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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노신 Jan 30. 2021

사는 게 일이었다

흐릿한 유년의 기억 속 떠오르는 한 장면이 있다.

엄마가 잠시 어디를 다녀오는 동안 혼자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는데, 이후에 경비실 근처 개수대에 쭈그리고 앉아 무언가를 씻다가 엄마에게 발견됐다.

"뭐해? 혼자서 이거 사 먹은 거야?"

"아니, 이거 내가 그네 밑에서 주웠어! 씻어서 가질 거야!"

그건 반짝이는 하트가 그려진 부라*콘 껍데기였다.

나는 엄마손을 잡고 나머지 한 손엔 아이스크림 껍데기를 쥔 채 흐뭇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창가에 올려두고 말린 뒤 하트 모양을 따라 오려서 서랍에 소중히 넣어두었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의 단상인 셈이다.

'예쁜 쓰레기 수집가'로 자라나는 사람에 대한.


아이스크림보다 매력적인 아이스크림 껍데기




위의 이야기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나는 쓸데없는 것을 잘 모으는 사람이다.

그저 예쁘다는 이유로 구입하고, 내 공간에 가져다 놓기를 좋아한다.

소비는 나에게 즐거운 행위였다. 구경하고, 만져보고, 내 방에 놓인 모습을 상상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포장해 집까지 가져온다. 일련의 행위는 놀이나 다름없었다.

내 소비 목록은 주로 책, 공연이나 전시 티켓, 꽃, 차, 장식품, 편지지, 옷과 같은 기호 용품들이 차지했다.


기숙사 시절 나의 방. 그리고 방에서 방으로 이사를 하던 모습.


그런 내가 자취를 시작한 이후로 앞서 나열한 품목들에 돈을 거의 쓰지 않기 시작했다.


기숙사에 살 때는 휴지가 항상 화장실과 휴게실에 비치되어 있었고, 물은 정수기에서 마실 수 있었다.

쓰레기봉투와 음쓰 봉투, 쌀과 라면도 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이런 것들을 구비해 둘 필요와 책임이 있다.

자연스레 생활에 밀접한 물건들이 소비의 주된 품목이 되었다.


이렇게 소비의 '우선순위'에 해당하는 물건들을 사고 나면 취미를 위해 소비를 할 돈이 별로 남지 않는다. 남더라도 앞으로의 생활을 위해 비축하는 게 낫다.

월세와 관리비, 생필품을 위한 지출 만으로도 나의 가계부는 빼곡히 채워진다.


소비가 마냥 즐거운 일이었던 시기와 비교할 때 요즘의 나에겐 사는 게 일이다.

생필품의 재고를 파악하고 떨어지지 않게 구입해 두는 게 가사의 일종인 걸 몰랐다.


생각해보면 내가 자라는 동안에도 휴지는 찬장에서 혼자서 증식하지 않았고, 마실 물이 수도꼭지를 틀면 그냥 나오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재화들이 내가 이용할 수 있는 곳에 구비된 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했다.

이틀에 한번 꼴로 슈퍼에 가서 장을 봐오던 엄마의 모습이 뒤늦게 생각났다.

엄마를 따라 장을 보러 가면 세일하는 세제를 크게 두통, 샴푸도 묶음으로 4개씩 사곤 했다.

'왜 이렇게 많이 사는 거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런 것들을 구비하는 게 내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생필품이 가정 내에서 소비되는 속도를 알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요즘 나의 소비는 (여전히 즐겁기는 하지만) 조금 더 책임이 따르는 일이 되었다. 나름의 기준을 갖고 비교를 통해 생필품을 사고, 장을 보고, 예산에 맞춰 돈을 쓴다. 

이번 주에도 나는 마트에 갔었고 5만 원어치 장을 봤다. 품목은 쌀, 대파, 계란, 찌개용 돼지고기, 딸기잼, 모닝빵, 커피, 물티슈 같은 것들이다. 이렇게 자잘한 것만 사도 예산은 금세 채워진다.

'시간 남으면 2층(인테리어, 잡화 코너)도 구경해야지'라던 생각은 사라졌다.


지금 나의 공간은 예전보다 간결하다. 물건의 가짓수를 많이 줄였고, 쓸모없는 것들은 잘 사지 않는다.

그런 내가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 품목 세 가지는 차, 꽃, 책이다.


나는 차 마시는 게 좋다. 잠깐이지만 차가 우러나는 걸 지켜보고 향과 맛을 음미하는 게 좋다.

여러 종류의 차를 구비해놓고 손님이 왔을 때 티박스를 열어 차를 고르게 해 주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또 꽃을 사봤자 시들기 마련인 걸 알지만 한 달에 한번 정도는 꽃을 산다. 화병에 꽂아두고 시드는 걸 지켜보고, 시든 꽃을 또 한참 본다.

마지막으로 책을 산다. 책을 사서 읽는 게 경제적이지 않고 공간도 많이 차지한다는 생각에 전자책이나 도서관을 이용하던 시기가 있지만, 결국 다시 책을 사게 되었다.

손에 잡히고 눈에 띄는 책의 물성이 좋다. 생각이 나면 다시 펼쳐보기도 하고, 잠이 오지 않을 땐 책장 앞에서 책등에 가만히 손을 얹어 보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일이 낭비 혹은 사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여전히 부분적으로는 비효율적인 소비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 것을 알기에, 나의 몸과 영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시행착오 끝에 정착된 나의 기준이다.

생활은 결국 나를 둘러싼 물건들과의 협동으로 완성되는 합주이다.

그러니 공간과 사물을 정성으로 대하고 그들을 있게 하는 자원(시간, 돈, 에너지)도 소중히 다루어야겠다.


사는 건 일이다. 꽤 즐거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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