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10월 27일 날씨 흐림 00국민학교 4학년 4반 1번
제목: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어제 혜령이와 유진이 그리고 나, 그다음 혜령이 동생 이렇게 넷이 104번 버스를 타고 국립 중앙 박물관에 도착했다. 나는 여기에 한번 와봐서 기분이 그저 그랬다. 나는 공책을 꺼내 거기 있는 내용과 그림을 그렸다. 다 조사하고 보니 친구들이 없어졌다. 나는 어쩔 줄 몰라 밖으로 나와 아이들을 기다리고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이 길을 계속 걷다가 길을 잃어버렸다. (내가) 경찰서 앞에 서 있으며 들어갈까 말까 결정하지 못하다 그냥 갔다. 육교와 횡단보도를 3번이나 건너 버스 정류장이 나와 서울역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당연히 친구들도 기다렸다. 그러자 서울역이라고 써진 버스를 보고 아저씨에게 서울역 가냐고 물어보고 올라탔다.
서울역에 도착해 횡단보도를 건널 때 유진이를 만났다. 나는 너무 기뻤다.
나는 집에 와 그 이야기를 하지도 않고, 마음(속)에 자신감이 생긴 걸 느꼈다.
'나도 이젠 버스도 다 타고, 전철도 마음 놓고 탈 수 있다'는 것을....
-아멘-
이 날을 기억한다. 처음으로 혼자서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온 날이었다. 어디를 갔다가 그랬는지는 기억이 희미했는데 용산에 있는 국립 중앙 박물관에 갔었구나.. 혜령이와 유진이는 누굴까? 정말 기억이 안 난다. 일기장 속 수많은 친구 이름이 등장하는데 기억나는 친구가 드물다. 정말 3~5명 정도밖에 기억하지 못해 안타깝다. 기록되어 있으면 보는 순간 다 기억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 날 어렵게 두려운 마음으로 버스에 올라타 기사님 옆에 서서 갔던 기억이 난다. 혹시나 서울역에 내리지 못할까 봐 엄청 집중해서 서 있었다. 혼자서 첫 대중교통 이용한 엄청난 날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 얘기하지 않았다니, 지금의 나로서는 놀라운 일이다. 중학교 1학년 때 키가 140cm였으니 이때는 아마 130cm도 안 되는 작은 아이였을 것이다. 엄마에게 자랑도 할 만 한데, 나는 조용히 내 안에 생긴 자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기쁨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뿌듯하고,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온 깊은 안도감도 있었을 것이다. 얼마 전에 혼자서 잠깐 부산을 여행했다. 여러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목적지에 안전하고 정확하게 도착할 때마다 평상시에 잘 느끼지 못했던 안도와 평안을 살포시 느꼈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도 낯선 곳은 낯설고 두렵다. 용산과 서울역은 불과 몇십 분 거리임에도 어린 나는 얼마나 두려웠을까. 그래도 울지 않고 씩씩하게 집에 돌아왔다. 그 두려움을 이겨내었을 때 얼마나 기분이 좋은 지도 알았다.
요즘 내 마음에 두려움은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아직도 낯선 초행길이 내 앞에 무수히 펼쳐져 있다. 매번 그 길 입구에서 익숙한 나의 동네를 뒤돌아본다. 가기 싫다고. 길을 잃을 것 같다고, 내 옆에 동행자가 한 명도 없다고, 아직은 저 길을 걸어 들어가기엔 어리다고, 준비가 안 됐다고 중얼중얼 거리며 서 있다. 길 위에 주인이 없건만 저 길에는 주인이 있는 것만 같다. 저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점점 움츠러들어 공벌레처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온 몸을 꽁꽁 말아버린다. 애당초 그 길을 걸어가고자 했던 마음도 없었던 것처럼.
남들이 대단하다, 잘했다, 수고했다 말해줘도 나는 왜 자신감을 자꾸 잃어버릴까.
저 11살 때 느꼈던 충만한 자신감을 느끼고 싶다.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을 만큼 소중한 저 기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