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월 5일 일요일 날씨: 조금 쌀쌀 4학년
제목: 즐겁게 뛰어 놀 수 있지만 우리의 가정은 그렇지 않고 왜 낭비할까?
나는 우리 가정이 싫다. 오늘은 나는 참 슬프다. 오늘 방 청소를 우연히 엄마께서 해주셨다.
그런데 다 버릴 만 한 것은 다 버렸다. 크레파스는 다 버렸다. 조그마한 크레파스를 다 버린 것이다. 나는 너무 아까웠다. 종이들도 다 새로 쓸 수 있을 텐데..
엄마는 옛날 생각을 모르고 깜박했을지 몰라. 연필도 볼펜깍지에 끼워서 쓰는데. 이젠 달라졌다고 그러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
제목이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지만 이 날 일기에는 내 물건들을 청소해버린 엄마에 대한 섭섭함과 분노가 있다. 예전부터 엄마는 원래 잘 버렸다. 지금 유행하는 미니멀리즘 선구자시다. 엄마 입장에서 쓸데없는 것들은 겉이 멀쩡해보여도 버렸다. 그래서 늘 집이 깔끔했다. 반대로 아빠는 늘 버리지 못하셨다. 거기다 늘 뭔가를 주워오셨다. 화분을 주워 오셔서 예쁘게 꽃을 심어 키우시고 선반을 주워와 페인트칠 하시고 달아주셨다. 요즘 유행하는 셀프 인테리어 달인이셨다. 그런 두 분은 늘 극과 극을 향해 이제껏 수고하시며 사신다. 어린 나는 이런 엄마가 싫었던 걸로 보아 아빠의 성향을 가졌나보다. 지금껏 일기장을 보관한걸 보면 말이다.
엄마가 몽땅 크레파스나 몽땅 연필, 이면지를 버렸다고 우리나라 걱정까지 하는걸 보니 나도 참 애늙이 같은 구석이 있었구나 싶다.
낭비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아직도 난 이면지를 잘 버리지 못하고 애들 몽땅 크레파스도 모아둔다. 첫째 석이가 그린 낙서 같은 그림들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둘째 찬이가 모아두는 돌이나 비비탄 총알도 그대로 두고 있다. 나는 아이들이 가진 물건들의 애정이 끝나는 시간을 기다릴 뿐이다. 얼마 전에 초 중 고 졸업앨범을 모두 버렸다. 더 이상의 애정이 없었다. 21살에 사서 15년 넘도록 입은 면치마는 닳고 닳아 입고 다니기 창피할 정도지만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 치마에 대한 나의 애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 미니멀리즘이 모든 분야에 유행이다. 나도 한 동안 관련 책들을 보고 많은 것들을 정리했다. 그 때 내게 도움이 많이 되었던 것이 바로 ‘애정이 없다면 버려라’였다. 필요할까 아닐까가 아니라 그 물건에 가슴이 떨리는 감정이 없다면 버리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선뜻 와 닿지 않았다. 몇 개월에밖에 안 된 물건들은 아직 애정이라는 단어를 대입하기에는 어렵지 않은가? 그런데 아니었다. 모든 물건이 최고의 “이쁨”으로 내 집에 온다. 이미 최고의 애정을 줬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자마자 그 마음이 식는 물건이 있다. 정리는 한결 쉬워졌다. 버릴 때 생기는 희미한 죄책감도 없다. 물건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다. 어떤 물건을 사 들일 때 더 신중해진다.
그러다보니 설레는 물건들의 선택 폭은 좁아져 비슷한 것들만 사게 된다. 차고 넘치는 연필과 메모지를 계속 사는 것처럼 말이다.
어린 나는 그림 그리고 글 쓰는 게 좋았다. 크레파스 종이 연필은 나와 너무나 친밀한 도구들이었다. 엄마가 그 사실을 알기에는 삼남매를 키우며 장사 하느라 너무 바쁘셨다. 엄마에게도 가슴 떨리는 물건이 있었겠지....축하할 일이 있을때 무얼 선물해주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 내 가족인걸 보면 참 씁쓸하다. 엄마의 친밀하고 가슴 떨리는 물건을 모르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아...아니다. 안다. 현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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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이는 방금 물어보니 잠잘 때 안고 자는 작은 곰‘ 호돌이’ 라 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