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며 어린 손녀를 부르는 미국 할머니를 보고별소리를 다한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너 호박 같아"라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싸우자는 거지. 그렇게 오지랖을 부리다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인터넷을 찾아봤다. 찾아보니 미국에서 호박이라는 별명은 주로 가족이나 친구에게 애정과 애착을 드러내는 말로 무려 사랑스러움과 따뜻함의 대명사라고 한다!이렇게 한국에서의심 없이 당연하게 여긴 생각들이 미국에서는 다르게 통용될 때 뇌에 바람을 쐐주는 것 같이 상쾌하다.
한국에서 미디어로 접한 미국의 핼러윈은 꽤나 시끌벅적하고 과격한 이미지였는데 미국 텍사스에서 경험한 핼러윈은 세상 평화로웠다. 핼러윈 시즌에 하는 펌킨패치는 넓은 필드 혹은 실제 농장에서 다양한 호박들을 전시하고 즐기는 행사이다. 호박으로 꾸민 포토존에서 연인, 가족끼리 사진을 찍는다. 호박에 그림도 그리고 농장 동물들에게 먹이도 주는 아이친화적인 부스도 있다. 트랙터를 이용한 아이용 기차도 탈 수 있다. 맘에 드는 호박을 직접 구입할 수 있고 호박으로 만든 쿠키나 음료 등을 즐길 수도 있다.
처음 펌킨 패치를 간 날이 생생하다. 말로만 듣던 사랑스러운 호박들을 만났다. 세상에 이렇게 귀여운 호박이라니! 뭔가 포동포동한 아기 볼살 같기도 하고 실룩대며 걷는 웰시 코기(강아지) 엉덩이 같기도 했다. 그것뿐만 아니라 처음 보는 신기한 외형의 호박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호박죽을 만들 때 쓰는 그 넓적한 호박 말고는 다른 호박을 본 적이 없어서 더 신기했다. 한국에서 "못생김의 대명사"로 박한 대우를 받던 호박이 무대의 주인공이 되어 뽐내는 모습이 유쾌했다.
심지어 통쾌하기까지 했다. 어릴 적 내 별명이 "호박"이었기때문이다. 정확히는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부모님의 지인, 친인척들에게 "못난이 인형" 혹은 "호박"으로 불렸다. 그리고 그렇게 불릴 때 귀엽다는 의미보다는 "너, 좀 못생겼어."가 훨씬 강력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좀 억울한데, 변명을 하자면 나는 그렇게까지 못생기지 않았다... 고 쓴다. 그리고 설령 내 외모가 못났더라도 어린 나를 그렇게 부르는 건 기본적으로 배려와 교양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아이를 낳고 키워보니 아무리 객관적으로 외모가 아쉬운 아이들에게 대놓고 "아이 외모가 못났네요.", "너 못생겼다."라는 말은 아이 부모에게도 아이에게도 절대 절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린 시절 내 별명에는 부모님의 책임도있다. 부모님은 남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느니 자식이 못생겼다는 소리를 듣는 게 마음 편한 사람이다. 어린 내가 들은 최고의 외모적인 칭찬은 "전보다 나아졌네"였다. 그 말을 듣고 먼저 드는 생각은 '전에는 얼마나 못났다고 생각한 걸까'였다.
하하하! 000!(=나에게 호박이라 말했던 사람들)
미국 와보니 호박은 이렇게나 귀엽고 사랑스럽답니다.
제 외모를 함부로 평가하며 퉁친 "호박"이라는 별명은 사실 칭찬이었어요, 미국에서는요.
글로벌하게 생각해 보시라고요!
-뒤끝 있는 호박
살면서 외모적으로 못났다는 소리만 주야장천 듣다가 학교에서 담임선생님으로 일하게 되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반 아이들이 나보고 예쁘다고 했다. 처음에 그 말을 듣고 너무 좋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닌 일은 아직도 부끄럽다. 당시 진실을 말하고자 했던 친한 친구(현 남편)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애들이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하는 말이니까 정신 차려."
그러나 학생들은 내 미모(?)를 잊을 만하면 "선생님 연예인 00(여자 아이돌임) 닮았어요.", "선생님 오늘 진짜 예뻐요."라며 칭찬해 줬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철딱서니 없던 나는 학생들의 기대에 부응(?) 하기 위해 나와 닮았다고 했던 그 연예인의 사진을 연구하여 그녀와 비슷하게 화장하고 유행하는 옷을 사고 미용실에 돈을 바쳤다.
그러다가 일명 거울치료를 경험했다. 옆반 A선생님을 향한 아이들의 외침을 듣게 된 것이다.
"A선생님, 예쁘세요!"
나는 정말 머리를 한 대맞은 기분이었다. 정확히는 얼굴을 누가 쟁반 같은 걸로 칭~하고 가격한 기분이었는데 아마 얼굴도 빨개졌을 것이다. 아이들은 따뜻한 미소로 고백하듯 말했기 때문에 조롱이나 반어법도 아니었다.
A선생님은 (미안하지만) 누가 봐도 평범했다. A선생님이 본인 소개팅 썰을 학년실에서 말한 적이 있다. 소개팅남이 자신에게 ○○○(우락부락한 남자연예인임)을 닮았다고 했다며 울상이었을 때 학년실의 8명의 선생님 중 누구도 "아니에요, A선생님은 그 연예인을 닮지 않았어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 있었다. 단지 "(그걸 면전에 말한) 그 자식 나쁜 놈이네"라며 소개팅남을 같이 까주는 형태로 위로했기 때문이다.
그런 A선생님도 예쁘다고 말하는 우리 학생들.그제야 "칭찬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사회생활 만렙의 처세술 혹은 MBTI의 극 E의 기분 좋은 아무 말 대잔치로 볼 수도 있다.기억을 더듬어보면 학창 시절에 선생님들에게 시답지 않은 칭찬을 남발하던 친구들이 항상 존재했다. 당시 그런 친구들은 '속없는 유치한 놈들' 혹은 '입시교육의 하수인'으로 치부했었다. 그런 내가 이렇게(?) 됐구나... 현실을 직시하니 약간 울적했다. 그런 와중에 아이들의 "선생님, 예뻐요."라는 말을 들었다. 다시 들어도 기분이 째졌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찾고 생각했다. 사람이란(정확히는 나란 인간은) 이렇게 단순하구나, 예쁘다는 칭찬하나로 이렇게 간단히 한 사람의 기분을 끌어올릴 수 있구나.
학교에서 학생들의 칭찬에 헤벌레 하는 나지만, 정작 칭찬을 잘해야 하는 사람은 나였다. 6년 동안 담임을 하면서 공식적으로는 360번의 학부모 상담을 했고 비공식적으로는 1000번 정도 한 것 같다. 상담의 마지막 질문으로 "어머니, 제가 00(학생)에게 따로 신경 쓸 부분이나 부탁하시고 싶은 사항이 있으신가요?"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아... 그게, 딱히 없는데요... 그냥, 00에게 칭찬을 좀 많이 해주세요."
부모라면 안다. 아이들 인생에 칭찬이 얼마나 중요한지.
교육학적으로 효과 있는 칭찬의 방법은 여럿 있지만 그중 내가 적용하는 건 다음과 같다.
1) 칭찬할 행동을 보면 즉각적으로, 구체적인 내용을, 과장 없이 칭찬하기다. 예를 들면 "00이 착하다. 넌 정말 천사야"가 아닌 "00이 아픈 친구를 대신해 청소를 해주다니 정말 배려심이 많구나"와 같이 말한다.
2) 과정을 칭찬하기다. 예를 들면 "00이 지난달에는 **부분을 많이 어려워했는데 이제 ** 개념을 제대로 설명하는 걸 보니 많이 노력했구나"와 같다.
우리가 흔히 하는 "00는 정말 똑똑하다"와 같이 사람의 특성으로 칭찬하는 것에 대해 뉴욕 주립대학교 차터 스쿨 연구소의 더그 레모브라는 교육자는 이렇게 말했다.
"똑똑하다는 칭찬은 자신감이 아니라 두려움을 준다. 덜 똑똑해 보일까 봐 어려운 과제는 수행하지 않으려 해서 모험을 적게 시도한다. 따라서 가능한 구체적으로 칭찬하고, 특성이 아니라 행동을 칭찬해야 한다."
칭찬도 자주 하는 사람이 잘한다. 나의 경우 연습이 더 필요하다. 칭찬의 순간을 발견해 내는 칭찬센서를 활성화시켜야 하고(무심하고 눈치 없음) '어떤 말로 칭찬해줘야 하나' 머리를 굴려야 하는데(이 과정에서 적당한 멘트를 찾는 게 약간 머리가 아픔) 연습을 통해 이 과정을 적당히 자동화(?)시킬 필요가 있다.
참고로 미국에서 지내는 1년 동안 자연스럽게 알게 된 칭찬방법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대놓고 외모에 대한 칭찬은 하지 않는다. "너 예뻐", "너 아름다워", "너 잘생겼어", "너 몸매 좋다"등은 일상대화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문장이라고 보면 된다. 외모를 대놓고 칭찬하는 대신에
"l love your outfit."
(당신 옷이 마음에 들어요, 옷 예뻐요!)
"That scarf looks really good on you."
(그 스카프 너한테 참 잘 어울린다.)
와 같이 눈에 보이는 그 사람의 취향을 칭찬한다. 재킷, 티셔츠, 바지, 신발, 귀걸이, 가방 같은 외적인 것들을 칭찬하는 것이다. 사회활동을 위해 겉모습을 단장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나 취향이 투영되기 때문에 이를 칭찬하면 무난하게 성공한다. 예를 들면 거금을 들여 산 한정판 모자를 썼는데 동료에게 모자가 잘 어울린다는 칭찬을 받으면 '나의 힙함'을 인정받은 것같이 느낀다. 이렇게 가볍지만 센스 있는 칭찬은 말하는 사람에게 친절한 이미지를 주고 서로의 하루를 기분 좋게 만든다. 무엇보다 '상대방의 기분 좋으라고' 칭찬을 해주는 사람의 좋은 점은 애쓰지 않아도 보인다. 인간관계의 꿀팁이다.
요즘 엄마와 통화를 하면제가 드디어 사람 돼가고 있다고 하십니다. 자칫 욕으로 들릴 수 있는데, 엄마에게 들은 최고의 칭찬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