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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헨리포터 Apr 08. 2021

태권도, 그래서 보육이야? 교육이야?

feat. 빈센조

이 남자, 매력적이다. 흰옷을 위아래로 깔맞춤 했을 뿐인데 빛이 난다. 폴리에스테르가 90% 함유된 그 옷을 입었는데도 그야말로 태가 난다. 어림잡아 불혹은 충분히 지난 것 같은데도 바지단은 20대 못지않게 짧게 입는다. 복숭아뼈를 드러내 보이니 그저 댄디한 옷차림이 완성된다. 이 남자,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 같구나. 학교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교문 앞에 서있을 뿐인데 많은 아이들이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 선물공세를 하는 것도 아닌데 아이들은 줄지어 그의 뒤를 따른다. 심지어 오와 열을 맞추고 발맞추어 이동하는 모습이 소싯적 교련과목을 우수한 성적으로 이수한 어른보다 낫다.


이 남자는 목소리마저 치명적이다. 날렵한 몸을 가졌음에도 쩌렁쩌렁할 정도의 대단한 울림통을 자랑하는 동시에 어쩔 땐 스윗소로우만큼이나 감미롭다. 특히나 이들의 목소리는 전화로 주고받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수화기 넘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상냥하고 비음마저 가미되어 있으며 친절하다. 어쩔 땐 이 남자, 마치 홍길동처럼 보인다. 불과 몇 분 전에 학교 앞에서 만났는데 곧이어 학원가에서 다시 만난다. 무척이나 민첩하고 상당히 기민한 몸놀림이 아닐 수 없다. 마치 칼 루이스(혹은 장재근이나 우사인 볼트)만큼은 되는 것 같다. 그저 종종걸음으로 걸을 뿐이데도 이렇듯 동해 번쩍 서해 번쩍이니 말이다. 그 남자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은가.


그들은 바로 태권도 관장님(사범님)이다. 예전에 첫째 아이를 태권도 보낼 때의 심정이 진짜 딱 이런 느낌이었다. 체력단련부터 인성교육은 물론이고 픽업부터 하원까지 그리고 심지어는 다른 학원으로 이동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까지 해준다. 노란색 봉고를 몰고 직접 동네 구석구석으로 아이들을 실어 나르는 그 모습에서 나는 '참 교육자(?)'의 면모를 엿보았다.


사실 요즘의 태권도를 배우는 이유라면 우리의 어린 시절처럼 호신용이라거나 무도를 위한 것보다는 공놀이(?)와 줄넘기를 포함해서 몸을 사용하는 각종 운동을 하며 함께 어울리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라는 생각이 강하다. 이렇듯 본래의 목적을 초월해서 부가적인 보육의 목적이 더욱 필요할 때가 많다는 말이다.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현실적인 문제와 맞닥뜨릴 때가 많은데 그때 '짜잔'하고 나타나는 해결사는 언제나 그들이었다. 시간과 학급이 정해져 있는 다른 학원과는 다르게 태권도는 특별히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한 시간을 운동해도 좋고 두 시간을 해도 좋다. 태권도의 시스템이 '일대일' 교육보다는 '일대다' 교육에 초점이 맞춰지며 사람이 많을수록 수업의 효율도 (일정 부분) 좋아지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에게 민폐가 될 수 없는 구조다. 그런 이유에서 태권도에서 운동을 하게끔 해두는 편이 '돌봄'의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 이게 바로 한국 태권도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았고 '교육기관'이자 '보육기관'으로서 대단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 어느 신문기사에서 미국의 태권도 업에 종사하는 어떤 분의 인터뷰처럼 한국 태권도가 수련보다는 보육에 초점을 맞추며 대련보다는 놀이에 치중하는 꼴이 안타깝다는 말씀이 떠오른다. 하지만, 모르시는 말씀 이외다. 그 나라와 이나라는 보육을 위한 환경이라면 달라도 너무 다르거든요. 우리나라도 삼십 년 전의 태권도장이라면 더욱더 엄하게 교육을 해야 입소문 나던 시절도 있었다고요. 하지만 세상은 더욱 각박하게 변해버렸고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그런고로 애들 키우는 요즘 사람의 입장이라면 선수를 키워줄 태권도 '관장님'보다 아이를 돌봐줄 '선생님'이 필요합니다요.


따라서 이제 동네 태권도는 보육기관으로 보는 측면이 더욱 바람직하다. 사실상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태권도가 없다면 오늘날 보육이 불가능한 점이란 다 알고 있는 사항 아니던가(스타벅스는 제한을 해도 여전히 '맥심'이 있지만, 태권도를 제한한다면 이 시대에 대안은 없다). 이는 분명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맞지만 어디에 하소연할 곳도 없다. 한창 애들이 어릴 때라면 그야말로 키워내는 일이 문제였고 사회적으로 부족한 시설을 이용하는 일은 하늘의 별따기였다. 그마저도 어렵사리 찾아온 그 기회에는 운영하는 자(?)들의 순번 조작을 통해서 차례가 뒤바뀌는(?)등등의 각종 억울한 일을 당한 적도 있었으나 민원을 넣거나 문제를 제기한다고 하여 달라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야말로 '각자도생'으로서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시스템은 바로 우리네 현실이다. 그 상황을 물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직접 당해보면 기분은 유쾌할 리 없다. 결국에 이르러 일이 그 지경으로 꼬인다면 마음 기댈 곳은 태권도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치명적인 매력을 보유한' 태권도라는 그 자체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존경이 내 마음에는 여전히(아마도 영원히) 공존한다.


그나마도 애들이 좀 커가면서 내 경우라면 여유를 되찾기는 했으니 더 이상 태권도를 보낼 일이 없(을  알았)다.


얼마 전 둘째 녀석이 갑자기 씩씩 거리며 오만 성을 다 내더니 대뜸 내게 와서는 태권도를 배우고 싶단다. 요즘 들어 어떤 아이가 일부러 그리고 반복적으로 자기 발을 밟는단다. 하지 말라고 말도 해보고 선생님께 말씀을 드려보기도 했지만 빈도는 줄었어도 여전히 밟는다고 하여 화가 났다는 것이다. 자기도 밟힐 때마다 똑같이 밟아주기는 했지만 그걸로는 억울한 감정이 풀리지를 않았는지 태권도를 배우고 싶다길래 일단은 웃어넘기고 거실로 나와 책을 읽고 있었는데 어두운 방에서 갑자기 기합소리가 들려온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임을 감지하고 다시 들어가 보니 엉성한 발차기를 하며 수련(?)하고 있는 통에 한참을 진지하게(?) 웃어버렸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이 녀석의 굳은 결심과 다짐은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그래. 함 다녀보거라.


그렇게 서로의 관심을 표현하고 친해지는 과정임을 알기는 해도 일단은 이겨(?) 야지. 그리고 스스로 느끼길 태권도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으면 그것도 해보게끔 지원해주는 게 내 역할 아니던가. 어찌 되었든 둘째 녀석 덕분에 태권도를 바라보는 시각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아 한편으로는 고맙다. 이제는 내게도 태권도를 향해 '보육'말고 '교육'이 필요한 그 시기가 다시 찾아왔나 보다. 30년 전의 우리들이 어릴 때 경험했던 바로  태권도 '도장'처럼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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