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이 책을 펼쳐 든 이유도 이 서러운 독백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회의실 허공을 가르는 상사의 날 선 한마디, 단체 대화방에 툭 떨어진 무심한 이모티콘, 사랑하는 이가 지친 얼굴로 내뱉은 한숨 섞인 말 한 줄. 남들에게는 찰나일지 모를 그 순간들이, 나의 하루를 통째로 뒤흔들고 무너뜨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세상은 너무 쉽게 훈수를 둔다. “멘탈 좀 키워.” “넌 너무 예민해서 탈이야.”
이런 폭력적인 조언에 노출되다 보면, 결국 의심의 화살은 나 자신에게로 향한다. 남들은 다들 멀쩡히 버티는 링 위에서, 나 혼자만 스텝이 꼬이고 유난을 떠는 ‘유리멘탈’인 것만 같아 자괴감에 빠진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인 격투기에서도 ‘체급’은 존재한다. 헤비급 선수와 플라이급 선수를 한 링에 세우는 야만적인 짓은 하지 않는다. 그것이 불공평하고 위험하다는 것을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정신의 세계로 넘어오면 이 당연한 상식이 사라진다. 키가 작아 농구 센터를 못 하는 건 쉽게 인정하면서도, 멘탈만큼은 누구나 노력하면 무한히 강해질 수 있다고 착각한다. “마음먹기에 달렸다”, “정신력으로 버텨라” 같은 낡은 신화가 우리를 끝없이 채찍질한다.
하지만 최신 뇌과학과 임상심리학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다른 이야기를 건넨다. 정신도 육체와 같은 ‘체력’이며, 멘탈에도 타고난 ‘체급’과 ‘컨디션’이 존재한다고. 아무리 강한 챔피언도 너무 오래, 너무 많이 맞으면 예전처럼 싸울 수 없는 시기가 반드시 찾아온다고 말이다.
우리가 겪는 일상의 고통은 ‘로우킥(Low Kick)’을 닮았다. 로우킥은 단 한 방에 상대를 KO 시키는 화려한 기술이 아니다. 상대의 허벅지 근육을 집요하게, 반복해서 파괴하여 결국 그 다리가 몸을 지탱할 힘조차 잃게 만드는 잔인한 기술이다.
처음 한두 대를 맞을 때는 버틸 만하다. “이 정도쯤이야”, “내가 참으면 되지” 하고 넘긴다. 하지만 라운드가 거듭되고 충격이 근육 깊숙이 켜켜이 쌓이면, 어느 순간 예고도 없이 다리가 툭 꺾이고 몸 전체가 바닥으로 무너져 내린다.
우리의 영혼이 무너지는 과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직장 상사의 은근한 비꼼, “가족끼리 왜 이래?”라는 무례한 요구, 연인의 무심한 비교, 친구들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소비된 순간들.
이것들은 숨통을 끊는 강력한 ‘리버샷’이라기보다, 눈치채기도 전에 영혼의 근육을 파열시키는 ‘로우킥’에 가깝다. 당장은 별것 아닌 생채기 같지만, 조금씩 확실하게 나를 갉아먹는다. 그러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자극 하나에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출근길 지하철 계단에서 다리가 풀리는 날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또다시 자책한다. “겨우 이 정도 일에 무너지다니.” 하지만 당신을 무너뜨린 건 마지막 그 한 방이 아니다. 그 이전에 이미 수없이 누적되어 온, 당신이 모른 척 참아왔던 그 수천 번의 로우킥들이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당신을 위해 쓰였다. 이미 꽤 많이 맞았고, 앞으로도 안 맞을 자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남을 더 세게 때리는 가해자가 되고 싶지는 않은 사람들을 위해.
그래서 우리는 조금 특별한 방식으로 심리학을 이야기하려 한다. 딱딱한 이론서의 권위를 내려놓고, 가장 원초적이고 정직한 종합격투기(MMA)의 언어를 빌려올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의 스트레스는 ‘로우킥’으로,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트라우마는 치명적인 ‘리버샷’으로,
따뜻한 포옹 같지만 빠져나올 수 없는 가스라이팅은 ‘암바(관절기)’로,
영혼을 난도질하는 팩트폭행과 비난은 ‘트래시 토크’로 해석해 본다.
다소 거친 비유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강력한 ‘밈'의 안경을 쓰면, 모호했던 고통의 실체가 선명해진다. “아, 저 사람 지금 나한테 로우킥 날리고 있네?”, “이건 사랑이 아니라 암바를 거는 거였어” 하고 상황을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다. 보이면, 피할 수 있다.
이 책의 목표는 당신을 하루아침에 무적의 파이터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당신이 어떤 링 위에서, 누구와, 어떤 규칙으로 싸우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보여주려는 것이다.
시작부터 돌진하는 사람, 구석에 몰려 방어만 하는 사람, 링 밖으로 도망치려는 사람 등 다양한 관계의 유형을 ‘파이팅 스타일’로 분석해 볼 것이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나는 어떤 자세를 반복하고 있는지, 그것을 또렷하게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숨통은 한결 트인다.
반대로, 이 책이 절대 하지 않을 약속도 미리 밝혀둔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식의 폭력적인 긍정론이나, 고통받는 당신의 ‘노력 부족’을 탓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한 권의 책으로 인생이 뒤바뀐다는 과장된 기적 또한 약속하지 않는다.
우리가 함께 시도할 일은 훨씬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어디서, 어떻게, 왜 맞고 있는지 냉정하게 분석하고 전략을 세우는 것. 어디까지는 맞서 싸울지(Fight), 어디부터는 가드를 올리고 방어할지(Guard), 그리고 어떤 순간에는 아예 링 밖으로 걸어 나갈지를 결정하는 것.
때로는 전략적인 ‘도망’이 가장 훌륭한 카운터 펀치가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아마 여기까지 읽은 당신은 이미 충분히 많이 버텨온 사람일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참고 또 참다가, 더 이상은 한계라는 느낌에 이 문장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히 말해줄 수 있다.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강한 파이터다. 다만 그동안 가드 없이 너무 많은 로우킥을 허용했을 뿐이다.
이제는 덜 아프게 맞는 법, 그리고 나를 지키며 싸우는 법을 익힐 차례다. 준비됐는가? 이제 링 위로 올라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