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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strict Code Dec 21. 2023

임용고시 최종불합격 이야기 (1)

 인성교육자료가 된 이야기

주변 사람들은 회사 남편에게 미국발령을 통보한 것로 종종 오해한다. 우리 미국에 있는 회사로 '자발적으로' 지원했다. 가족이 영어를 배울 수 있다는 점이 실행 단계에는 큰 동력이 되었지만, 미국행의 결정적인 이유는 남편과 나의 인생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다.


인생에서 몇 년간은 조금 느린 속도로 살아보고 싶었다. 새로운 곳에서 살면 시간을 사는(buy) 것 같은 효과를 얻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같은 24시간이지만 한국에서의 하루와 미국에서 하루는 달랐다. 뭐랄까, 하루하루가 생생해졌다. 연고도 없이 시차 15시간 거리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은 무료했던 일상에 냉수마찰을 하는 것 같았다. 정신이 바짝 차려진다. 하루가 그냥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겨지는 것 같다. 게임 퀘스트를 깨는 것 같기도 하다. '음식 제대로 주문하기', '소아과 다녀오기', '택배 반품하기' 등 한국에서 당연했던 것들이 여기서는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어떤 영어를 써야 하는지 실전을 통해 하나하나 배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자동화'되지 않은 일상 덕분에 시간과 동행하는 기분이 든다.


미국에 오기 전 한국에서 지인들에게 앞으로 몇 년간 미국에서 지낸다고 이야기했을 때 그들은 모두 비슷하게 나에게 물었다.


"그럼 직장은 그만두는 거야?"


휴직이 가능한 직장에 다닌다는 건 행운이라 생각한다. 리고 휴직이 가능했기에 할부 12개월로 산 안마의자 3개월도 채 못쓰고 급하게 미국을 가는 패기가 가능했다. 휴직이 아닌 퇴사를 해야 했다면 안마의자 할부금을 다 갚고 거기에 누워 평생(?) 갈까 말까 고민하다 기회를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참고로 큰 맘먹고 산 안마의자는 친정집에서 열일 중이다.)




학교에서 인성교육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반에서 어떤 무리가 특정학생을 대놓고 무시하는 듯한 분위기가 조성되거나, 반 학생이 다른 선생님에게 수업 중 예의 없이 행동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학폭이 연이어 터지면서 전체적으로 도덕적 해이가 만연해졌을 때 등이다. 이런 위기의 순간이 오면 개별 상담 외에도 반 전체에게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가'(실제로는 '왜 싹수없이 행동하면 안 되는가'로 말한 적이 많음)에 대해 말해준다.


나는 이익의 관점에서 도덕적 행동을 정당화한다. 도덕적 행동을 하면 이익이 되기 때문에 도덕적 행동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선한 동기를 강조한 칸트가 들으면 분노할 말이다. (참고로 "이익이 없는 걸 알면서 도덕적 행동을 하는 건요?"라는 질문에는 "좋은 일하면 기분이 좋잖아(찡긋)"라 답한다.)


내 주장이 고리타분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시큰둥하게 듣는다. 그러나 주장의 근거로 내가 '등학교 사 임용후보자 선정경쟁시험(일명 임용) 에피소드'를 들려주면 평소 집중 못하던 학생들도 눈빛이 살아난다.




나름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지만 원하는 대학교에 가지 못했다. 가정형편상 재수는 불가했기에 담임선생님과 부모님의 의견에 따라 집 근처 대학의 사범대로 갔다. 당시 어른들 사이에 교사직업이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교직에 뜻이 없던 나는 대학교 1학년때부터 학과생활에 흥미가 없었다. '이딴 학교', '이딴 학과'라고 생각하고 지냈기 때문에 선배, 동기들과 사이가 좋을 수 없었다.


선배들에게 크게 대든 적도 있었다. 바로 '불참비'때문이었다. 학과 모임에 나오지 않을 거면 불참비를 내야 했는데 그 금액은 참가비보다 비쌌다. 당시 나는 학과 모임을 매번 갈 여유도 흥미도 없었고 불참비를 바로 낼만한 경제적 여력도 없었다. 그리고 학기 초에 이미 학과 운영비로 몇 십만 원 정도 돈을 냈다. 그래서 물었다. 왜 불참비를 내야 하냐고, 그 돈은 어디다 쓰는 거냐고. 초반에 학과 모임에 몇 번 참여해 본 결과 그들이 하는 일이라곤 술을 부어라 마셔라 먹고 시시한 소리나 하고 있었기 때문에 꽤나 당당하게 쏘아붙였던 걸로 기억한다. (사실 지금의 나라면 인맥을 쌓기 위해 학과 모임에서 참석을 하거나, 조용히 불참비를 냈을 것이다. 아니면 웃으면서 돌려 물어봤을 것이다.)


고작 신입생이 불참비로 태클을 거니 선배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아예 대놓고 나를 싫어하는 티를 냈기 때문에 그 이후로 학교에서 누군가를 마주칠 때마다 괴로웠다.


* 사실 위 이야기는 학생들에게는 하지 않는 이야기다. 불참비 문제는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어 이야기의 본질을 흐리니까 하지 않는다. 학생들에게는 다음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원하지 않는 대학교를 입학하는 순간부터 대학생활을 잘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선배들을 보면 인사도 하지 않았다. 고3처럼 저녁까지 남아 학과공부를 하는 동기들 우습게 보였다. (쿨병이 제대로 왔음) 학과 교수님 수업을 들을 때도 자주 불성실했. 국 학과에서 싸가지없는 애로 소문이 났다.


한 번은 선배 중 무섭기로 소문난 한 명이 나를 불러 훈계를 했다. 요지는 예의 바르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기분 나빠서 더 막 나갔다. 인사를 대충 하되 뚱하게 쳐다보면서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학과에서 천사로 불리는 선배가 나를 불렀다. 마음을 열고 사람들과 친해져 보라고 부드럽게 이야기해 주었다. 나중에 다 도움이 될 거라고 덧붙여서 말했다. 말은 정말 고마웠는데 이미 꼬일 대로 꼬여버린 관계라서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난감했기에, 정확히는 용기가 없었기 때문에 달라지지 못했다.


대학교 다니는 내내 교사가 될 생각은 없었고 마케팅 쪽으로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대외활동, 어학점수, 봉사활동 등 스펙을 쌓았다. 그리고 4학년이 되어 원서를 넣었을 때 우수수 떨어졌다. 사범대 출신 내가 원하는 기업에 취직하려면 우수한 대학의 고스펙 경영대생들을 이겨야 했다. 그리고 그렇지 못했다. 진로 선택을 제대로 잘못한 것이다.


뒤늦게 임용시험을 보기로 했다. 돈을 벌어야 했다. 이제 이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렇게 1년 공부했다. 당시 임용시험은 3차 시험까지 있었는데 첫해에 1차를 합격했다. 물론 2차에 떨어졌지만 그래도 '이거 되네?' 하는 자신감이 붙였다. (과인으로서 기업 취업을 준비했을 때는 도대체 기업마다 무슨 기준으로 사람을 뽑는지 불투명하게 느껴졌다. 어디까지 스펙을 만들어야 하는지 끝이 보이지 않는 기분이랄까. 임용시험은 문제와 답이 거의 명확하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준비(공부)할 것이 또렷했다. 서류 광탈로 지친 태라 '이렇게만 하면 될 것 같은' 희망 너무 소중했다.) 


다음 해부터 임용시험은 1차 필기, 2차 수업실업과 면접으로 전형에 변화가 있었다. 1차를 합격했고 수업실연과 면접까지 봤다. 그리고 최종에서 탈락했다.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은 안다. 아니, 시험을 준비하는 모든 수험생들은 안다. 최종에서 떨어지는 게 어떤 기분인지. 임용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최종에서 탈락하는 것을 '교문 바로 앞에서 뺨 맞는 기분'이라고 표현한다. 마음은 교문까지 왔는데 너 아니라고 돌아가라고 하는 것이다. 고통은 덤이다. 1년 동안 다시 또 긴 터널을 지나야 한다.


그리고 나는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절대 임용에 합격할 수 없을 것을 확신했다. 


수업 실연과 면접장에서 채점관, 면접관을 봤기 때문이다.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선배들, 교수님들이 나를 채점하려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다른 지역으로 원서를 접수하기엔 당시 내 과목의 티오는 너무 적었다.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수업 실연 연습하던 모습




내용이 길어져 임용고시 최종불합격 이야기 (2)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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