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대학시절에 정말 친했던 남자 사람 친구 두 명이 있었다. 바로 J와 M이다. 요즘 집필중인 개인 저서의 꼭지에 마침 그들에 대한 추억이 소개되고 있긴 하지만, 사실 오늘 그래서 M의 이야기를 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엉뚱하게도 약 20분 전쯤 점심 준비를 하느라 양파를 익히는 중에 떠오른 생각 때문이다.
‘아! M의 별명이 양파였지. 그것도 내가 지어줬었는데...’
말주변이 없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평소에 말을 느리게 해서 그런 인상을 주었던 건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M은 내가 보기에 어쨌든 말이 많은 친구는 아니었다. 학과 세미나 동아리 활동도 함께 했고 물리학이 워낙 철학과 밀접하다보니 많은 철학적 사색도 함께 했었다. 열변을 토하며 토론도 많이 하고 어떨 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싸우기도 했던 진짜 친구. 갑자기 그가 보고 싶다.
특히 M은 장담컨대 훌륭한 작가이기도 하다. 그가 쓰는 시를 꾸준히 읽고 내 느낌을 전해주고 칭찬도 해주곤 했었는데, 글에 대한 관심도 비슷해서 다음에 내 개인저서가 나오면 멋지게 사인을 해 들고 한 번 만나보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그 당시에도 정말 훌륭했던 그의 시들이 지금은 얼마나 더 깊어졌을까 기대도 된다.
내가 그에게 양파라는 별명을 붙여준 이유는 간단히 말해서 진짜 속을 알 수 없는 친구였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이 배꼽을 잡고 뒹굴 정도로 재밌는 상황이거나, 혹은 정반대로 당황할 정도로 난처한 상황에 닥칠 때 조차도, 그의 표정은 귀여운 6살배기 소년의 그것처럼 배시시한 미소를 던질 뿐이었다.
그 미소 뒤에는 다른 편견이나 섣부른 판단 같은 것은 전혀 없어보였다. 오랜 친구지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가 아니라 ‘그래보였다.’ 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그 미소 뒤에 대체 어떤 감정이 있는지 추측조차 어려운, 뭐랄까 약간 신비스러운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히 좋은 의미다 아니면 나쁜 의미다 같은 편견을 떠나, 그냥 잘 알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그를 양파라고 불렀었다. 그런데 주변의 다른 친구들은 그 말을 대체로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지금 생각하면 파릇파릇 젊은 시절의 경직됨이 느껴지는 대목이긴 한데, 친구 사이에는 모든 것이 훤히 들여다보이고또 많은 것을 공유해야하는 그런 것이 우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가끔 애매모호한 그 친구의 성격에 거리감이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그 친구의 매력이기도 했다. 아마도 내 성격이라는 것이 비밀스러움이란 건 눈 씻고 찾아볼 수 없이 속이 다 드러나 보이는 유리병 같았기에, 그런 부분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었다고 생각한다.
양파라는 표현의 의미로서 한 가지 더 짚고 갈 것이 있다. 비록 M이 종종 속을 알 수 없었던 게 사실이고 그래서 우리 친구들이 더 호기심을 가지고 그를 시험에 들게도 해 보았지만, 단 한 번도 그는 우리를 놀라자빠지게 한 적은 없었다. 다시 말하면 푸른 수박을 쪼갰더니 빨간 속살을 드러냈다든지 하는 게 아니라, 새하얀 우리 M양파군의 껍질들은 일관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를 끝내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M을 불안해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나는 그런 편안함이 좋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늘 잘 지냈고 편안했던 것 같다. M이 카멜레온처럼 무지갯빛의 껍질들을 매일매일 벗겨냈었더라면 우린 정말 피곤했을 거다. 이렇게 내 상념은 푸르렀던 추억 속으로 흘러 가다가 다시 익어가는 양파로 되돌아왔다.
그로부터 20 여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양파 같은 사람의 매력을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그 전에 먼저 나의 양파 사랑을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양파를 정말 좋아한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는 양파를 바라보면서 좋다는 것은 아니고 당연히 양파는 야채니까 먹는 음식으로서 말이다. 내가 하는 요리에는 양파가 안 들어가는 요리가 없다. 그 맛이 참 좋은 것인데 특히 그 양파의 속성을 정말 좋아한다.
양파는 그냥 생으로 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경우에는 너무나도 적나라한 거침이 느껴지고 딱딱한데다가 톡 쏘는 향도 눈물을 쏙 빼놓을 정도로 공격적이다. 그런데 그 양파가 살짝 익으면 전혀 다른 맛과 질감을 갖는다. 포인트는 바로 이것이다. 그렇게 거칠고 공격적인 양파가 약간의 올리브 오일과 어우러져 살짝 익으면서 스물스물 올라오는 그 향기!
캬! 거칠고 완고한 고집스러움이 그 절정을 지나 부드럽고 달콤하게 변해가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 맛은? 한마디로 매력적인 달콤함이다. 단 맛이라면 설탕이 으뜸일테지만, 이 양파의 달콤함은 설탕의 그것처럼 앞뒤 없고 대책 없는 달콤함이 아니다. 뭔가 쓰디쓴 아픔을 간직한, 아니 극복해 낸, 그래서 더욱 깊고 성숙한 달콤함 같다.
나는 그런 양파를 닮은 사람이고 싶다. 혈기가 왕성했던 젊은 시절의 나는 꽤나 고집스러웠고 관용이 부족했으며 게다가 공격적이기까지 했다. 나의 완고함은 나 스스로를 늘 필요이상으로 가혹하게 평가했고, 부족했던 관용으로 여유가 늘 없었으며, 말과 행동으로 표현된 나의 공격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깨닫지 못했었다. 마치 딱 생양파 같았었다. 혼자 쌀쌀맞게 톡톡 쏘는 냄새를 풍기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제 세월 또는 경험이라는 오일에 잘 익어가고 있는 나를 본다. 어쩌면 내가 약간은 달콤한 향기를 풍기기 시작하진 않았을까 은근 기대도 해본다. 나는 내 태생이 설탕이나 꿀이 아니라 양파인 것이 좋다. 만약 내가 그렇게 거칠었던 순간이 없었다면 지금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달콤함은 그냥 영혼 없는 달콤함은 아니었을지.
어르신들께서 요리하실 때 종종 양파나 마늘을 익히시면서 숨을 죽여야 된다고 말씀하신다. 김치를 담글 때도 일단 배추를 소금에 절여 숨을 죽여야 양념도 잘 먹는다. 그 숨을 죽인다는 표현, 그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거라 생각한다.
그렇게 숨이 한번 죽으려면 양파는 뜨거운 팬 속에서 들들 볶여야 할 테고 배추는 왕소금의 따가움을 잘 견뎌내야 하지만, 그렇게 해서 부드러워지고 나면 쌩쌩했을 때보다 더 많은 재료들과 궁합이 잘 맞아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요리에 쓰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더 큰 세계를 열 수 있지 않을까? 지금 내가 겪는 고민과 경험들로 인해 내가 익어가고 성장하는 중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는 듯하다.
양파하나 볶으면서 별 긴 생각을 다 했다.
분명한 건, 나는 여전히 양파가 좋다는 것, 그리고 양파 같은 사람이 좋다는 것.
자꾸 만나보고 겪어봐도 더욱 더 깊은 속내를 가진 신비한 사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관적이어서 편안한 사람, 그렇게 익어가며 점점 더 향기로운 풍미와 함께 매력적으로 달콤해지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익어가는 양파처럼 말이다.
세상을 향한 다정한 시선을 씁니다.
- 파리제라늄_최서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