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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꼭 지금 해야 했습니까?

귀멸의 칼날 -환락의 거리-

by 피터의펜

아이들이 크면서, 자연스럽게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도 많아졌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12세 이상 관람가인 아이언맨을 보게 해 달라는 아이들의 요구에 부모로서 고민이 많았다.


한편으론, 나이를 정한 데엔 이유가 있겠지 싶고,

나라에서 정한 기준을 굳이 우리 아이들만 예외로 두는 게 괜히 어긋나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전체관람가에서 고르자니

해리포터나 나 홀로 집에처럼 명작이긴 하지만,
아이들 기준에선 다소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작품들만 남는다.


이건 부모 입장에서도 쉽지 않은 문제다.

물론, 집에서 영화나 시리즈를 함께 보는 이유라면 단순한 재미가 첫 번째겠지만 '문화적 소양'이라는 그럴듯한 교육적 명분도 있고 무엇보다 온 가족이 모일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라는 점이 크다.


어릴 적 저녁 시간,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서로의 하루를 묻고 밥 숟가락을 들던 그 풍경처럼 우리도 그렇게 모이고 싶었다. 그게 바로 이름하여 우리 가족 '영화데이'다. 부모의 지도아래 함께 보니 관람 연령을 조금 올리기로 합의했다.


요즘 아이들이 크는 세상은 우리가 자라던 때와는 너무도 다르다. "아침 탄수화물이 공부머리를 반짝이게 해 준다"는 엄마표 이론은 이제 그들에게 더는 통하지 않는다.


바쁜 아침, 가족이 다 함께 밥상에 앉아 식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점심은 학교에서 영양소를 골고루 갖춘 급식을 먹고 오니 든든하지만 덕분에 저녁은 배도 안 고프고 끼니마저 대충 때우게 된다. 결국 저녁 식사 시간조차 매일같이 모이기엔 어려운 시대다.


그렇다고 식탁에 둘러앉아 독서와 토론을 나누자니 앓는 소리가 먼저 들리고 가족 게임을 해보려 해도 스타크래프트로 이름 좀 날렸던 나는 요즘 애들 손놀림과 눈치를 따라갈 재간이 없다. 금세 시시해져서 결국은 각자 다른 재미를 찾아 흩어진다.


최근엔 우리 모두가 손꼽아 기다린 영화 '귀멸의 칼날 – 무한성편'이 개봉했다. 진작부터 인기 있던 일본 애니메이션이지만 이번 극장판 개봉으로 더욱 뜨거운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래서 우리는 밀린 시리즈 정주행으로 지난 스토리를 따라잡기로 했다.

진심으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화면은 실사보다 더 아름답고,
캐릭터 하나하나에 감정선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다.


주인공 탄지로의 따뜻함,

네즈코의 침묵 속 고집,
젠이츠의 자는 모습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점점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전투의 긴장감과 감정이 최고조에 달하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은 바로 그때,


우즈이 텐겐 사마가
굳이 또 그 쓸데없는 말을 한다.


“너희는 그만 여기서 나가라.”
앞으론 나 혼자 움직인다.
“살아있는 녀석이 이긴 거다.”
“살아남을 기회를 놓치지 마라.”


굳이, 왜, 지금 그 말을 꼭 해야만 했을까?


그렇다. 과거로부터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은 영화를 통해 알고 있다.

주인공 옆에 찰떡같이 붙어 있던 매력적인 캐릭터가 갑자기 입방정을 떨기 시작하면 그건 곧 죽음의 플래그라는 것을 말이다.


'스크림'에선
한눈에 봐도 불길해 보이는 그 순간,
굳이 화장실에 간다고 하더니 그대로 사라졌다.


'28일 후'에선
누가 봐도 위험한 곳에 서서
"이곳은 안전해"라고 말하던 사람이 가장 먼저 사라졌다.


'인터스텔라'에선
자꾸 “먼저 가”라고 하는 사람은
진짜로 먼저 가버렸다. 관객은 같이 가길 바랐는데.


이렇듯 과거에도 늘 그 쓸데없는 한마디로 사라진 캐릭터들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항상 매력적이었다는 게 함정이다.


지금 보고 있는 귀멸의 칼날에서도 이 불길한 이론은 또 맞아떨어지려나보다. 툭툭 말을 던지지만 따뜻한 츤데레 같은 모습에 매력을 느끼고 그를 응원하며 한창 몰입하고 있을 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결국, 그는 다치고 말았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이쯤에서 멈춘다.)


이쯤 되면, 묻고 싶다.

텐겐사마, 그 말을 꼭 지금 해야 했습니까?


물론 영화니까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장치인 건 안다.

하지만 현실이든 영화든 말이 플래그가 되는 순간은 정말 많다.


말이 씨가 된다는 걸 작가도 알고, 감독도 알고, 관객도 다 아는데
왜, 그들만 모를까?


“이번엔 진짜 괜찮아.”
“나 없으면 안 되잖아.”


그런 말들은 대사이자 저주다.

그리고 플래그는 늘 그렇게 조용히 꽂힌다.


영화 속 캐릭터들의 입방정을 보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도 든다.


'나도 무언가를 입 밖으로 불필요한 말을 내뱉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을 향해 플래그를 꽂고 있는지도 모른다. 말이 씨가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놓치고 마는 그 한마디가 꼭 문제다. 정말 그러지 말자.


님아, 그 말을 내뱉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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