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옥 Feb 01. 2022

11. 구겨진 뇌를 펴는 작업

 엄마가 뇌출혈이란 병을 얻게 되면서 나는 여태까지 몰라왔던 세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석션, 콧줄 식사, 연하 치료 등등의 단어는 30년 동안 살아온 나의 생활 반경 내에서는 접하지 못했던 단어들이다.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평범할 수 있는 용어들이 나에겐 너무나도 낯설었다. ‘작업 치료(Occupational Therapy)’란 단어도 처음 들었을 때 단번에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작업’이란 단어는 보통 어떠한 일을 수행할 때 자주 쓰이는 단어라 ‘치료’란 단어와 결합했을 때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나에게 와닿지 않았다. 알고 보니 작업 치료에서 쓰이는 ‘작업’이란 단어의 의미는 흔히 알고 있는 뜻과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하는 모든 활동들을 의미했다.


 작업, 즉 일상생활의 활동들을 치료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육체적, 인지적, 심리·사회적문제를 다루며, 가정과 학교, 직장, 지역 사회 등의 환경과 역할에 참여하도록 돕는다. (출처:서울대학교병원 의학 정보-작업치료 정의)


 환자들에 따라 현재 일상생활 동작을 수행 가능한 정도가 다르기에 치료실에서 환자들이 하는 치료 활동도 각기 달랐다. 엄마는 환측 손과 팔의 움직임이 거의 없어서 치료사 선생님이 움직여주는 관절 운동에 수동적으로 참여했다. 엄마는 통증 때문인지 선생님이 조금만 팔을 움직여도 미간을 최대한 찌푸리며 치료사 선생님의 손을 밀어내거나 뿌리쳤다. 나는 연하 치료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작업 치료실에서도 엄마 옆에 서서 엄마의 왼손을 잡고 있는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어떤 환자는 환측 손과 팔에 움직임이 있어서 아치형으로 생긴 막대에 고리를 끼워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고리를 옮기는 훈련도 하고 있었다. 엄마는 환측 손만 건드려도 아파하는데 환측 손과 팔을 쓰고 있는 환자분을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엄마의 컨디션과 환자분의 컨디션을 비교하게 됐다. 치료사, 의사 선생님들이 뇌 질환의 경우 환자마다 다친 부위도 다르고 회복하는 속도나 정도가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다른 환자와의 비교는 의미가 없다는 설명을 했지만, 치료실에 가면 나도 모르게 나는 엄마를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며 부러워하고 있었다.


 관절 운동이 끝나면 엄마는 건측 손인 왼손으로 여러 가지 치료 활동에 참여했다. 6 피스 직소 퍼즐 맞추기, 숫자 쓰기, 페그 보드에 페그 끼우기, 젓가락으로 물건 집어 옮기기 등 선생님이 날마다 다른 활동을 준비해 왔다.


 엄마는 처음 작업 치료를 시작했을 무렵 1부터 10까지의 숫자 카드를 순서대로 배열하는 것도 힘들어했다. 적잖은 충격을 받은 나는 병실에서 유튜브로 아기들을 위한 1부터 100까지 수 세기 동영상을 저녁마다 엄마에게 틀어 드렸다. 엄마가 지루해하거나 싫어하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엄마는 동영상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엄마가 동영상을 보고 나서는 내가 1부터 10까지의 숫자 카드를 순서대로 엄마에게 보여주며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 천천히 또박또박 하나씩 소리 내 읽어 주었다. 처음엔 1부터 3까지의 카드만 나열하는 것을 하다가 숫자의 개수를 2개씩 늘려갔다. 처음부터 숫자 카드 열 장을 다 주고 나열하게 하면 엄마가 나랑 카드 배열하는 공부를 아예 포기할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2주쯤 지난 어느 날 엄마는 나의 도움이 없이도 1부터 10까지 순서대로 숫자를 배열하는 것에 성공했다. 엄마에게 축하한다고 말을 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올렸더니 엄마는 나를 쳐다보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음 날 작업 치료실에서 선생님이 엄마의 팔 관절을 풀어주는 동안 나는 기쁜 마음으로 선생님에게 엄마의 수 카드 배열 성공기를 들려주었다. 선생님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듯이 열심히 공부한 엄마를 칭찬했다.


“김지혜 님, 병실에서도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실 줄은 몰랐어요. 따님이랑 같이 숫자 공부하신 거 오늘 저한테도 한 번 보여주세요!”


 선생님은 관절 운동을 마친 후 달력 교구를 엄마에게 가져왔다.


“오늘은 5월 달력을 완성해 볼 거예요. 5월 1일은 토요일이니까 여기에 숫자 1이 놓이면 되겠죠? 그럼 나머지 숫자들을 어머님이 하나씩 채워서 5월 달력을 만들어봅시다. 따님이랑 공부하셨던 것 잘 떠올리면서 천천히 한 번 해보세요.”


치료실에서 보았던 교구와는 다르지만 형태는 유사한 달력 교구


 무려 1부터 31까지의 수를 차례대로 나열해야 하는 엄마의 과제를 마주한 나는 당황했다. 그래도 동영상으로 엄마가 1부터 100까지의 수를 눈으로 여러 번 익히기는 해서 이 과제를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내심 하고 있었다. 엄마가 천천히 숫자 교구를 하나씩 신중하게 옮기며 달력을 완성해 나가는 모습을 보는데, 문득 작년에 내가 2학년인 우리 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했던 공개 수업이 떠올랐다. 수업 목표는 달력을 살펴보고, 1주일과 1년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수업 내 활동 중 달력 학습지에 특정 요일이나 날짜에 동그라미 스티커를 붙이는 활동이 있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학생들이 열심히 참여해서 좋은 기억으로 남았던 수업이다.


 순간 그때의 수업 장면이 떠오르면서 우리 반 학생들이 집중하던 모습과 엄마가 치료 받는 모습이 중첩되어 마음이 울컥했다. 내가 아홉 살인 학생들에게 가르치던 내용을 60년이 넘는 세월을 살아낸 우리 엄마에게 가르쳐 드려야 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달력을 주제로 한 공개수업 전 날 교실의 칠판


 엄마는 꽤 긴 시간 동안 집중하여 치료 시간이 끝날 때쯤 1일부터 15일까지의 숫자를 차례대로 배열했다. 완벽한 달력을 완성하진 못했지만 내가 아닌 선생님 앞에서도 숫자 배열 하기에 성공한 엄마가 자랑스러웠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내 모습을 선생님이 보았는지 달력 교구를 정리하며 선생님이 나한테 말했다.


“뇌를 A4 용지에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어머님 뇌는 지금 많이 구겨져 있는 A4 용지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이 구겨진 종이를 조금씩 펴는 게 재활이란 과정이라고 볼 수 있고요. 우리 입장에서 숫자를 차례대로 배열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뇌가 구겨져 있는 어머님께는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뇌를 다치신 환자분들은 무언가에 집중하는 것 자체도 힘든 일인데 오늘 치료 시간에 어머님을 보니 처음에 뵈었을 때보다 집중력이 훨씬 향상되었어요.”


 ‘구겨진’ 종이에 뇌를 빗대어 표현한 선생님의 말씀을 곱씹으며 작업 치료실에서 나왔다. 엄마의 뇌도 시간이 지나 구김이 펴진다면 행복했던 과거의 날들이 엄마의 기억 속에 다시 자리할 수 있기를, 그 기억의 파편 중 내가 차지하는 부분이 크기를 바랐다.









(이미지 출처 : 지마켓 TF Mall 기타교구 달력)


 글부터 보기

이전 10화 10. 뺨을 맞아도 삼킴 연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