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콩과 중국 상하이 책방에서 길을 찾다
내 마지막 직업은 책방지기로 사는 것이었다.
대학 졸업 후 출판사, 이러닝 교육벤처기업, 외국계 보험회사, 학원 강사로 떠돌아다니며 아무런 꿈도 없이 그저 그날그날의 시간을 낭비하며 살았다. 출근하고 야근하고 퇴근하고 술 먹고 심지어 주말마저회사에서 지내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 무슨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단지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의 마디들을좌충우돌식으로 부딪치며 살아왔다. 대략 내 나이 오십 줄에 들어섰을 때 문득 이렇게 살다가 그냥 죽겠구나라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이룬것 없이, 뭔가를 이루려고 노력한 흔적도 없이 독거중년으로 살다가 쓸쓸하게 죽어가겠다는 아찔한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게도 꿈이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책방지기에 대한 꿈이 있었다.
내 고향 진주라는 곳에서 도동이라 불렀던 작은 동네의 상평동이라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이 있던 길가에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서점이 있었다. 일찍이 학교 공부에 뜻이 없었던 나는 서점에 진열된 성인용 잡지인 선데이 서울이나 훔쳐보고 잡소설이나 뒤적거렸다. 그때 그 서점 주인은 매사 무료와 권태에 시달리는 듯 간혹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책 무더기 속에서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던 그의 모습을 사랑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 수록 책은 멀어졌고 책방지기의 꿈은 더더욱 멀어졌다. 출근과 퇴근이라는 도돌이표 모양으로 젊은生 을 떠돌았고 급기야 삶의 밑바닥으로 완전히 추락했을 때 잊힌 꿈들이 몽실몽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이제 원하는 것을 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꼬리를 물며 나의 그림자를 좇아 올 무렵 나는 홍콩의 침사추이의 하버시티에 있는 page one 책방에 있었다.
홍콩의 페이지원은 서점 이상의 풍경을 내게 보여주었다. 초록의 책장과 책을 포근히 감싸며 엷게 비추던 간접 조명, 어두운 배경 속에서 빛을 뿜으며 독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던 수많은 책들. 나무 바닥을 걷던 그 아늑함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알던 서점은 백색의 형광등 불빛 아래 추레하게 꽂혀있던 책들이 전부였다.
그때 홍콩에서 본 pageone은 내가 생각했던 책방 이상이었다. 그리고 중국 상하이 여행에서 우연히 찾아간 종서각은 책방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예술품이었다. 책방이란 단지 책을 판매하는 곳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느끼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뽑히기도 한 종서각은 지하철 9호선 쑹장대학성 역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 가면 'Tames Town'이라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책방 입구에 들어서자 놀랍게도 유리 바닥에는 수많은 양서들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으며 책장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 나와 책들을비추고 있었다. 한줄기 빛이 책을 예술품처럼 감싸고 있었다. 수많은 책의 조각들이 환한 빛과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마치 중세시대의 오래된 성 안에 들어온 듯 고즈넉한 느낌이 들었다. 벽면과 천장 가득히 채워져 있던 무수한 책들. 고풍스러운 조명들이 책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바깥의 햇빛이 일제히 밀고 들어와 실내는 밝고도 어두웠다.
적절한 자연광과 조명으로 꾸며진 그 공간은 책과 함께 빛나는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각 층마다 마술과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가 계속 연출되었다. 어린이 책방은 햇빛이 별처럼 쏟아지는 곳이었는 데 마치 빛의 비늘이 보일 듯 아주 밝고 환한 장소였다. 마루 바닥에는 중세기 세계지도가 그려져 있고 인공으로 만든 키 큰 나무 아래에서 아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또 다른 방은 비스듬히 천장까지 세운 하얀 책장이 있었다. 천장에 오목거울을 설치하여 책장과 바닥을비추고 있어 공간의 높이와 깊이를 더하고 있었다. 종서각은 방문자들에게 '책의 성스러움'을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내부 설계를 했고 '책 속의 갖가지 세계, 만화경 속의 갖가지 꽃'이라는 설립 이념을 갖고 인류 정신의 보석들을 가장 아름답게 전시한 공간이라고 한다. 모든 것이 책과 독자가 중심이었다. 책방은 그저 무수한 책들이 아무렇게 배치된 창고나 책의 무덤이 되어서는 안 된다. 책방은 읽기를 유혹하는 아름다운 공간이 되어야 한다. 중국 상하의 종서각은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푸저우로, 상하이 서점거리에 있는 '두저어(독자)서점'을 만났다. 고풍스러운 서양식 근대 조명이 낯선 여행자를 환영했다.
기와지붕 모양의 노란 조명등. 형형색색의 책 표지들은 밝게 빛나고 낮은 클래식 음악은 도시의 소음과 다양한 사람의 말소리에 시달린 여행자를 위로해 주었다.
복층식의 서가 2층에는 수문장 노릇을 하는 오크 재질의 책장이 우뚝 서있고 빛 속에 책이 있었다. 2층 복층 회랑에서 바라본 서점은 아름다운 예술품 그 자체였다. 천장과 바닥, 책꽂이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책을 하나의 조각품처럼 보이게 했다. 거기에 아기자기한 문구품들은 조연급 이상의 역할을 했다. 역시 마지막 화룡점정은 책을 읽는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이곳은 하나의 설치 미술품처럼 사람과 함께 공존하는 예술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상하이 10호선 전철에 내려 우연히 찾아 들어간 빌딩 안에 생각지도 않았던 서점 공간이 있었다. 천장은 노출된 콘크리이트였으며 군데군데 조명등과 파이프 라인이 달려 있고 천장의 유리거울은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공중에 매달린 크고 다른 형형색색의 풍선들. 마치 아름다운 정물화 풍경 속으로 들어온 듯 나와 공간이 하나가 되는 느낌이었다.
전체적으로 블랙톤을 유지하며 구석구석 필요한 조명을 설치하여 아늑한 느낌을 주었고 사람들은 길게늘어진 테이블과 편안한 소파에 앉아 어디서든지 책을 읽도록 하였다. 이런 세심한 배려 덕분에 책을 읽는 사람들은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무대에서 열연 중인 배우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들 모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고요한 침묵의 공간이다. 바스락 책장 넘기는 소리와 사색의 숨소리만 들렸다.
큼직한 아치형의 구조물들은 넓은 공간을 자연스럽게 나누어 줄 뿐 아니라 아주 견고한 느낌까지 주었다. 차를 마시는 공간, 음식을 먹는 공간, 책을 읽는 공간 등이 구분이 된 세계였다. 마치 성과 속이 구분된 공간이었다.
다소 어두운 분위기의 이곳은 오롯이 책과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읽는 즐거움과 읽기의 자유로움을 느끼게 한다. 부분 조명은 책 표지로 향하고 실내 분위기는 아늑한 느낌을 주어 독서자의 실체를 숨기고 편안하고 자유롭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한다. 어두운 곳은 자신의 세계에 몰입할 수 있는 기회의 장소인 셈이다.
어릴 적 동네책방에서 보았던 서점의 풍경은 각종 잡지와 참고서, 문제집, 일반 도서가 혼잡하게 서가에 꽂혀 있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미 책방은 책방 자체가 하나의 문화의 공간이자 예술적 아름다움을 느끼는 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책방은 단순히 책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경험하고 즐기는 공간으로 변화되고 있다. 나는 그런 책방을 갖고 싶었다. 책과 사람이 만나 현실 너머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는 곳, 책방 자체가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품인 공간을 갖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