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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람 Oct 21. 2023

나를 단번에 사로잡은 그대

전자음악과 사랑에 빠진 순간


누군가와 사랑에 빠진 순간을 기억하는가? 나는 전자음악과 사랑에 빠진 순간을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으며, 이것을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2013년 나는 호주 골드코스트에서 교환학생으로 지내고 있었다. 운 좋게 남국의 정취가 가득한 리조트 같은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기숙사에서는 유난히 흥겨운 파티가 많이 벌어졌다. 특히 유럽에서 온 친구들이 꽤 소란한 파티를 많이 열었는데, 그들은 기숙사 창문에 늘 ‘THE PARTY NEVER ENDS’와 같은 가랜드와 각종 술병을 전시해 놓고 지낼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내 귀를 단번에 사로잡는 음악이 기숙사 창문 너머로 들려왔다. 그 음악은 뭐랄까, 이제껏 들었던 파티 음악하고는 조금 달랐다. 몽환적이면서도 웅장했고, 공간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파티에 어울리는 신나는 음악이라기보다 뭔가 서글프고 가만히 넋을 놓고 감상하게 되는 그런 종류의 음악이었다. 앞 건물에서 들려오는 음악이라 거리감이 있는 상태에서 들었지만, 머리가 쭈뼛 서고 기분 좋은 소름이 온몸에 오소소 돋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당장 파티장으로 달려가서 문을 두드리며 이 곡의 제목이 도대체 뭐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차마 그럴 수는 없어서 하우스 메이트들의 방문을 일일이 두드리며 이 곡의 제목이 뭔지 아냐고 물었다. 그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나는 절망에 빠졌다.


그 후로 여러 날, 밤에 파티가 열린다 싶으면 나는 열심히 창문 밖으로 귀를 기울였다. 그 음악은 파티가 끝날 때쯤 대미를 장식하는 음악으로 많이 틀어지는 듯했다.  나는 파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곡이 흘러나오면 열심히 shazam앱(음악검색앱)을 켜서 창문 이곳저곳에 들이댔다. 하지만 결과는 실패, 실패 또 실패였다. 거리가 너무 멀었고 잡음이 많이 섞였다. 그렇게 무수한 실패를 거듭하던 어느 날, 드디어 shazam이 그 곡을 인식하는 데 성공했고, 나는 마침내 그 곡의 제목이 Disclosure - You & Me (flume remix)라는 걸 알게 됐다. 원곡보다 flume의 remix 버전으로 더 많이 알려진 곡이다. 그렇게 정말 우연히 flume은 내 삶 속으로 들어와 전자음악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이 전에도 전자음악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콕 집어 말하자면 이 곡이 전자음악에 대한 본격적인 내 사랑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삶은 많은 우연으로 가득 차있다. 내가 호주로 교환학생을 가게 된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 처음에는 미국 교환학생을 지원했었는데 다른 우월한 지원자들에게 밀려 번번이 떨어졌다. 그래서 자포자기하고 있던 와중, 호주 교환학생 자리가 기적적으로 하나 생겨 추가합격꼴로 가게 됐다. 결과적으로 오히려 좋았다. 골드코스트는 서퍼들의 천국, 최고의 관광지이자 사계절 내내 온화한 날씨를 자랑했고, 매일 밤 파티가 이어지는 곳이었으니 나랑 바이브가 더 잘 맞았다. 게다가 우연히 창문 너머로 듣게 된 파티 음악 하나 때문에 ‘전자음악‘이라는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을 하나 얻었으니 말이다.


flume은 시드니 출신의 호주 사람이다. 나이도 나랑 비슷하고, 잘생겼고, 어렸을 때부터 음악을 잘한 음악 천재다. 호주인들의 자랑이자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당시 호주 친구들이랑도 flume 음악을 함께 들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의 추천으로 flume이 호주의 프로듀서 Emoh Instead와 함께 활동하고 있는 프로젝트 그룹 What So Not을 알게 됐고(지금은 탈퇴했다), flume과 함께 작업한 호주의 일렉트로닉 듀오 Hermitude도 알게 됐다. 그들을 소개해줄 때의 호주 친구들의 자랑스러워했던 표정과 허미튜드를 발음할 때 그 특유의 호주식 발음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티스트들의 음악 역시 내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었다. 당시 내 플레이리스트는 Disclosure, What So Not, Hermitude, Chet Faker, Odesza 등 flume 연관 아티스트로 꽉꽉 차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를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취향이 점점 넓어지듯 나는 flume을 중심으로 전자음악 취향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급기야 나는 이들을 보러 스플렌더 인 더 그래스(Splendour In The Grass) 페스티벌로 향하게 된다. 스플렌더 인 더 그래스는 호주의 동쪽 끝 바이런 베이(Byron Bay)라는 아름다운 지역에서 열리는 겨울 음악 축제로 꽤 규모가 있는 뮤직 페스티벌이다. flume은 거의 매년 이 음악 축제에 참여하고 있다. 나는 학생 신분으로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에도 불구하고 이 음악 축제에 찾아가서 Hermitude와 What So Not의 실물을 기어이 보고 왔다. 그때만 해도 (무려 10년 전) 바이런 베이에 교통편이나 숙박시설이 그리 잘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가면서 말이다. 게다가 날씨가 너무 궂어서 땅이 온통 진흙탕이었던 바람에 몸살은 덤으로 얻어왔지만 좋아하는 아티스트를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경험은 비현실적으로 행복했다. 그리고 2019년 flume이 처음 내한했을 때 난지한강공원으로 직접 찾아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때 콘서트 엔딩곡으로 6년 전 기숙사에서 처음 들었던 you & me를 직접 들었을 때의 그 감동은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마치 너무 멋지게 성장한 첫사랑을 다시 만난 기분이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크게 두 종류가 있는 것 같다. 익숙하고도 서서히 물드는 사랑과 우연하고도 강렬히 빠지는 사랑. 전자음악에 대한 내 사랑은 후자였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새로운 사랑을 무심히 지나치지 않도록 세상을 향한 감각을 늘 열어두고 살자고. 또 누군가 flume처럼 내 인생에 우연히 스며들어와 내 삶을 풍요롭게 해 주고 내 세계를 무한히 확장시켜 줄지도 모를 일이니까. 가끔 무기력하게 침대에 누워 온 세상을 향한 감각을 차단시키고 있는 날엔 그냥 지나쳐 버릴 또 다른 사랑들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늙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향한 문을 하나둘씩 닫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10년 전 전자음악과 사랑에 빠졌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오감, 아니 육감까지 활짝 열어두려고 노력한다. 늘 새롭게 다가올 또 다른 사랑을 꿈꾼다.




*커버 이미지 : Disclosure - You & Me (Flume remix) [Official Vid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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