그대로 쓰면서, 흔히 쓰는 물리량들(위치, 속도, 에너지, 진동수 등)을 이런 표들로 단순히 대체하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약할 때 방출되는 빛의 강도와 진동수는 표의 해당 항에 의해 결정됩니다. 또한 에너지에 해당하는 표에는 대각선 1행 1열, 2행 2열에만 숫자가 있으며, 이것이 보어 궤도의 에너지를 나타냅니다. 



플랑크는 실험에서 얻은 관찰을 통해 에너지의 꾸러미와 파동의 진동수 사이의 비례상수를 계산했습니다. 그는 이 상수를 ‘h’라고 불렀습니다. 그 의미는 몰랐지만요. 오늘날에는 보통 h를 사용하는 대신 ħ라는 기호를 사용하는데, ħ는 h를 2π로 나눈 값을 나타냅니다. 이 기호를 고안한 것은 디랙입니다. 그는 h에 가로선을 붙여 버릇했는데, 계산에서 h를 2π로 나누는 경우가 많아 매번 ‘h/2π’를 쓰는 것이 귀찮았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기호 ħ는 영어로는 ‘h bar(에이치 바)’ 이탈리아어로 ‘acca tagliata(아카 탈리아타)’로 읽습니다. ‘플랑크상수’라고도 불리는데 그 때문에 가로선이 없는 h와 혼동을 일으키기도 하죠. 오늘날 이 기호는 양자론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저는 ħ가 작게 수놓인 티셔츠를 가지고 있는데, 아주 좋아하는 옷입니다.) 



입자성은 관찰, 확률과 함께 양자론의 세 번째 핵심 개념입니다. 하이젠베르크 행렬의 행과 열은 에너지가 취하는 개별 입자적인 혹은 불연속적인 값에 직접 대응하는 것입니다. 



이 공식을 해독하려고 하지 마세요.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아직도 이 방정식을 두고 논쟁 중이니까요. 나중에 다시 이 방정식으로 돌아와서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어쨌든 여기에 공식을 적어두겠습니다. 이 방정식이야말로 양자론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 공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XP–PX = iħ


  이게 다입니다. 문자 X는 입자의 위치를 나타내고 문자 P는 입자의 속도에 질량을 곱한 값입니다(전문용어로는 ‘운동량’이라고 하죠). 문자 i는 -1의 제곱근을 나타내는 수학 기호이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ħ는 플랑크상수를 2π로 나눈 값입니다. 



양자의 기묘함은 ‘양자 중첩’이라고 불리는 현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양자 중첩’이란, 어떤 의미에서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속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대상이 여기에 있으면서 저기에도 동시에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이젠베르크가 “전자는 더 이상 하나의 경로를 따라가지 않는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그런 것이죠. 전자는 여기나 저기 중 어느 한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둘 다에 있습니다. 전자는 한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마치 한 번에 여러 위치에 있는 것 같아요.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한 대상이 여러 위치의 ‘중첩된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디랙은 이 기묘함을 ‘중첩 원리’라고 부르며 양자론의 개념적 기초로 삼았습니다. 



‘양자 중첩’이란, 말하자면 하나의 광자가 ‘두 경로에 모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광자를 보면, 도약하여 한쪽 경로에만 존재하고 간섭이 사라지죠. 



대상은 대상이 상호작용하는 방식 그 자체로 존재한다. 전혀 상호작용을 하지 않는 대상, 아무것도 영향을 주지 않고, 빛을 방출하지도 않고, 끌어당기지도 않고, 밀어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죠. 



이제는, 대상이 상호작용하지 않을 때에도 항상 속성을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조차도 불필요하며, 오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될 테니까요. 상호작용이 없으면 속성도 없습니다. 



답을 찾기 위해, 대상의 속성은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봅시다. 베이징에서 광자의 색을 측정하면 베이징에 대해서 색이 결정됩니다. 하지만 비엔나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비엔나에서 색을 측정하면 비엔나에 대해서 색이 결정됩니다. 하지만 베이징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두 곳에서 측정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에 두 광자의 색을 모두 볼 수 있는 물리적 대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 두 결과가 동일한지 여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두 광자의 색이 같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즉, 두 광자와 동시에 상호작용하는) 상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무의미한 것입니다.



한 대상의 속성은 다른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따라서 두 대상의 상관 속성은 제3의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두 대상이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제3의 대상에 관한 사항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관관계는 상관관계에 있는 두 대상이 모두 이 제3의 대상과 상호작용할 때 발현되는 것입니다.


  얽힌 상태에 있는 두 대상 간의 원격 소통처럼 보이는 현상을 모순처럼 생각하게 된 것은, 상관관계가 현실이 되려면 두 대상과 상호작용하는 제3의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나타나는 모든 것은 어떤 것에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잊었던 것이죠. 두 대상 사이의 상관관계도 두 대상의 속성입니다. 이는 모든 속성과 마찬가지로, 또 다른 제3의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얽힘은 둘이 추는 춤이 아니라, 셋이 추는 춤인 것입니다. 



외부의 관점에서 볼 때, 한 대상이 다른 대상에게 나타나는 것, 즉 어떤 속성이 드러나는 것은, 바로 그 대상과 다른 대상 사이의 상관관계가 나타나는 것(일반적으로 말해 얽힘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얽힘은 현실을 엮는 관계 자체를 외부에서 본 모습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그것은 대상의 속성을 현실화하는 상호작용 과정을 통해 한 대상이 다른 대상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공준이 양자론을 요약합니다. 어째서 그런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정보는 유한하다: 하이젠베르크의 원리 

2. 정보는 무궁무진하다: 비가환성




하이젠베르크는 이 중요한 사실을 양자론을 구성한 직후인 1927년에 밝혀냈습니다.74 그는 물체의 위치에 관한 정보의 정확도가 ΔX이고 그 속도(질량을 곱한 양)에 관한 정보의 정확도가 ΔP인 경우, 두 정확도를 한꺼번에 임의로 개선할 수 없다, 즉 ‘오차를 원하는 만큼 줄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두 정확도의 곱은 최소량인 플랑크상수의 절반보다 작을 수 없습니다. 이를 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ΔXΔP ≥ ħ/2


  이 공식은 “델타 X와 델타 P의 곱은 항상 ‘에이치 바’의 절반보다 크거나 같다”라고 읽습니다. 실재의 이 일반적인 속성을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라고 부르죠. 이 원리는 모든 사물에 적용됩니다.


  그 직접적인 귀결은 입자성입니다. 예를 들어, 빛은 광자들, 즉 빛의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보다 더 작은 알갱이가 있다면 이 원리를 위반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X와 P와 유사하게) 전기장과 자기장이 둘 다 너무 확정되어버리면 첫 번째 공준을 위반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어떤 대상에 대한 정보의 최대치에 도달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예상치 못한 무언가를 알 수 있다는 (그러나 이전 정보는 잃고서) 두 번째 공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미래는 과거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세계는 확률적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양자적 세계는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양립할 수 있는 겁니다. 양자론은 고전역학도 포괄하고, 우리의 일상적 세계상도 근사치로 포괄합니다. 근시라서 냄비 속의 끓는 물이 안 보이는 사람의 경험을 눈이 좋은 사람이 이해할 수 있듯이, 양자론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나 분자 규모에서 보면, 강철 검의 날카로운 칼날도 폭풍우 치는 바다의 가장자리처럼 거칠고 비뚤배뚤한 것이 됩니다.


  고전 물리학적 세계상은 그저 우리가 근시안적이기 때문에 견고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고전 물리학의 확실성은 단지 확률일 뿐입니다. 옛 물리학이 제공해온 선명하고 견고한 세계의 이미지는 사실 환상이었던 것입니다. 



아무것도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모든 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고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만 존재합니다. 나가르주나가 독립된 존재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전문용어는 ‘공空, śūnyatā, 순야타’입니다. 사물은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 덕분에, 다른 것의 결과로서, 다른 것과 관련하여, 다른 것의 관점에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연의 일부라면, 이 의미의 세계는 물리적 세계로부터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순전히 물리적인 측면에서, 의미의 세계란 무엇일까요?


  두 가지 개념을 통해 답에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비록 어느 하나만으로는 물리적 측면에서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기에 충분치 않지만 말이죠. 그 두 개념은 정보와 진화라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양자역학을 통해 물리적 세계의 본질을 상관관계의 네트워크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즉, 상관관계의 정확히 물리적 의미에서, 상호적인 정보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연계의 사물은 제각각 고유한 속성을 가진 고립된 요소들의 집합이 아닙니다. 우리가 위에서 이해한 의미와 지향성은, 어디에나 존재하는 상관관계가 생물학적 영역에서 나타난 특수한 경우일 뿐입니다. 우리 정신생활의 의미들의 세계와 물리적 세계 사이에는 연속성이 있습니다. 둘 다 모두 관계인 것이죠.


  우리가 정신적 세계의 이러한 측면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물리적 세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 사이의 거리는 이렇게 좁혀집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에 따라 세계를 다시 생각하면 질문의 조건이 달라집니다. 세계가 관계적이라면, 우리가 물리적 실재를 물리계에 자신을 나타내는 현상으로 이해한다면, 세계를 외부에서 바라본 기술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세계에 대한 기술은 궁극적으로 모두 내부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모든 기술이 결국 ‘1인칭’인 것입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 세계 안에 위치한 존재로서의 관점(제난 이스마엘Jenann Ismael의 말대로 ‘특정 상황에 놓인 자아’)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물리학이 제안하는 것과 동일한 논리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의 본질에 대한 생각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나뉩니다. 마음의 실재성은 무생물의 실재성과 완전히 다르다는 이원론, 물질의 실재성은 오직 마음속에만 존재한다는 관념론, 모든 심적 현상을 물질의 운동으로 환원할 수 있다는 소박한 유물론이 그것입니다. 이원론과 관념론은 최근 몇 세기 동안 우리가 세상에 대해 배운 것, 특히 지각이 있는 존재인 우리가 다른 존재와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과 양립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포함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이미 알려진 자연법칙을 따른다는 증거가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과도 양립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소박한 유물론은 주관적 경험의 실재와 직관적으로 조화를 이루기 어려워 보입니다. 



이 장의 서두에서 인용한 미국 철학자 에릭 뱅크스Erik Banks의 말대로, “심신 문제는 우리에게 신비로운 문제이지만, 자연에게는 해결된 문제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자연이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이해하는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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