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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람 Oct 21. 2023

너와 나의 연결고리

그 엄마에 그 딸


꼬불꼬불 파마머리에 앞 머리는 닭 볏처럼 세우고 반짝이 머리띠하기. 잘하면 옆 사람 칠 듯한 어깨뽕 재킷을 입고, 각선미를 자랑하는 미니스커트에 굽 높은 힐 신기. 마지막으로 눈두덩이에 기본 세네 개의 색을 진하게 칠하기. 이것이 엄마의 학생 시절 디스코텍 패션이다. 엄마는 학생 시절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했지만 디스코텍에 갈 때 패션만큼은 신경을 썼다. 그렇게 공작새처럼 잔뜩 꾸미고 디스코텍에 가서 거울 앞에서 춤을 추며 본인의 모습에 만족하기도 했고, 더 화려하고 큰 날개를 가진 공작새가 와서 뽐을 내면 기가 죽기도 했다. 맨발에 힐을 신어서 굳은살이 배기고 발이 아팠지만, 그래도 양말을 덧신거나 멋을 포기하는 일은 없었다.


엄마는 80년대 대학시절 종각을 누비는 혈기왕성한 젊은이였다. 그 시절 종각은 주로 학생들이 다니는 지역이었고, 을지로, 명동 쪽은 사회인들이 많이 다니는 지역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홍대와 이태원/압구정 정도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는 주로 종각 쪽의 1.2.3(원투쓰리), 팽고팽고, 코파카바나와 같은 디스코텍을 누비며 흥을 즐겼다. 엄마는 다니던 학교에 영 마음을 붙이지 못해 방황하고 있었고, 따라서 무려 주 7일 학교 끝나고 디스코텍에서 춤을 추다 귀가했다. 주중에는 디스코텍에 가서 춤을 추고, 주말에는 아빠를 만나 데이트를 했다. 여러모로 성실한 생활이었다. 그렇게 매일 얼굴 도장을 찍어 친해진 웨이터들도 여럿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잔뜩 멋을 부리고 디스코텍에 가서는 '음료권'만 사서 놀았다. 음료권이란 지금으로 치면 클럽 입장료를 내고 받는 프리 드링크 쿠폰과 같은 것이다. 엄마는 춤에 진심이었다. 테이블을 잡는 것이나 부킹 따위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가끔 디스코텍에 당시 남자친구인 아빠를 데리고 가서 친구들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고 하니 말 다했다.


엄마는 어린 시절, 즉 전축이 흔하지 않던 시대에 할아버지가 전축을 틀어놓으면 누가 시지키 않아도 땀을 뻘뻘 흘리며 하루 종일 춤을 추던 아이였다. 그런 아이는 그대로 자라 디스코텍에서 거울과 스피커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춤을 추는 어른이 됐다. 그러다가 London Boys의 Harlem Desire나 Sarah의 Tokyo Town 또는 Smokie의 I'll Meet you at Midnight의 시작 부분이 흘러나온다 싶으면 무대 앞으로 달려 나가 무아지경 속으로 빠져들었다. 잘생긴 오빠 Leif Garrett의 노래는 특히 더 좋아했다.


새벽 한, 두 시쯤이 되면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등의 작별의 노래가 나오면서 디스코텍의 조명이 환해졌다. 갑자기 어두웠던 실내가 밝아지면 적당히 미화되어 보였던 상대의 얼굴이 사실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상당히 민망해지기 마련이다. 엄마는 아쉬운 마음을 안고 친구들과 함께 디스코텍을 서둘러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디스코텍을 나오면 거리에는 포장마차의 행렬이 늘어서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춤을 추며 에너지를 잔뜩 소비한 젊은이들의 출출함을 달래주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거기서 약간은 무너진 화장을 한채 가락국수에 소주 한 잔을 곁들이며, 친구들과 오늘 팽고팽고에서의 소회를 담담히 나누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젊은 날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다 엄마 때문이다. 아니, 덕분이라고 표현하겠다.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내가 유별나게 춤을 좋아하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외모부터 성격까지 나는 엄마와 닮은 구석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춤을 좋아하는 것만큼은 똑 닮았다.


나는 영유아시절 레코드 가게 앞을 지나면 그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춰댔다. 엄마는 아직도 서태지와 아이들 음악을 들으면 자연스레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릴 정도다. 뿐만 아니라 나는 동네 마트에서 유모차에 얌전히 타고 있다가 갑자기 사라져서 엄마를 몇 번 식겁하게 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근처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고 하니 엄마의 유전자가 확실히 이식된 게 틀림없다. 그때 엄마에게 엉덩이를 두들겨 맞은 걸 생각하면 조금 억울하다. 그저 엄마를 닮았을 뿐인데 말이다.


대학교 때 댄스 동아리에 가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서울 시내 클럽을 전전했다. 엄마와 내가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나는 굽 높은 힐은 절대 신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아웃핏도 포기할 수 없지만 발이 아프면 신경이 온통 발로 쏠리기 때문에 나는 무조건 편안함을 추구했다. ‘편안함 속에서 진정한 흥이 나온다'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는 나만의 절대 원칙이다. 그걸 제외하고는 엄마의 춤 DNA는 놀라울 만큼 충실하게 내게 발현되었다. 심심하면 학교 끝나고 한두 시간씩 디스코텍에서 춤을 췄다는 엄마를 닮아, 그녀의 큰 딸은 퇴근하고 종종 헬스클럽에 들르듯 클럽에 들러 춤을 추고 있다.


(늘 그런 건 아니지만) 클럽에 마지막까지 남아 불 켜지고 나오는 것까지도 똑 닮았다. 엄마는 새벽 2시에 나와서 가락국수에 소주를 먹지만 나는 5시에 나와서 어묵탕을 먹거나 택시를 잡아타는 게 다를 뿐이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1980년대나 2020년대나 노는 문화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재밌다. 춤은 세대를 초월하는 강력한 연결고리다. 사실 우리 엄마는 내가 조선인이라고 부를 정도로 모든 면에서 보수적인 편인데 이쪽으로는 나랑 말이 좀 통한다. 그래서 갓 스무 살이 됐을 때 친구들에 비해 나는 밤새 자유롭게 클럽을 누빌 수 있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가 아직 엄마의 주 7일 클러빙 기록을 깨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기록을 깨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청출어람 해야 하는데 좀 더 분발해야겠다.




* 커버 이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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