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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말이였을까?

- 책방의 시작


2020년 3월 7일. 대명천지, 이토록 드넓은 우주에서 하필이면 태양계의 지구에서, 오대양 육대주, 동북 아시아의 대한민국, 그것도 충청남도 천안시 불당동에서 책방을 연 것은 우주 탄생의 빅뱅과 맞먹는 메가톤급 사건이었다. 더구나 이날 반세기 50여 년을 홀로 살아온 늙은 총각이 고양이 밥을 산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책방 가문비나무아래가 있는 신불당동으로 넘어가 결국 월하노인의 도움으로 평생의 짝을 얻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기쁨은 찾기 힘들 것이다. 더구나 평소 소망하던 책방지기의 꿈을 거의 무임승차식으로 이루었으니 이는 분명 조물주께서 나를 어여삐 여겨 큰 복을 내려주신 덕분이다


비로소 인생 중반기를 지나서야 꽃가루 날리는 화양연화를 만나게 되었으니 하루하루가 즐겁고 행복하였다. 어여쁜 아내와 오손도손 정을 나누며 소박한 책방을 꾸려 나가는 것은 삶의 기쁨이요 인생의 지극한 즐거움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의 아내는 '가문비나무아래'라는 책방을 신방처럼 꾸며 두고 백색등불 아래에서 발그레한 볼을 밝히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그토록 어린 고양이 처럼 나의 행보에 발을 맞추며 연신 말을 건냈던 것은 천상에서 맺었던 지난 인연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였을까?


그래서 어느날 나는 아내에게 무슨 마음으로 책방을 열 생각을 했냐고 물어보았다. 비싼 임대료는 둘째치고 국어학원을 운영하는 것도 벅찬데 직원 한 명 두지 않고 홀로 두 개의 살림을 도맡아 한다는 것은 이성과 상식에서 벗어난 완전 바보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대체 왜? 무엇 때문에?

아내는 나의 질문에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그 무슨 그 옛날의 전설따라 삼천리나 나올 법한 해괴망측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CF6464FE-C9D0-41E9-B8D1-5250A2F8197E.jpeg 어느 새 빈 공간이 책과 책장, 조명으로 가득 찼다


아내의 말을 빌리자면 이런 것이다.

오빠!(아내는 나를 이렇게 부른다) 내가 말야(여기서내는 아내이다) 국어 학원에서 하루 종일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열강을 한 후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여기 책방 문 앞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때는 당연히 아무도 없는 공간이었지. 그래서 이마를 유리 문에 바짝 붙이고 이리저리 빈 공간을 살펴보았는데 네모 난 어둠 밖에 안보였어. 거대한 먹물 덩어리로 보였어. 그런데 뭐라고 할까? 마치 작은 새가 검은 물 속에 갇힌 채 젖은 날개를 퍼드득거리며 얕은 소리를 내뱉는 것 같았어. 나는 이마 대신 귀를 붙이고 눈을 감았어. 점점 가느다란 실오리가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처럼 들려왔어. 그러더니 깊은바다 속에서 울리는 고래의 하울링이 들리는 듯 했어. 조금 소리가 멀어진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유리문쪽으로 그 소리가 막 밀려 오더니 “여긴 당신을 위한 공간이에요. 나의 빈 몸을 좀 채워주지 않겠어요. 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었어요.” 이렇게 말하는거야. 에이 거짓말 이라고. 아냐 난 분명히 그렇게 들었어. 그것도 그날뿐 만 아니라 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내게 말을 건네는 거야.


나는 아내의 말을 들으며 무슨 귀신 씨나랏 까먹는 소리냐며 말도 되지 않는다고 애써 무시했다. 여하튼 아내는 하늘의 신탁을 받은 고귀한 간택자처럼 그 텅빈 공간에 편백나무 책장을 들이고 세계의 책들을 모았다. 무거운 나무 탁자를 뒤집어 일일이 드라이브로 나사를 쪼이면서 거의 모든 가구를 DIY 방식으로 혼자서 조립했다. 그야말로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며 책방의 골격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2020년 3월 7일 코로나가 창궐한 세상을 향해 문을 활짝 열었으니 당최 겁을 완전히 상실한 무모한 창업이었다. 그 아무리 천상의 예언자가 신탁을 내렸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넘어서기 힘든 강고한 철벽과 다름 없었다.


여하튼 일인 투잡의 힘겨움을 떨처버리고 항공모함급 추진력으로 책방을 이쁘게 치장하고 영업을 개시했으니 만고에 빛날 위대한 도전인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이로부터 52일 후 평소 책방에 관심을 두고 세계만방을 돌아 다니며 책방순례를 다녔던 나를 이곳 가문비나무아래에서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으니 이것은 희대의 스캔들이었다. 지금와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 밤에 들었던 유혹의 목소리는 정말 신들의 예정된 계획을 들려주었는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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