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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억이응 Nov 17. 2019

아빠와 두 시간을..



1992년 1월 11일 토요일 날씨 맑음 00국민학교 4학년 4반 1번


제목: 아빠와 2시간을..


오늘 아침에 아빠와 엄마께서 다투셨습니다.

나는 그때가 제일 싫습니다.

그때 아빠가 우리 방에 오셔서 함께 놀기도 하고 공부도 했습니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을 때, 아빠가 멋진 자동차를 만드셨습니다.

그렇지만 먼저 아빠와 엄마가 사과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음부터도 아빠와 엄마가 안 싸우셨으면 좋겠다.




언제나 우리가 잠든 밤 두 분이 싸우실 때마다 나는 잠을 못 이루고 날 선 말들을 다 듣곤 했다. 그 옆에 천하태평으로 자고 있는 여동생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이 끔찍한 새벽 밤이 어서 지나가기를 기도했다. 나도 차라리 아무 말도 들리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내 양 옆에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눕는다. 깜깜한 밤 가장 포근한 시간, 큰 아이에게 넌 언제 엄마 아빠가 싫어?라고 물으니 엄마 아빠가 싸울 때,라고 답했다. 작은 애는 벌써 잠이 들었다. 나와 남편의 예민한 구석구석 모두 끌어안은 채 태어난 큰 아이는 가장 복합적인 감정을 일렁이게 한다. 마냥 사랑스럽지 않고, 어딘지 모르게 짠한 마음이 들게 하고, 보듬어 주고 싶다가도, 미치도록 밉기도 하다. 나와 너무 닮아서, 나와는 너무 달라서, 같은 시소 맨 끝에 앉아 있는 아이 같다. 깊은 잠을 잔 경우가 거의 없는 나처럼 큰 애도 자주 새벽에 깬다. 잠귀가 밝은 걸 너머 내 마음의 소리도 듣는 것 같다. 그 애 앞에서 아무리 '척'을 해도 소용없다. 남편과 사이가 안 좋을 때 알아서 자신의 몸을 웅크리고 눈치보는 녀석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즐거워하다 못해 난리를 피울 때 오히려 안심이 된다.  엄마는 아빠를 좋아해?라고 묻는 말에 그럼, 엄마는 아빠 좋아해라고 답해도 아이의 표정은 그대로다.


언젠가 새벽녘 한바탕 썰전이 끝나고 엄마는 온 감정을 쏟아 문을 꽝 닫고 들어갔다. 조용해진 거실, 숨죽여 살짝 문을 열어보니 아빠가 식탁에 앉아 술을 드시면서 울고 계시는 것 같았다. 늘 작고 여린 아빠의 모습을 부풀려 아빠 편을 드는 딸들을 매우 섭섭해하는 엄마에게 또 한 번 미안하지만, 난 아빠가 그때 이후로 어딘가 모르게 짠하곤 했다. 그래서일까 분명 아빠가 엄마보다 큰 키인데도, 엄마가 더 커 보인다.

얼마 전, 아빠와 함께 짜장면을 먹으러 중식당에 갔다.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아빠가 그러셨다.

"너 어릴 때 네 엄마랑 싸웠는데 네가 제발 그만 싸워하면서 엄청 우는 거야..... 그때부터 아빤 엄마가 뭐라 그래도 참고 안 싸운다. "

두 아들은 정신없이 장난치며 탕수육을 먹고 나도 짜장면을 먹으며 이 얘길 듣는데 목이 막혀와 물을 얼른 마셨다. 마흔이 다 되어가는 난 또 울고 말았다. 사실 난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그런 말 할 용기도 없어 방에서 자는 척 숨죽여 있었다고만 생각했었다. 딸이 이렇게 커서 자식 낳고 불혹이 코 앞인데도 어릴 때 울며 속상해하던 어린 딸의 모습이 아직도 또렷하신가 보다.


그 날, 아빠는 아직 잠들지 않아 싸우는 장면을 보고 듣고 했던 자식들이 걱정되어, 아니면 그 어색한 공기를 피해 혼자 있을만한 공간이 없기에 우리에게 왔을지 모른다. 어린 20대에 애 셋을 키우며 고생하는 아내에게 그저 미안할 수밖에 없던 가난한 나의 아빠는 우리 방에 와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며 놀아주었다. 그 마음을 모를 일 없는 큰 딸인 나도 애써 아빠와 신나게 놀고 열심히 문제집을 풀었다.


다음 날 아침 , 엄마 아빠가 한 침대 위에서 밝게 웃으며 잘 잤니?라고 말할 땐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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