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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보람 Mar 20. 2023

울음이 녹기 시작했다

#5  방사능 오염으로 변형된 생명체

 기억이 되살아나자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골목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도 땅속에서 굴절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 도망치는 사람처럼 건물 안으로 달려갔다. 현관문을 여는데 땀이 가득해서 자꾸만 손이 미끄러졌다. 집으로 들어서자 어둠에 휩싸인 방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으로 들어온 희미한 빛에 검은 윤곽을 드러낸 가구들이 보였다. 문을 닫고 걸쇠를 걸었지만 예상과 달리 아까보다 더 크게 소리가 들렸다. 가까스로 손을 뻗어 형광등 스위치를 눌렀다. 환한 불이 켜지는 순간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둠 속을 기어 다니던 바퀴벌레가 불빛에 놀라 모습을 감추는 것처럼. 의심이 사라지지 않은 표정으로 잠시 귀를 기울였으나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마자 화장실로 향했다. 온몸에 차가운 물을 뒤집어쓰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어쩐지 늘 똑같이 반복하던 하루가 조금 어긋나 버린 느낌이었다. 전화를 받은 이후로 무언가 달라진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기차선로가 방향을 바꾸는 것처럼 갑자기 모든 게 달라질 수도 있을까. 아니면, 지금까지 애써 모른 척해 오던 것들이 어느 날 문득 몸집을 부풀리고 눈앞에 나타날 수도 있는 걸까.

  목이 타는 갈증이 일었다. 부엌으로 걸어가 냉장고에 넣어 두었던 맥주를 꺼냈다. 지난번에 남겨 둔 오징어도 생각났다. 냉동실 문을 열자 센서가 작동하면서 전등이 켜졌다. 순간 놀라서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게 뭐지?”

  냉동실 조명 아래에는 이상한 물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난생처음 보는 생물의 모습이었다. 몸에는 검은 반점이 퍼져 있었고, 피부는 검푸른 녹색이라 말라죽은 이끼처럼 보였다. 이곳저곳에 붉은 돌기가 솟아 있어서 심한 피부병이 의심스러웠다. 소름 끼치는 상상을 하기에 충분한 외모였다. 방사능 오염으로 변형된 생명체가 나타난 걸까. 그런데 왜 하필 우리 집 냉동고에 나타난 걸까. 나는 얼굴을 더 가까이 들이밀고 각각의 부위를 눈여겨 살펴보았다. 너무 징그러워서 오히려 호기심이 일었다. 처음에는 모형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세밀한 부분까지 꽤 정교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얼어 있지 않았다면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한동안 냉동실 문을 열고 있었더니 기계가 냉기를 힘껏 내뿜었다.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마치 동족에게 위험을 알리는 짐승의 울음소리 같았다. 


  그것을 꺼내어 탁자 위로 옮겼다. 늪지에서 뒹굴었는지 진흙을 잔뜩 뒤집어쓴 상태였다.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뻗어 두꺼워 보이는 표피를 손톱으로 긁어 보았다. 그러자 그것의 눈꺼풀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나는 볼에 덴 듯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잘못 봤겠지. 눈을 문지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표면에 붙어 있던 얼음이 녹으면서 주변으로 이물질이 섞인 액체가 퍼져 나갔다. 몸에 긴장감이 돌면서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벌을 받는 아이처럼 경직된 자세로 서서 한동안 그것을 지켜보았다. 그러나 몇 분이 지나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그것은 흉측하고 징그러웠지만 어딘지 모르게 고대에 존재하던 어둠의 괴물 같은 웅장함이 느껴졌다. 날개 끝에는 철심처럼 단단해 보이는 테두리가 있었고 끝에 뾰족한 뿔이 돋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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