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쓰레기의 존재감에 대하여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지금 쓰레기통을 한번 열어보라.
쓰레기는 당신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말해준다.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매번 진중한 고민을 거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쓰레기를 무심코 버린다. 하지만 무엇을 버렸고, 어떻게 버렸는지를 통해 그 사람의 성격, 소비, 생활 습관을 알 수 있으며 때로 아주 내밀한 개인적 특성까지 알게 된다.
쓰레기는 누군가의 일상에 대한 Log나 다름없다. 생각하다보면 이런 쓰레기를 지금까지 어떠한 보안도 거치지 않은 채 길거리에 무방비로 내놓았다는 게 조금 섬뜩할 정도다.
대학시절 교수님의 추천으로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을 읽었다. '쓰레기'라는 다소 강한 어조의 말에서 시작해 문명과 일상을 깊숙이 들여다보는 학자의 시선을 따라가며 여러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삶=쓰레기'라는 책의 주장에 통감하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년이 지나 내가 자취를 하게 되면서였다.
집에서 하는 모든 가사노동은 결국 '쓰레기'로 끝났다.
요리를 하면 벗겨낸 재료의 포장지와 잘라낸 식재료 귀퉁이가 생기고, 청소를 하면 주워모은 먼지와 그 먼지를 닦은 휴지가 생긴다. 하물며 내 몸의 일부였던 손톱이며 머리카락조차 몸에서 떨어지고 나면 쓰레기가 된다.
집에서 하는 모든 활동의 결과로 무언가는 계속 생겨나고 그 무언가를 통칭 '쓰레기'라 부른다. 그 쓰레기를 분류하고, 보관하고, 정해진 곳에 합법적으로 배출하는 것이 가사노동의 끝이다. 물론 버리자마자 다시 쓰레기는 생겨나고 가사노동의 바퀴가 계속 굴러간다.
직접 하기 전까지는 '쓰레기'를 관리하는 것이 이토록 빈번한 노동일 줄 몰랐다.
대학 기숙사에 사는 동안에 내가 관리해야 할 것은 책상 밑에 놓인 아담한 크기의 개인 쓰레기통 하나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의 쓰레기 배출 시스템은 기숙사생들은 자각하지 못했던 커다란 편의였다.
개인 쓰레기통에 모은 쓰레기를 복도에 있는 큰 대형 쓰레기통에 가져다 붓기만 하면 되었다. 분리수거조차 환경 관리직 직원분들이 해 주었다. 단지 음식물 쓰레기만 기숙사 1층 앞마당에 따로 배출하면 되었다. 나에게 주어진 시스템의 편의를 아무런 의문 없이 누렸다.
지금은 쓰레기를 버리기 위한 준비, 즉 쓰레기봉투를 사는 것부터가 나의 일이다. 종량제 봉투를 10장 단위로 구비해 두고 쓰면서 떨어지지 않도록 한다. 하루라도 쓰레기봉투 없이 지낸다는 건 고역이니까.
가득 찬 쓰레기봉투는 쓰레기통에서 꺼내어 묶은 뒤 정해진 요일과 시간에 맞춰 내놓고, 일반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릴 수 없는 것들은 종류별로 분리 배출한다. 나는 주로 월요일 밤에 일주일 치 쓰레기(일반, 분리수거, 음식물)를 한꺼번에 버리곤 한다. 이따금 쓰레기 양이 많아서 주기가 짧아질 때도 있다.
혼자 하는 살림에서 이렇게 많은 쓰레기가 끊임없이 만들어진다는 게 놀랍지만, 그러면서도 이 쓰레기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골똘히 생각해 본 적은 많지 않다. 그저 이따금 분리수거를 하면서 그 사사로운 생활의 부산물들에 깃든 사는 일의 노고를 곱씹었다.
그런데 얼마 전, 수도권 쓰레기 매립지를 둘러싼 이슈가 터져 나오며 쓰레기에 대해 문득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배출한 수많은 쓰레기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어딘가로 옮겨졌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땅 위에서 땅 속으로 옮겨지며 그곳에서 무無로 돌아가기 위한 기다림을 시작한다. 짧게는 2~4주(휴지)에서 길게는 1000년 이상(일회용 수저)이 걸린다.
살아가는 건 쓰레기를 만드는 일이다. 나의 전 생애가 지나도 소화되지 않을 쓰레기를.
지금 당장 내 집 안에서 밀어낸 덕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가 디디고 있는 땅 위에 놓인 쓰레기의 존재감을 느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쓰레기를 우리가 규정한 '공간' 바깥에 두고 싶어 하나, 쓰레기가 있는 공간을 벗어나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곳은 죽음뿐이다.
쓰레기의 정체는 좀 전까지 우리 삶이었던 어떤 것이다. 그러니 쓰레기를 줄이려는 노력은 곧 삶을 아끼려는 노력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