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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hemata mathemata Aug 14. 2024

양귀자, 모순

한국소설


책의 제목인 <모순>은 한비자의 책에서 유래한 말이다. 한비자는 유교의 성인인 요임금에게 양위 받은 순임금이 백성을 교화했다면 요임금은 불완전한 존재라고 말했다. 이러한 형용모순을 '뚫을 수 없는 방패와 무엇이든 뚫는 창'에 빗대었다. 신(神)의 불완전성(악의 존재)에 대한 테마는 중세 스콜라 철학의 신 증명 방식에 대한 담론으로 매우 형이상학적이다. 법가 사상이 꽤나 유물론적인 느낌인 것과는 자못 다르다.


소설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이러한 내용을 장황하게 쓴 이유는 문득 작가의 책을 읽고 이런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뚫을 수 없는 창, 뚫리는 방패


이는 모순의 뜻과 정반대이다. 요컨대 인생은 모순적인 상황보다는 대체로 위의 표현에 가까운 현실이 비일비재하다. 결혼 적령기의 여주인공은 2명의 남자를 동시에 만나는 속칭 양다리를 하며 계속 저울질한다. 최종적으로 그녀가 결혼하는 남자를 선택하는 방법은 쌍둥이인 이모와 엄마의 삶을 관찰한 끝에 낸 결론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사랑을 택하고 싶지만 결혼은 현실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낸다. 실로 대부분 여자들의 결혼 방정식에 부합하는 내용이었다. 마음을 따르는 결혼은 불행 속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고, 경제적 여건을 따르는 결혼은 행복 속에서 불행이 발견된다. 나는 주인공의 선택이 현실을 뚫을 수 없는 창이었음을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모순이라는 제목이 모순인 것이다,


저자는 (독자인 나와 비슷한) 40대에 이 책을 썼다. 20대에 이러한 느낌의 글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젊은 시절에 부모를 이해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부모의 초자아를 벗어나기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현실에서 좌절한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좌절과 실패는 가난이라는 인큐베이터에서 급속하게 자라난다. 저자는 주인공의 가난으로 그녀의 성숙을 정당화시켰다.  


사족을 붙이자면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대한 아포리즘이 많다. 유치하지도, 찬란하지도 않은 담담한 구절들을 보고 있으면 저자가 작가노트에서 이야기한 천천히 읽길 바라는 마음을 알 것만 같았다.




인상 깊은 구절



그러나, 그러나, 이런 말은 어떤가.


우리들은 남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납득할 수 없어한다.



장미꽃을 주고받는 식의, 삶의 화려한 포즈는 우리에게는 전혀 익숙하지 않았다. 가난한 삶이란 말하자면 우리들 생활에 절박한 포즈 외엔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 삶이란 뜻이었다.



돼지갈비집의 그 어수선한 분위기, 반드시 한 패의 손님 정도는 술병을 내던지고 접시를 뒤집어쓰는 싸움판을 연출하던 거기, 고기를 더 시키려면 있는 대로 고함을 질러야 함이 너무도 당연하던 거기에서는 비록 전쟁터 같긴 했어도 지루하지는 않았다. 하긴 포탄이 터지고 총알이 쉭쉭 나는 전쟁터에서는 누구라도, 결코, 지루할 수 없는 법이다.



만약 누군가 지금 대문을 들어서서 방 쪽을 쳐다본다면 아마 이런 그림이 보일 것이다. 환하고 어둡고, 다시 환하고 어둡고, 다시 환한 빛의 그림, 두 번의 어둠은 욕실과 부엌이 자아내는 것이고 세 번의 환한 빛은 세 명의 가족이 각각 하나씩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 가족은 언젠가부터 늘 이랬다. 두 개의 방을 비우고 하나의 방에 모여서 단란한 풍경을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들처럼 늘 이랬다.



그때나 지금이나 진모처럼 갈치를 탐하는 식성이 아닌 탓에 내가 이모부에게 관대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 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너 이런 말 알아? 결혼은 여자에겐 이십 년 징역이고, 남자에겐 평생 집행유예 같은 것이래. 할 수 있으면 형량을 좀 가볍게 해야 되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해. 열심히 계산해서 가능한 한 견 디기 쉬운 징역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사랑은 그 혹은 그녀에게 보다 나은 '나'를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의 발현으로 시작된다. '있는 그대로의 나'보다 '이랬으면 좋았을 나'로 스스로를 향상시키는 노력과 함께 사랑은 시작된다. 솔직함보다 더 사랑에 위험한 극약은 없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 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 키고 나를 왜곡시킨다. 사랑은 거짓말의 유혹을 극대화시키는 감정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보여줄 수 있는 날이 오긴 올 것이었다. 서로 사랑하므로 결혼한다면, 결혼으로 서로의 사랑이 물처럼 싱거워진다면.



행방불명으로 먼 세상을 떠돌던 한 인간이 속세로 귀향하기에 이만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런 말을 알고 있다. 인생은 짧다고, 그러나 삶 속의 온갖 괴로움이 인생을 길게 만든다고. 아버지는 참으로 긴긴 인생을 살았다. 그것이 진정 아버지가 원했던 삶이었을까.



마지막으로 한마디.


일 년쯤 전, 내가 한 말을 수정한다.


인생은 탐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탐구하는 것이다.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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