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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람 Oct 21. 2023

그저 흐르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칼군무는 싫어요


"다시, 다시."



언니들의 매섭고 단호한 지시에 우리들의 이마에서는 땀방울이 후드득후드득 그칠 줄 모르고 떨어졌다. 초긴장상태에서 옆 친구와 팔을 뻗는 각도며 손가락의 모양까지 다르지 않도록 바짝 신경 썼다. 나 하나 때문에 친구들이 이 동작을 처음부터 다시 하게 할 수는 없었다. 모두 같은 마음가짐이었을 것이다. 벌써 3시간째 추는 춤, 이제 이 것이 춤인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사이렌과 함께 요란하게 시작되는 Pussycat Dolls의 When I Grow Up 전주가 흘러나오고 우리는 언제 지쳤었냐는 듯 다시 치명적인 표정을 지으며 춤에 임했다.



어느 연예인의 후일담과 같이 나는 친구 따라 대학교 댄스 동아리 오디션을 봤다가 운 좋게 합격한 케이스였다. 아마 그때 오디션곡이 애프터스쿨의 ‘AH’였던 것 같다. 오디션 곡을 연습할 시간도 별로 없어서 대부분의 동작을 프리스타일(?)로 때웠던 기억이 있다. 아마 엄청 못 췄을 텐데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스무 살짜리가 가오리핏 맨투맨을 입고 열심히 파닥파닥거리자 그 모습이 가엽고 기특해서 선배들이 뽑아주신 것 같다.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댄스 동아리는 의외로 신선한 지옥이었다. 우선 군기가 너무 심했다. 인사는 항상 90도로 해야 했고, 선배님이 아니라 꼭 언니라고 불러야 했으며, 언니가 멀리서 자그맣게 보이면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뛰어가서라도 인사를 해야 했고, 언니가 문자에 답장을 마지막으로 하게 두어서는 안 됐다. 또 춤 연습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빠지면 안 됐고, 무엇보다 동아리 탈퇴는 팀원들을 버리는 파렴치한이 되는 짓이었다. 그런 똥군기가 있던 시절이었다. 이제 와서 그들을 탓하지는 않는다. 그것이 그 시절의 동아리 문화였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춤을 추려면 기초체력이 필요하다면서 윗몸일으키기, 팔 굽혀 펴기, PT 체조 등 다양한 체력훈련을 했는데, 나는 이런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을 마음 깊이 인정하면서도 이게 너무 힘들고 싫었다. 그저 하고 나면 배가 고플 뿐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제일 싫었던 건 재미를 잃게 만드는 ‘강제성’이었다. 나는 그저 춤을 즐겁고 재미있게 추고 싶었을 뿐인데, 동아리에서는 마치 지금의 ‘스우파(스트릿우먼파이터)‘ 급의 완성도 있는 무대 퀄리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엄청난 연습량이 필요했다. 학교축제나 정기공연이 있을 때는 하루에 8시간도 넘게 연습했다. 주말이고 뭐고 없었다. 내가 댄서인지 학생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나는 내가 춤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했다. 춤에 재능이 있는 친구들을 매일 가까이에서 보며 느꼈다. 타고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표정과 움직임의 차이를 말이다. 그때 느낀 좌절감이란. 나는 동작을 숙지하는 시간이 친구들의 1.5배에서 2배 정도는 더 걸렸다. 아마 내가 춤에 재능이 뛰어났더라면 하루에 8시간 연습 정도는 기꺼이 참아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소람아. 넌 눈이 너무 말똥말똥해.”




하루는 선배가 춤을 추는 내게 이런 지적을 한 적이 있다. Timbaland의 The Way I Are이라는 공연곡에 맞춰 파워풀한 동작을 소화해야 하는데 내가 눈을 너무 말똥말똥하게 뜨고 거울을 보며 춤을 추더란 말이다. 나는 이때 ‘칼군무는 내 길이 아니다.‘라고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만약 내가 여유가 있어 즐기면서 춤을 췄더라면 표정 연기까지 했을 텐데, 그게 안되니까 동작을 겨우겨우 따라 하느라 눈을 크게 뜨고 거울로 내 모습만 좇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내 마음속에 그나마 있던 열정이 조용히 사그라들어 버렸다. 여럿이서 칼군무를 멋지게 소화하는 것도 물론 리스펙 하지만, 나는 그저 좋아하는 음악에 맞춰 자유롭게 몸을 흔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 후로도 몇 날 며칠을 나는 춤 연습에 강제로 매진했다. 대동제때 공연을 해야 했는데 내가 중간에 빠지면 동선이 바뀌어서 팀에 피해가 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 중간에 동아리를 이탈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언니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여러 장 쓰고 석고대죄를 해도 쓴소리를 들었다. 간이 작은 나는 그럴 수 없었기에 친구들과 함께 화려한 공연의상까지 맞춰 입고 어찌어찌 연습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런데 공연 막바지 연습에 돌입했을 때 즈음 일이 터졌다. 하기 싫은 마음과 공연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엄청난 연습량에 따라주지 않는 몸뚱이 3박자의 궁합이 훌륭이 맞아떨어져 다리 부상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해서 나는 걷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고 급기야 병원에서는 휠체어의 힘을 빌리기도 했다. 이제는 정말 그만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공연만 빠지고 동아리 활동은 계속할 수 있었지만 나는 이때 동아리 활동을 그만두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1년이 채 안 되는 생활이었다.



동아리 활동이 없는 학교 생활은 꽤나 허전할 줄 알았는데 웬걸 너무 자유롭고 좋았다. 내게 동아리 활동은 너무 큰 굴레와 속박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동아리 활동으로 가장 크게 얻은 게 있다면 음악과 춤을 사랑하는 친구들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홍대를 참 많이도 누비고 다녔다. 동아리를 그만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홍대 힙합클럽 큐보(Qvo)에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나 자신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마구 흐트러져도 된다니! 다른 사람 신경 쓸 것 없이 내 마음 가는 대로 춤을 출 수 있다니! 누구도 나한테 지적하지 않는다니! 신난다. 너무 신이 났다. 방방 뛰었다. 나는 춤을 좋아한다기보다 음악에 맞춰서 내 마음대로 몸을 흔드는 것을 좋아하는 막춤꾼이었던 것이다. 막춤이라고 하면 어감이 별로니 프리스타일 댄서라고 불러주면 좋겠다. 엣헴.



약 1년여간의 고행 끝에 얻은 나만의 깨달음은 춤은 음악에 몸을 맡기고 느낌 가는 대로 춰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네 인생에서는 정해진대로 해야 하는 게 참 많다.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해야 하고, 일을 끝내야 하고, 세금 내야 하고, 할부금을 갚아야 한다. 심지어 돈 내고 받는 PT/필라테스 수업도 정해진대로 따라 해야 한다. 하다 못해 쓰레기도 정해진 시간에 내다 버려야 하는 법이다. 이렇게 규칙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춤만큼은 좀 느낌 가는 대로 자유롭게 추면 안되나. 그게 춤의 매력 아닐까. 나는 일상의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춤출 때 조금은 흐트러진 모습의 내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바이브도 마음에 든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느낌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게 몇 가지나 되나. 근데 춤은 그게 가능하다. 이것이 내가 클러버가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요즘 다시 2000년대, 2010년대 음악이 인기다. 그래서 얼마 전, 내가 일하고 있는 뮤직 서비스에 ‘05학번 힙합‘이라는 제목으로 플레이리스트를 하나 만들었다. 05학번이면 나보다 조금 윗 세대이긴 하지만 힙합클럽에서 듣던 음악은 나와 비슷했으니까 선곡은 누구보다 자신 있었다. 50 cent의 In Da Club, Flo Rida의 Low 등 추억의 음악을 선곡하는데, 절로 몸이 둠칫거리면서 그 시절 자유롭게 흐느적거리던 내 모습이 떠올라 입가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문득 그 시절 나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때 나와 함께 클럽에서 몸을 흔들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지금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자유롭게 프리스타일을 즐기고 있을까. 부디 그러기를 바란다.




*커버 이미지: http://www.tvj.co.kr/news/articleView.html?idxno=73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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