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억이응 Nov 16. 2019

다시 읽는 일기

28년 전 일기로부터


집에 불나면 뭐 들고나갈 거야? 나 스스로 던진 질문에 늘 '일기장'이라고 답했다. 곧 마흔이 되는 지금까지 어릴 적부터 쓰던 일기장을 보관하고 있다. 통장에 돈 다운 돈이 없기도 하거니와 금은보석도 없고, 값비싼 가방, 옷도 없는 내게 유일하게 챙겨나가고 싶은 건 내가 쓴 모든 글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손으로 쓴 나의 글'이다.  그 안에는 일기장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수업시간에 주고받았던 쪽지들, 사귀던 남자 친구에게 썼던 러브 일기장(그 녀석은 이런 사실도 모른 채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며 헤어지자 했다.) 혼자 시를 쓰겠다고 끄적대던 낙서 나부랭이, 수많은 스티커와 알록달록 빽빽하게 꾸며져 있는 다이어리, 군대 갔던 남친에게 썼지만 보내지 못한 편지, 전하지 못한 편지들...


나의 '아날로그 아카이브 박스'에 모두 담아 옷장 위에 올려놓고 살았다. 불이 나면 저거 하나만 들고 나 가야 지하며 가끔 올려다보는 게 다였다.  그렇게 잘 '보관'만 하고 있다가 정신없이 결혼을 하고 신혼집에 와보니 그 박스가 없어졌다. 연습장 귀퉁이를 쭉 찍어 "이따 야자 땡치고 빽순대 먹으러 갈까?" "오케이!"라고 적힌 소소한 쪽지들과 비록 헤어진 옛 남친이지만 이런 사랑의 대서사를 써준 마지막 사람의 글까지 몽땅 사라져 버렸다. 범인은 함께 살던 1980년대부터 심플 라이프 실행자였던 엄마였다.  신혼집에는 절대 불필요하다는 그녀만의 올바른 기준에 맞춰 그 기록물들은 폐기 처분됐다. 내게 남은 건 일기장과 다이어리, 혼자 쓴 시, 원고지에 쓴 독후감뿐이었다. 그것만이라도 버리지 않은 걸 감사해야 할지, 그, 거, 버, 렸, 어,라고 너무나 당당히 다섯 글자를 내뱉는 엄마에게 어이는 어디로 갔는지 물어야 할지...(그녀는 정말이지 죄책감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순진한 얼굴로 나의 화를 잠식시켰다.)


이 세상에 이만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느꼈던 사람이 이 세상 가장 상극임을 알게 되고,

이 세상에 이만큼 내가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느꼈던 아이가 나의 육체와 영혼을 지치게 할 때마다,

멀미가 밀려와 눈에 보이지 않는 구토를 해댔다.  내가 믿었던 많은 생각들과 다른 물질들이 내 몸에 들어와 엉켜 괴로웠다. 그땐 많은 것들을 토해내고 속을 비워야 했나 보다. 체질개선에 앞서 나라는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어떤 체질인지 탐구하고 싶었다. 나라는 주제를 놓고 모든 자료를 끌어다 논문 한편을 쓰는 작업. 그때 생각났던 나의 자료. 일기장을 다시 펼쳐보기로 했다. 어릴 때 나는 어떤 아이였던 걸까? 어떤 아픔이 있었던 걸까? 그 작은 기록들이 조각조각 흩어진 나의 퍼즐들을 맞추는데 도움이 될까? 난 대체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지 답을 찾아줄까?


국민학교 4학년부터 쓴 일기장 속 수많은 글자들이 천진난만하게 인사해주었다.

'언니, 퍼즐을 꼭 완성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여기 앉아서 나랑 퍼즐게임해보자!'

'그래, 좋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