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보고싶다’는 말이 참 좋다.
실제로 가족들과 친구들이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전화 통화를 할 때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내가 그 말에 담고 싶은 의미는 단지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고 그들을 만져보고 싶다는 뜻만은 아니다.
이제 글을 쓰는 작가로서 바라 건데, 나의 모든 감각과 어휘와 글 솜씨를 동원하여 언젠가는 그 말 속에 담긴 모든 감정을 정확히 묘사해 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나 아직은 역부족이다. 나의 모든 그리움이 통째로 담긴 ‘보고싶다’는 말은 그렇게 늘 애틋하고 아득해서 마음에 큰 물결을 남기곤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사랑한다’는 말보다 ‘보고싶다’는 말에 마음이 뭉클할 때가 더 많다.
누군가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절대 잊히지 않는 순간일 것이다. 물론 내가 누군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향하는 대상이 누구든 절대적이고 독점적인 동시에 어느 하나의 의심이나 흠 없이 완벽한 감정이어야만 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 반짝반짝 빛나는 크리스마스트리 같은 화려함 때문일까, 가끔은 그 말 안에서 일종의 긴장감과 부담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때로는 그 흠 없이 완벽한 투명함 때문에 날카롭고 차가운 느낌을 주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반면 ‘보고싶다’고 말하는 느낌은 언제나 소박하다. 그 소박함이 마치 무뚝뚝한 금가락지를 닮았다. 그래서 포근하다. ‘보고싶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마치 아랫목에서 따뜻하게 덥혀진 담요가 나를 등으로부터 앞섶까지 감싸 안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게다가 이 너그러운 표현은 대상이 누구든 무조건 패스다. 사랑한다는 말처럼 유일하게 한 사람에게만 할 수 있는 배타적인 말이 아니니까. 그리고 장담컨대 ‘보고싶다’ 혹은 ‘보고싶었다’는 말을 듣는 사람은 어떤 누구라도 행복해질 것이다. 어떤 긴장도 어떤 부담도 없이 말이다. 그런데도 엄청나게 설레지 않는가?
그토록 내가 아끼는 ‘보고싶다’는 말이 더욱 더 소중하고 특별해진 것은 프랑스어로 ‘보고싶다’는 표현을 배운 이후이다. 프랑스어로 ‘보고싶다’는 표현은 문장 구조가 약간 독특하다. 실제로 많은 프랑스어 초보자들이 실수를 하는 부분인데 그 이유는 ‘보고싶다’는 문장의 주어가 바로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보고싶어 하는 주체가 나인데 문장의 주체가 내가 아니라는 말이 조금 신기할 수도 있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나는 네가 보고 싶다. <주어 + 목적어 + 서술어>
I miss you. <주어 + 서술어 + 목적어>
영어의 경우는 문법의 특성 상 목적어가 서술어 뒤에 있지만 어쨌든 너를 보고 싶어 하는 주체가 나임에는 변함이 없다. 문장 첫머리의 ‘I’ 가 그 증거니까. 그런데 이제 프랑스어로 표현해보자.
Tu me manques. /튜 므 멍끄/ < 주어 + 목적어 + 서술어>
일단 단어 순서대로 직역을 하자면 '너는 나에게 부족하다'가 된다. 주어가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 바로 이 부분이 예술이다. ‘manquer /멍께/ 부족하다’라는 단어의 특성이 문장의 주체를 바꾼 것인데,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장황하게 프랑스어 문법을 설명할 생각은 없다. 단지 가만히 이 문장을 음미하고 싶을 뿐.
네가 나에게 부족하다. 네가 나에게 모자라다. 내 안에 너의 자리가 있는데 그게 다 채워지지 않아서, 네가 내게 더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라니... 아! 어떤 말이 이보다 더 낭만적일 수 있을까?
오늘 밤, 나는 저 까만 밤하늘로 이 미치도록 낭만적인 고백을 쏘아 올린다. 나의 그립고 소중한 이들을 향해...
당신이 내게 너무너무 부족하다고!
그렇게 많이많이 보고싶다고!
세상을 향한 다정한 시선을 씁니다
- 파리제라늄_최서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