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이해하지 못해도, 굳이 하고 싶은 일들
내 혼자 여행의 치트키는 책, 그중에서도 에세이다.
평소에는 에세이를 즐겨 읽진 않는데, 이상하게 여행만 나오면 에세이만큼 잘 읽히고 마음에 잘 들어오는 게 없다. 여행지에서 읽는 에세이는 마음을 더 몰캉하게 만들어준다. 여행지에서의 사색과 인사이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준달까?
타인의 생각이 눌러 담긴 문장들은 마음을 느슨하게 풀어주고, 여행지의 공기와 온도를 내 안으로 들인다.
지난 나트랑에서는 류이치 사카모토의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가 그랬고, 이번 발리에서는 유병욱 카피라이터님의 『인생의 해상도』였다.
이 책을 발리 여행의 시작에서 발견하곤 얼마나 기뻤는지.
해상도 높은 인생이랑 딱 맞는 발리였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분명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 어떻게 저런 매력을 찾아내나 싶은 사람.
같은 책, 같은 음악, 점심시간에 같이 걷다가 본 가로수, 같은 계절에 함께 바라본 같은 창.
그런데 똑같은 그것이 그 사람의 눈을 통과하면 다른 단어들로 바뀌어 몸 밖으로 나오는 것만 같아요.
그 삶을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있을까.
그의 눈에 맺힌 세상의 모습은 말하자면 ‘해상도 높은 삶’이 아닐까.
더 깊고 풍부하고 향이 넘치는 아름답고 눈물겹고 사랑스러운 세계는 다른 어딘가에 있지 않아요.
이미 이곳에 있습니다.
인간의 목표는 풍요롭게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풍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 법정스님
책 첫 장에서 만난 이 문장들이 이번 여행의 주제가 되어버렸다.
발리의 셋째 날, 시장 안 허름한 노상 카페에서 그 문장을 다시 읽었다.
새소리, 닭소리, 물소리가 가득한 시장 안 골목 노상카페에서 이 책을 읽는 데 마음이 너무나도 풍요롭고 행복했다. 닭이 울고, 오토바이가 지나가고, 연못에서는 물이 졸졸 흘렀다.
어수선한데도 그 소리들이 겹겹이 쌓이며 이상할 만큼 평화로웠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얼마나 풍성하게 존재하고 있을까?’ 그 생각을 하던 찰나, 눈에 들어온 단어가 있었다.
바로 ‘굳이’.
내가 본능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인가를 파악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남들이 뭐라고 해도 내가 온갖 어려움을 감수하고 굳이 시간을 들이는 일을 떠올려보는 거예요.
흥미롭게도, 그 ‘굳이’에 당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숨어 있을 겁니다.
책은 말한다. 꼭 필요하지 않아도, 귀찮음을 무릅쓰고 굳이 하는 일 안에 그 사람의 가치가 숨어 있다고.
생각해 보면 내 여행은 늘 그런 굳이로 가득했다.
돈도 없으면서 굳이 혼자 비행기를 탄 것,
아침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요가 수업에 나간 것,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굳이 안 가본 골목을 택한 것,
굳이 모기에 뜯기면서까지 더운 테라스에 나와서 책을 읽은 것.
특히 여행지에서는 유독 이런 굳이 들이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낀다.
나트랑의 새벽 요가, 발리의 타나롯 사원, 그리고 끝내 파도 위에서 몸을 세운 순간까지.
그 모든 건 '안 해도 됐지만, 하고 나니 너무 잘했다’의 연속이었다.
굳이 나만의 방식으로 이 순간에 머물면서 행복하기. 그게 혼자 떠나는 여행의 또 하나의 묘미 아닐까?
발리에서 배운 건 단순했다.
나는 꽤 잘 ‘굳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고 그게 내 삶을 더 해상도 높게 만들어준다는 것.
아마 앞으로도 나는 굳이 무언가를 할 것이다.
굳이 새벽에 글을 쓰고, 굳이 새로운 길을 걸으며,
굳이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하루를 살아내기.
파도 소리처럼, 그 굳이 들이 내 삶을 조금씩 반짝이게 만들 것이란 걸 이젠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