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마음을 지속하기 위해
목요일 새벽 2시.
한 여자가 택시에서 내려 이태원 주요 언더그라운드 클럽이 밀집한 보광로 60길에 있는 클럽에 홀로 들어선다. 통 넓은 바지에 버킷햇을 푹 눌러쓴 아주 편안한 차림이다. 클럽에 들어서자마자 바(bar)로 직진하여 익숙하게 진토닉 한잔을 주문한다. 내일 적당한 컨디션으로 일하려면 진토닉 정도가 딱 적당하다. 위스키나 데킬라는 숙취를 유발하기 때문에 알아서 자제한다. 그녀는 진토닉 한 모금을 입에 머금으며 여유롭게 그날의 댄스 플로어를 한번 눈으로 훑는다. 사람이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은 인구 밀집도가 참 마음에 든다. 역시 평일의 클럽은 주말과는 다른 매력이 있다.
여자는 디제이 부스 오른편 앞쪽으로 다가선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다. 그녀는 디제이의 움직임을 훤히 볼 수 있지만 디제이는 강한 조명 때문에 그녀가 잘 보이지 않는 그런 자리. 왠지 부끄러움이 많은 그녀는 늘 그렇게 한다. 스피커가 심장을 때려서 심장이 살가죽을 뚫고 나올 것 같은 이 느낌도 매우 마음에 든다. (그 느낌이 부담스러워지면 슬슬 자리를 옮긴다) 그녀는 진토닉 한 잔을 손에 들고 여유롭게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기 시작한다. 비로소 막혔던 숨구멍이 트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옆에 누가 없어도 어색함 따위는 전혀 없다. 내일에 대한 걱정은 이미 택시에 두고 내린 지 오래다.
이렇게 평일에 클럽에서 혼자 클러빙을 즐기는 여자가 바로 나다. 요즘은 뭐든지 혼자 하는 게 익숙한 시대다. 혼밥, 혼술을 넘어 혼캠(혼자 캠핑), 혼행(혼자 여행)까지. 그렇지만 혼클(혼자 클럽)은? 주변에 물어보면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며 그건 극상의 난이도라고들 평가한다. 우선 업계 사람들 말고는 해 본 사람이 극히 드물다. 사람들이 혼밥 레벨 중에 가장 어려운 난이도로 평가하는 혼자 고깃집 가서 삼겹살 구워 먹기나, 혼자 뷔페 가기, 혼자 패밀리 레스토랑 가기보다는 어려운 게 틀림없다. 적어도 몸을 계속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다. 혼캠과 혼행은 오히려 멋진 취미 생활로 자리매김한 것 같다. 혼클은 사람 많은 곳에서 에너지 넘치게 즐겨야 한다는 측면에서 굳이 비교하자면 혼놀(혼자 놀이공원) 정도 되지 않을까. 아무튼 혼클은 혼자 하는 활동 중에서도 최상의 난이도에 속하는 게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혼자 클럽에 다니는 이유는 좋아하는 마음을 지속하기 위해서다. 혼자라는 이유로 좋아하는 것을 못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억울한 일은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서른 살이 넘어가면서 많은 친구들이 내 곁을 떠나갔다. 떠나갔다기보다 예전만큼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게 됐다. 일단 가정이 생긴 친구들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고 떠나갔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저마다의 취향과 세계가 확고해졌다. 나는 나이를 먹어서도 점점 전자음악과 언더그라운드 클럽을 생활화해가는 반면, 댄스 동아리까지 같이하며 신명 나게 같이 몸을 흔들어 재껴 대던 내 친구들은 이제 클럽에 가면 머리가 울린다며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나 하자고 한다. 나에게 하우스와 테크노 음악을 전수해 주던 친구는 요가와 명상, 러닝의 세계에 입문하며, 급기야 얼마 전 이쪽 세계(?)의 은퇴를 선언했다. 뿐만 아니라 슬프게도 이곳저곳이 아프다, 약을 먹는다 등 건강상의 문제가 생긴 친구들도 많고, 무엇보다 노는 것도 좋지만 그 시간에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자 하는 친구들이 더 많아졌다.
이런저런 친구들의 사정을 다 고려하다 보면 같이 놀러 갈 시간 맞추기 한 번 참 어려워진다. 나한테 클러빙은 '야 집 앞인데 잠깐 나와. 커피 한 잔 하자.' 같은 일상이나 다름없는데, 어렵게 약속을 잡아야 하는 큰 행사가 되어버리는 거다. 또, 나는 비교적 출퇴근 시간이 자유롭고 재택근무 중이라 평일에 클러빙을 즐기는 게 어렵지 않은데(평일에 재밌는 파티가 꽤 많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출퇴근하는 직장인 친구들은 평일 클러빙이 거의 불가능하고 프리랜서 친구들이라 해도 시간 맞추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고민 없이 혼자이길 택했다. 좋아하는 일을 포기해야 할 유일한 이유가 '혼자'여서 라면, 혼자가 되는 게 낫다.
중요한 건 '야, 이 음악 진짜 좋지 않냐.', '야, 담배 피우러 갈래?'라고 말할 사람이 없는 것 빼고는 혼자여서 좋을 때가 많다는 사실이다. 친구들이랑 같이 놀러 가면 이 친구가 음악을 충분히 즐기고 있는지, 이 친구의 텐션이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혹시 잠깐 나갔다 오자고 하면 싫어할지, 혹시 다른 클럽에 가고 싶은 건 아닌지 신경 써야 할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게다가 친구가 만취하기라도 하면 '오늘은 몸이 부서지게 놀자' 작정하고 나가도 강제 집으로 귀가해야 한다. 하지만 혼자 클럽에 가면? 오로지 음악만 즐길 수 있다. 무아지경인 것이다.
내가 음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조금이나마 증명하기 위해 앞에서 혼자 클럽에 다니는 이유(a.k.a 왕따의 구차한 변명)에 대해 이리도 길게 늘어놓았다. 용서를 구한다. 앞으로 이 책에서는 음악을 사랑하는 평범한 직장인(뮤직 콘텐츠 기획자)의 라이프에 대해 재미있게 조잘대보고자 한다. 나는 클럽의 운영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재미있는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해 쓸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삶을 지탱하는 음악이라는 힘, 그리고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과 음악과 연결된 삶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부담 없이 써보려 한다. 삶을 지탱할 재미를 찾고 있는 독자라면 누구나 영광스럽게 모시고 싶다.
새벽 2시, 댄스플로어에서 음악에 몸을 맡기듯 흔들흔들 여유롭게 즐겨주셨으면 좋겠다.
* 커버 이미지: Unsplash의 Aleksandr Pop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