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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럭키걸 Oct 27. 2024

하물며 기계도 사용법이 있는데

나랑 친구 할래?

집에 새로운 블렌더가 생겼다. 식구도 달고 왔다.


그 친구의 이름은 제품 사용 설명서.


이걸 잘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누가 썼는지 설명을 더럽게 못한다. 그래도 있으니 읽어본다. 이 친구랑 빨리 친해지기 위한 지름길이니까.


설명서를 읽다가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물며 기계도 사용법이 있는데 나는 왜 사용법이 없을까?'


내가 언제 뭘 먹어야 행복하고 내가 언제 어딜 가야 행복하고, 내가 어떤 사진을 보면 기분이 좋고, 내가 어떤 순간에 기운이 없고, 내가 다시 기운을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는 막상 떠올리려 하면 잘 기억이 안 났다. 기계랑은 친해지고 싶어서 설명서도 읽으면서 정작 나랑 친해지려는 노력은 하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것도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막상 힘든 상황이 닥치면 희망이고 뭐고 내가 행복했던 모든 순간을 다 잊고 뇌가 마비된 거 같이 그냥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버티기 때문이다. 더 이상 상황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 발견한 '나 사용법'을 생각날 때마다 적어봤다. 벌써 18개나 생겼다.


내 블로그_ 나 사용법

꽤 많다. 이걸 적고 나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윤곽이 조금씩 잡히기 시작했다. 행복마저도 남들이 바라는 방향으로만 가야 할 것 같은 억압에서 벗어나 진짜 나만의 길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막상 적어놓고 심심할 때마다 꺼내서 보니 나를 알아가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나는 왜 이 쉬운 걸 적어두지 않았을까? 항상 나를 사소하게 여기며 뒷전으로 밀어둔 건 아닐까. 지금 당장 따라잡아야 할 커다란 목표에 나를 몰아넣느라 맛있는 걸 먹어도 일을 생각하고 좋은 날이 와도 다음의 성공을 바라보며 지금은 안주할 때가 아니라고 나를 다그치진 않았나?


사업을 하든, 공부를 하든, 결혼을 하든, 일을 하든 나는 나를 가장 잘 알았어야 했다. 남들이 정해놓은 커다란 기준 말고, 추어탕 한 그릇, 평일 마라탕 9900원 점심세트 (꿔바로우도 준답니다), 시장에서 파는 흑임자떡 한 판,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한 잔, 공원에서 자전거 타기, 운동장 맨발 걷기, 도서관 가기 등등 이런 것들을 하면 나는 금방 행복해지는 사람임을 알았어야 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 절망이 나와 친구 하자고 손을 내밀 때 '나 사용법'을 붙잡고 희망이라 우기기로 했다. 나만의 매뉴얼대로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좌절에서 벗어날 거다. 다시는 절망에 속고 싶지 않다.


남이 정한 성공과 부의 개념에 휘둘리고, 남이 말하는 비교에 수년간 실컷 휘둘려보고 몸과 마음이 아프고 나서야 나와 친해지는 연습을 한다는 게 아쉽지만 그 고통 덕분에 지난 1년간 나와 친해지려는 노력을 했다. 앞으로도 쭉 나와 친해지는 연습을 하자. 나 사용법을 적고, 나 사용법을 읽으며 내 마음의 방향을 머릿속에 그려보자. 글이 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준다. 나는 더 이상 거짓 절망에 속지 않겠다. 내가 정한 희망의 길로 나아가겠다.


'럭키걸! 나랑 친구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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