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나눈다는 것
지금도 ‘주말’하면 떠오르는 풍경은, 큰 솥에 가족들의 수건과 속옷이 삶아지고 있는 모습이다.
끓는 물에서 피어오르는 증기와 섬유의 포근한 냄새, 가루 세제의 향까지 더해져 ‘집’이라는 공간의 고유한 향기를 빚어내었다. 보글보글 소리와 집 안을 채운 습한 공기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우리 집의 여성인 엄마와 나, 동생은 여러 옷을 구분 없이 함께 입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거실 서랍장까지 종종걸음으로 가서 야무지게 개킨 내의를 꺼내 입으면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 서랍에 든 흰 내의들에는 네 것 내 것이 따로 없었다.
그밖에도 무늬가 없는 티셔츠, 츄리닝, 카디건 등을 공유했고 서로의 옷을 종종 입었다. 수건도 함께 썼다.
대학 기숙사에 살면서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빤 옷을 나만 입는 경험을 했다.
집에서 살 때는 같은 옷을 내가 입었다가 또 동생이 입었다가, 엄마가 입기도 했으므로 주인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이제 옷은 나에게만 할당된, 내가 세탁하고 내가 소모하는 것이 되었다. 가족들의 것과 구분 없이 한 데 엉켜 비눗물을 맞던 옷가지들은 이제 혼자서 세탁기를 헐렁하게 돌아다녔다.
내가 입었던 것을 나 아닌 사람이 입는 것, 그리고 서로가 입었던 것을 같은 물에 담가 세탁한다는 것은 가정에서 매우 일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가족이 아닌 타인을 그러한 행위 안에 대입해보면 그것이 얼마나 깊은 유대감을 전제로 하는 일인지 즉각 이해가 가능하다.
기숙사에 살면서, 아무리 급하더라도 룸메이트와 세탁기를 공유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내 세탁물과 룸메이트의 세탁물을 한 번에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나눈 것이 무엇인지 뜻밖에 실감하는 순간들이 있다.
특히 가깝고 친밀하다고 느낀 타인과의 관계에서, 넘어갈 수 없는 벽을 발견했을 때 그렇다. 때로 가족보다 내 마음을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던 친구와 나눌 수 없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가족과는 일상적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가족은 내가 세상에서 처음 만난 타인이다. 생활의 내밀한 요소들-밥을 먹고, 잠을 자고, 무언가를 씻고 헹구던 행위 속에서 딱 잘라 구분할 수 없게 서로에게 섞여 든 것에 대해 생각한다.
우리는 타인과 여러 가지를 나누며 유대를 형성할 수 있지만, 생활을 나눈다는 것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유대임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