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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람 Oct 21. 2023

검지 손가락을 쓸어보며

젊다는 것의 의미


내 왼쪽 검지손가락 바깥쪽엔 레터링 타투가 하나 있다. 2013년 호주에 머물 때 패기 넘치게 새긴 것이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고 검지 손가락을 살짝 들어 올려 턱을 괴거나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가리킬 때, 또는 텀블러 같은 것을 들고 음료를 마실 때만 살짝살짝 보인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 타투가 있네요? 뭐라고 써져 있는 거예요?‘라고 물어보면 나는 우물쭈물하며 당당히 대답하지 못한다. 새길 때는 분명 확신에 차다 못해 결의에 넘쳤는데 말이다.


계기는 단지 멋있어 보여서였다. 호주에서 TV를 보고 있는데 한 남자 배우가 술잔을 그러쥘 때만 언뜻 보이는 손가락 레터링 타투가 너무 멋있어 보였다. 호주는 워낙 더운 나라여서일까. 사람들이 노출이 많은 옷을 즐겨 입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타투를 패션처럼 하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나도 하나쯤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 그 레터링 타투에 그만 꽂혀버린 것이다. 당장 내게 꽂히는 문구 몇 개를 떠올려봤다. 당시 아이디로 쓰고 있던 ’La Dolce Vita (달콤한 인생)‘는 내 인생이 별로 달콤한 축에 속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탈락했고, 또 좋아하는 문구인 ‘Carpe Diem이나 Seize the day(순간을 즐겨라)‘는 좋은 의미이지만 당시 마음에 확 와닿지 않았다. 손가락에 새길만한 강력한 문구가 필요했다! 가만히 침대에 드러누워 고민을 해보았다. 지금 내게 가장 꽂히는 말이 뭐지? 인생에서 꼭 한 문장을 새겨야 한다면 어떤 문장을 새겨야 하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문장이 떠올랐다.




‘Stay Young (젊음에 머물러라)‘.




아니, 스티브 잡스도 아니고 말이지.(스티브 잡스는 2005년 스탠퍼드 연설에서 ‘Stay Hungry. Stay Foolish(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아가라.)’라는 말을 남겼다.) 열 손가락과 발가락이 모두 오그라드는 말이 아닐 수 없다. 당시 나는 스물셋이라는 확실히 젊은 나이에도 ‘젊음’이라는 가치를 상당히 중요시 여겼다. 영상을 만드는 방송 쪽 일을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늘 '젊은’ 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할머니가 되어서도 음악 듣고 파티와 페스티벌을 누비려면 늘 '젊은' 체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내가 너무 젊어서 젊은 줄도 모르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낮에는 친구 집에 놀러 가 음악과 햇빛을 즐기며 흑맥주를 마셨고, 밤이 되면 기숙사 친구들과 택시를 타고 도심이자 관광지인 서퍼스 파라다이스로 이동해서 펍 크롤을 즐겼다. 클럽을 하도 많이 다녀서 골드코스트 로컬 친구로부터 ‘골드 코스트 클럽 마스터’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무려 10년 전이지만 그곳의 클럽 이름들이 아직도 떠오를 정도다. (Sin City 잘 있니?) 또 외국인 친구들로부터 파티에 초대받으면 빼놓지 않고 출석했다. 뼛속깊이 내향인이지만 기숙사에 한국인은 나 하나뿐이어서 상당히 외로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세계에서 (부모님 돈 쓰면서) 매일 새로운 자극을 맛보고 있으니, 이런 삶의 열정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만 같았다. 아니 그 시절의 나는 놀랍게도 그러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문구를 확정한 후에는 엄청난 속도로 서치를 해서 서퍼스 파라다이스의 유명한 타투샵을 알아냈다. 전화로 빠르게 예약을 한 다음, 이튿날 바로 타투샵을 찾았다. 타투이스트와 타투의 위치와 디자인에 대해서 여러 번 세심하게 협의를 거친 후에 시술에 들어갔다. 손가락은 살이 없는 곳이라 조금 아팠지만 그렇게 ‘Stay Young’의 정신이 내 몸에 천천히 새겨지고 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대문자 S자가 높은 음자리표처럼 새겨져서 더 마음에 들었다. 10년이 지난 지금 타투의 상태는 아주 약간만 번진 상태로 건재하다. 소문대로 엄청 유명한 타투샵이었나 보다.


타투를 새기고 지난 10년 동안 나는 Stay Young 했을까. 아니 애초에 젊다는 것은 무엇일까. 미국의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늙는 것이 아니라, 삶에 열정이 식었을 때 비로소 늙는 것이라고 했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삶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사람이 훨씬 나이 들어 보이기도 혹은 훨씬 젊어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따지면 나는 지난 10년간 무기력한 상태로 무의미하게 날려 보낸 세월이 태반이라 조금은 늙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Stay Young 하려고 노력한 시간도 적지 않았다. 긴긴밤, 긴긴 시간 음악에 맞춰 춤을 췄고, 또 긴긴밤, 긴긴 시간 소중한 사람들과 술 한 잔 기울이며 내 삶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점검했다. 그리고 그 고민의 결과를 손에 잡히는 책 한 권에 담아내기도 했다. 이 정도면 내 검지손가락에 조금은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어쨌든 ‘Stay Young’은 말에 담긴 함의와는 상관없이 사람들이 딱 들었을 때 오그라들긴 하는 말인가 보다. 어느 날은 그냥 한번 누군가에게 타투를 보여줬다가 그 사람이 배를 잡고 깔깔 웃어대는 바람에, 다시는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더랬다. 그래서 그동안은 누군가가 타투의 의미에 대해 너무 궁금해하면 ‘그냥 개인적인 의미가 담긴 타투예요.’라며 대충 넘겼다. 그랬더니 사람들은 전 남자 친구 이름이 확실하다며 오히려 더 수상쩍게 여기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적고 보니 ‘Stay Young’이라는 말이 전혀 부끄럽지 않다. 오히려 멋지다! 삶을 그냥 흐르는 대로 두지 않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자는 뜻 아닌가. 다음부터는 누가 내 타투에 대해 물어본다면 숨기지 말고 당당하게 검지손가락을 내밀며 보여줘야겠다. 나는 이렇게 멋진 말을 불과 스물셋에 새겼다고 자랑해야겠다. 그리고 세상엔 ‘선언효과‘라는 것이 있어서 그렇게 말함으로써 나는 더 열정 있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오늘도 나는 무기력의 늪에 빠지려 하면 검지 손가락 바깥쪽을 쓸어 보며 골드 코스트를 누비던 그때의 나를 떠올린다. 그러면 아주 약간은 양심에 찔려하며 음악이라도 한 곡 듣든가 책장이라도 한 장 넘기든가 하게 된다. 비록 이제 흰머리가 조금씩 올라오고 눈가엔 잔주름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삶에 대한 열정만은 잃지 말아야지. 그래야 할머니가 되어서도 춤을 출 수 있을 테니까!




*커버 이미지: https://unsplash.com/ko/%EC%82%AC%EC%A7%84/Lzys6r1xFD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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