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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노신 Jan 24. 2021

요리라고 쓰고 설거지라고 읽는다

설거지로 완성하는 자취 요리의 품격

'오늘은 또 뭘 먹나..'


해설 1. 이것은 자취생의 아침을 깨우는 질문입니다.


'채소랑 소스가 남아있으니까 대충 파스타나 해 먹자.'


해설 2. 시판 소스만 있으면 자취생에게 파스타는 라면만큼이나 간단한 요리일 수 있습니다.


면 끓이고, 익은 면에 소스를 넣어 볶다가 냉장고에 남은 부가 재료를 있는 대로 넣는다.

오늘은 먹다 남은 토마토를 넣어 봤다.

이렇게 요리가 완성되면 프라이팬을 잡고 잠시 고민한다.


'그냥 먹을까. 접시에 담을까.'


해설 3. 이건 단순한 취향 문제가 아닙니다. 자취생에게 이것은, '설거지를 줄일 것이냐, 아니면 좀 더 인간적인 식사를 할 것이냐' 사이의 실존적인 선택입니다.




사실 나는 요리를 좋아한다. 어렸을 땐 요리 프로를 틀어주면 울음을 멈췄다고 한다.

레시피만 있으면 웬만한 요리는 얼추 맛을 낼 수 있고, 가끔 요리를 하다 보면 먼지 묻은 마음이 닦이는 것 같고 스트레스가 풀리니 분명 요리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요리를 취미로 하는 것과 살기 위한 일로서 수행하는 것은 다르다.


자취를 처음 시작했을 무렵만 해도 기숙사에 사는 동안 발산하지 못했던 '요리욕'을 풀고자 이것저것 일을 벌였다.

마트에서 물러가는 딸기를 반값에 사다가 딸기청을 담그고, 전골냄비를 사 밀푀유 나베에 도전하고, 각종 허브를 구비해 한식과 양식할 것 없이 끼얹으며 새로운 맛을 개척했다.

집들이랍시고 동아리 사람들을 초대해서 10인분 요리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아, 무언가에 대해서 열정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좋은가. 그것은 도저히 의지로 해낼 수 없는 일을 하게 한다.

그러니 지금 내가 '대충' 먹을 끼니조차 마련하기가 싫은 것은 힘이 없어서가 아니다. 열정이 없어졌기 때문이지.


열정의 소멸은 어디에서 오는가.

열정의 대상이 일상이 될 때이다.


요리가 나에게 이벤트와 같았던 짧은 시기를 지나 일상이 되자, 나는 그것을 일로 느끼게 되었다.

특히 '요리'라는 일은 시간과 정성이 많이 드는 일임에도 식사 자체는 허무할 정도로 금방, 쉽게 끝난다. 남는 것은 빈 접시(설거지거리)와 요리를 하느라 쓴 조리도구들(설거지거리 2,3,4,...)이다.


그러다 보니 몸이 지치거나 마음에 여유가 없을 때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것도 요리이다.

청소나 빨래는 내가 하지 않으면 대안이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지만, 음식은 얼마든지 사 먹을 수가 있다.

취사가 불가능한 기숙사에서 4년 넘게 살면서 '이런 영혼 없는 음식, 다시는 먹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던 간편식을 여전히 찬장에 구비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직접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주방을 가진 지금, 그 간편식들이 더 고맙고 소중하다.


요리를 하더라도 예전처럼 새로운 음식을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손 닿는 곳에 있는 재료로 만들기 편한 생활 밀착형 요리를 한다.

시판 소스를 넣은 파스타, 굴소스로 맛을 내는 볶음밥, 김치를 넣고 끓이기만 한 김치찌개...

그리고 요리를 마친 후 고민에 당면한다.

'냄비(혹은 프라이팬) 채로 먹을까? 그릇에 담을까.'


그리고 나는 이런 상황에서 종종 그릇에 담는 편을 선택한다.


요리에 열정이 있었던 시기의 사진입니다.


'왜'냐고 물으면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냄비 혹은 프라이팬 채로 요리를 먹는 것이 어쩐지 혼자 하는 식사에 서글픔을 더하는 것 같아서다.

그릇에 옮겨 담는 순간 필연적으로 설거지거리가 두, 세 가지 증식하지만 그릇에 요리를 정갈하게 담고 그걸 눈으로 보는 것이 나를 덜 외롭게 한다.

혼자 사는 생활에서 설거지보다 치우기 어려운 게 외로움이다.




박완서 작가의 <아주 오래된 농담>에는 집밥에 관한 인상적인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현금'이 전남편과 사랑 없는 결혼생활에서 결코 자신들을 위한 요리를 하지 않다가, 혼자 살면서 손수 밥을 해 먹게 되는 이야기. (정확하진 않지만) "그렇게 차려진 밥상을 대접받고 자랐다는 의식이 나로 하여금 혼자 먹는 식사임에도 정갈한 식탁을 차리게 했다"는 서술이 있었다.

혼자 먹는 밥상을 차릴 때 종종 그 대목이 떠오른다.

우리의 일상을 지키는 건 때로 이런 쓸모없어 보이는 양식, 그로써 일상의 한 순간을 잠깐 위로하고 지나가는 품위이니까.


삶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이다.

그렇기에 행위와 시간의 격차를 두고 오는 결과까지 피할 수 없이 받아야만 한다.

편리함을 추구하면 그다음에는 허무감과 외로움이 따라오는 게 나라는 사람의 특성임을 알아서, 나는 조금 귀찮아도 허무와 외로움을 줄이는 편을 택한다.

내 삶을 돌볼 책임이 나에게 있으니까.


조금 귀찮더라도 직접 밥을 해 먹으면 헛헛함이 덜하다. 예쁘게 차려 먹으면 더 그렇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귀찮은 설거지를 만들어 냈다.

몸은 앓는 소리를 내지만 마음이 선호하는 일이다.

마음이 좋으면 나도 좋아서, 비누거품을 튀겨가며 싱크대 앞에 조금 더 오래 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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