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적 공유지의 비극 - 사회적 태만 - 공유지의 희극
곰배령! 남설악 점봉산 남쪽 해발 1천100m 고지 능선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대의 야생화 성지이자, 하나밖에 없는 원시림 지역입니다. 곰이 하늘을 향해 벌렁 누워있다고 곰배령이라 합니다. 고개마다 졸방제비꽃, 나도양지꽃 등 약 850종의 야생화가 자생하고 있고, 숲은 분비나무, 전나무, 주목 등으로 울창함을 자랑합니다. ‘천상의 화원’이란 애칭을 얻었습니다.
곰배령은 '공유지의 비극'(Tradgy of the Commons)을 이겨낸 사례입니다. 어쩌면 ‘공유지의 희극’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요. 공유지의 비극은 주인 없는 자산은 결국 망가지고 만다는 경제학 이론입니다. 곰배령이 천상의 화원으로 탈바꿈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생태보전을 위해 1987년부터 입산을 통제했기 때문입니다. 사람 손이 타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말이지요. 등산로와 생태계 회복을 위해 자연휴식년제를 수행하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곰배령은 22년 만인 지난 2010년 다시 개방되었습니다. 탐방 인원을 매일 450명으로 제한하고 있지만,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 애호가, 사진가들이 끊이지 않고 찾고 있습니다. 신대철 시인은 시집 『곰배령 넘어 그대에게 간다』에서 노래합니다.
마타리, 어수리, 궁궁이 / 그 뒤쪽 어딘가 자취 없이 흔들리던 꽃 // 그 꽃에 홀려 나는 / 곰배령 넘어 그대에게 간다 「곰배령 넘어 – 무슨 꽃」에서
공유지의 비극은 주변에서 흔히 보실 수 있습니다. 과거 마을 숲이 땔감을 구하느라 민둥산이 되거나, 주차료가 공짜인 아파트와 골목 주차장에 늘 차가 넘쳐나는 현상과 같은 거지요. 안전을 위해 비치해 두었던 따릉이 자전거 헬멧의 운명은 어찌 되었습니까? 며칠 지나니 하나도 남지 않았지요. 그 곰배령에서도 SNA에 올릴 사진을 찍겠다고 희귀 식물을 밟고, 꺾거나 몰래 캐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고 합니다. 비극은 재현될까요?
비극은 '나 하나쯤이야' 하는 이기적 개인주의 심리에서 출발합니다. 공동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맨더빌의 「벌꿀의 우화」에서와 같이 이기심 때문에 우리가 먹고산다고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만, 주인 없는 공유자원은 으레 남용(overuse)되기 마련입니다. 결과적으로 자원 고갈, 외부비용 발생 등의 비극이 발생하는 거지요.
비슷한 개념으로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이 있습니다. 빨강 신호등에서 한 사람이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하면 우르르 따라 건넌다거나, 깨끗한 골목에 담배꽁초 하나가 버려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담배꽁초로 수북 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금이 간 유리창은 빨리 바꿔줘야 깨짐이 번지는 걸 방지할 수 있습니다. 좋지 않은 현상은 더 쉽고 빨리 전파되니까요.
회사에서 '공유지의 비극'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쉬운 예로 회식 자리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다 먹지 못할 만큼 주문한 삼겹살은 타들어 가고, 비우지 못한 술병들이 여기저기 나뒹굽니다. 비극의 범인은 바로 법인카드란 공유 자산입니다. 보다 못한 어느 회사가 회식비를 월급에 반영해 줬더니, 모임이 사라져 버려 조직력은 느슨해지고, 개인 문화가 활개 치는 바람에 원상복구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습니다.
'사회적 태만(social loafing)‘도 일종의 ‘심리적 공유지의 비극’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조직에서 혼자 일할 때 보다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일할 때 상대적으로 적게 노력하는 현상을 말하지요. 극단적인 사람을 무임승차자라 부르는데, 같이 일하다 "나만 열심히 일하는 거 아냐?" 하는 의심 한 번쯤 해 보셨을 겁니다. 올해 성과급을 최대한 챙겨 공유자산인 미래의 이익을 갉아먹는 행동도, 연금 개혁을 미루며 청년 세대의 미래를 희생시키는 행위도 마찬가지겠지요.
하나 더, 혹시 ‘공유지의 희극’은 들어보셨는지요? 1986년 예일대 캐럴 로즈 교수가 처음 사용했다고 합니다. 조직과 사회의 공유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보다 가치를 높이는 경우를 말합니다. 인터넷이란 공유자원을 활용한 위키백과, 우버와 에어비앤비와 같은 최근 공유기업의 등장을 그 사례로 들고 있습니다. 회사 내에서 지식과 경험의 공유를 통해 생산성을 향상하는 일도, 얼마 전 소개된 교회가 제공한 자투리땅을 지방자치단체가 시민공원으로 활용한 것도 즐거운 드라마겠지요.
공유지의 비극 혹은 사회적 태만 현상은 글로벌 기후변화 대응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모든 나라가 ‘2050 탄소 중립(Net Zero by 2050)’을 외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개발도상국 처지에서 보면 선진국들은 정작 배출할 만큼 배출하고서는 개발도상국들의 팔을 비틀고 있는 거지요. 목초지의 풀을 먼저 뜯어먹어 버린 양들이, 사다리를 걷어차는 격입니다. 선진국들도 서로 눈치만 보고 있습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먼저 방울을 걸까요? 2005년 런던 기후변화 정상회의에서 영국의 토니 블레어 총리의 연설을 보시지요. 또 한 번 공유지의 비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기후변화의 정치학에 대한 불편한 진실은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 어떤 나라도 자국의 경제를 희생하려고 하지 않으려는데 있습니다.
The blunt truth about the politics of climate change is that no country will want to sacrifice its economy in order to meet this challen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