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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어쩌다 관장-스핀오프 1

- 어쩌다, 동 대표 : 어디선가 나를 향한 개소리가 들리고...

by 은작 Mar 23. 2025

 

봄의 첫날,

나는 줄곧 가을의

끝을 생각하네

- 바쇼 (하이쿠) -







  *

  나의 동 대표 임기가 약 2달 남았다. 이는 마을 관장직 시작이 그만큼 남았다는 뜻이다.  끝과 시작이 연결되어 있다. 함께 흐른다.

  처음 이 연재를 무작정 시작했을 때는 정말, '마을 도서관 관장'이라는 직책이 너무 무거워, 가벼워지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말 그대로 '출구전략'이었다. 역시, 글에는 힘이 있다. 끝과 시작의 매듭에 서 있는 지금, 나는 매일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다.  


  절기 상, 본격적인 봄의 시작은 '우수'다. 눈이 녹고 비가 오며 봄이 흐른다. 그러나 아직 공기에는 겨울이 머문다. 바람이 차다. 나는 봄의 첫날, 가을의 끝을 생각하는 바쇼의 하이쿠 같은 마음을 닮고 싶다. 다 잘 지나갈 거라고, 아니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 스스로를 토닥이고 싶다. 그러기 위해 [어쩌다 관장-스핀오프] 편으로 그동안 마을에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을 써보려 한다.

  그 첫 번째 편이 [어쩌다, 동 대표]다.   


  

  *

  (띵동)

  "누구세요?"

  "아.... 저는.... 동.... 대표...입니다...."


  코로나가 한창인 시절이었다.  저녁 7시 30분. 종이를 들고 가가호호 방문했다. 왜? 나는 동 대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타인에게 이유 없이 뭘 부탁하는 게 참 힘든 사람이다. 내가 제일 이해 안 갔던 프로그램도 '한 끼 줍쇼'였다. 아니, 아무리 스타라도 왜 갑자기 문을 두드려서 밥을 막 달라고 해.


  그러나 나는 동 대표다. 그래서 남의 집 문을 두드리고 동의서에 사인을 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그날 나는 머리를 안 감아, 하루 종일 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런데 마스크에 모자까지 쓴 여자가 저녁시간에 벨을 누른다? 상상만 해도 수상하다. 나는 남편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 많이 떡졌나? 묻는데 남편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뺐다. 행동과 달리 말은 어두워서 괜찮을 것 같다고 했다. 오랫동안 나와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동안 낮아진 위생관념 덕분인 것 같았다. 행동이나 표정을 봐서는 떡이 안 졌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괜찮다는 말이었다.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마스크를 벗을 수는 없었으니, 모자라도 벗어야 했다. 아예 문도 안 열어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그냥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이었다. 헤어젤로 보이길 바라면서.


  *

  동 대표도, 역시나 '어쩌다' 되었다. 나는 약 10년 전, 이맘때. 그러니까 절기상 '우수'가 시작되는 날, 산 좋고 조용한 이 마을로 이사 왔다. 서울 가는 버스가 30분에 한 대 있고, 마을버스가 종점인 곳. 산 위에 우뚝 아파트 하나만 서 있는 곳이다(우리 아파트는 우리 주소지 동의 대장 아파트다. 왜? 동에서 아파트가 여기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논밭류(?)다). 이런 시골스러운 환경은 공동육아 어린이집이 들어서기에 최적이다. 그렇다. 나는 마을 입구에 있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아이들을 보내기 위해 이사 왔다.


  그런데 이사 1년 뒤부터 마을이 어수선해졌다. 아파트와 초등학교 바로 옆에 콘크리트 혼화제 연구소가 갑자기 들어선다고 했다. 이를 막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함께 일어나 투쟁을 시작했다(지금까지도 투쟁은 이어지고 있다).

  처음 행정 소송에서 졌고(나중에야 이것이 주민을 달래기 위한 일종의 관례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런 관례는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도 잘 나온다), 정식 재판이 시작되었다. 1심에서 기적적으로 이겼다. 그날 나도 재판장에 있었는데, 재판장 안을 가득 메웠던 주민들이 얼싸안고 오열했다. 광복 때 느꼈던 희열이 이런 걸까. 머리가 쭈뼛 서고, 무릎이 꺾일 만큼 기뻤다. 너무 울어서 목이 다 쉬었다.


  그러나 기쁨은 찰나였다. 기업은 곧 항소를 했다. 마을은 연달아 패소를 했다.


  

항소 후, 첫 재판 날. 마을에서 45인승 차를 대절해, 함께 법원으로 갔다. 마을 어르신의 뒤를 따라갔다. 든든했다. 누군가 외쳤다. "'벚꽃 봐~". 덕분에 봄소풍 같았다항소 후, 첫 재판 날. 마을에서 45인승 차를 대절해, 함께 법원으로 갔다. 마을 어르신의 뒤를 따라갔다. 든든했다. 누군가 외쳤다. "'벚꽃 봐~". 덕분에 봄소풍 같았다



  *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마을에서 함께 행정소송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드라마를 보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적인 장면에서 나 혼자 훌쩍였다. 내게는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이었다. 행정소송은 거의 이기기 어렵다는 드라마 속 변호사의 대사는 현실적이었다. 무엇보다 화면을 보다 기시감이 일었다. 우리 마을의 상대방은 1심에서 패하고, 항소를 했고 2심부터 김앤장에게 맡았다. 큰 소송도 아닌데,  양복을 짝 빼입은 변호사가 5명이나 왔다. 우리는 공익 변호사 1명이었다. 드라마에서는 우영우가 주인공이고 선(?)이고, 마을이 행정소송에서 이겼지만, 현실은 드라마와 다르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보기에는 이상한 이유로) 졌다.


  처음 투쟁을 시작한 시점에서 10년이 흘렀다. 그러나 그 세월이 그냥 지난 간 건 아니었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소송에서는 졌지만 주민들은 지지 않았다. 2심, 3심의 패소 이유는 행정 절차가 미비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1심의 판결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래서 콘크리트 혼화제 연구소는 들어왔지만, 우리가 우려한 환경 문제는 아직 없다. 물론 자본은 집요하고 지독했다. 아직도 마을 주민 일부는 기업과 소송 관계에 있다. 그럼에도 아직도 버틴다. 그 긴 세월 동안 늘 앞에 서 계신 분들 덕이다. 뒤에서 안아주고 버텨주는 분들 덕이다. 끌어주고 당겨주고 귀한 시간을 내서 함께한 시간들. 그 시간 덕에 우리는 서로를 지킬 수 있었다. 동대표가 아주 중요한 이유다.


  마을 도서관도 그 연장선에서 생겨났다.  현재 마을 도서관이 있는 자리는 원래 버려진 창고였다. 투쟁을 위해 천막을 치고 24시간 사람들이 모여 있던 그때, 그 사람들이 창고를 도서관으로 만들었다. 그렇게 도서관이 처음 만들어진 지 약 10년. 덕분에 공동체는 더 단단해졌다.

  나는 많은 분들이 그렇게 애쓸 동안, 뒤에서 얼쩡거리며 허드렛일이나 했다. 그래서 4년(동 대표 임기는 2년이고, 한 번 연임할 수 있다) 전, '동 대표'를 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받은 은혜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


  동 대표가 되고 보니, 아파트에는 일이 참 많았다. 그때도 그랬다. 코로나 거리 두기를 해야 하고 있었지만, 가가호호 방문까지 하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변수 때문에 꼭 받아야 할 동의서 때문이었다. 미제출 명단 중에 앞집도 있었다. 앞집 문부터 두드렸다. 이사 온 지 몇 달이 됐지만, 어찌 된 일인지 개소리(오해 마시길. 진짜 개가 짖는 소리)만 잘 들리고 이웃은 마주치질 못했다. 옆집 개는 아주 예민하고, 아주 잘 짖었다. 우리 집 현관문만 열어도, 문너머 큰 소리로 개가 인사(?) 했다. 나는 이참에 개 말고, 사람과 인사를 하자 싶었다.


  벨을 누르자마자, 역시나 또 날카로운 '개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백발을 한 할아버지가 나왔다. 예의를 갖춰서 인사를 드리려 입을 떼는데, 말이 툭 잘렸다. 할아버지는 신경질적이고 투박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왜 왔어?"

  "(더듬더듬) 안녕하세요. 저는 앞집에 사는 동 대표인데요... 동의서를 받아야..."

  이 와중에 개는 더 짖고, 할아버지는 개에게 "조용히 해!" 호통을 치타 다시 나를 보고 "뭐?" 하고 다시 뒤를 돌아 "조용히 해!"라고 또 호통을 쳤다.

  나는 이 '조용히 해'가 나에게 하는 말인가, 개에게 하는 말인가. 아무래도 둘 다 인 것 같았다.

  "뭐라고? 왜 왔다고?"

  "(여차여차) 동의서 때문에요."

  그러자 원래도 딱딱했던 할아버지의 표정이 더 굳더니, 호통치듯 말했다. 개한테 하는 것과 똑같은 톤과 말투였다(역시 앞서 '조용히 해'는 나와 개 둘 다에게 보내는 말이라는, 예감은 확신으로 변했다).  

  "나! 코로나요!"

  "아, 네. 그럼 다음에..."

  말을 마치기도 전에 문이 쾅 닫혔다. 개는 그 와중에도 신나게 인사를 계속했다.  

  코로나 상태이신 분을 불러낸 상황이 죄송하기도 했지만, 쾅 닫힌 문 앞에서 개의 배웅을 받으니 섭섭(?) 하기도 했다. 마스크도 안 쓰고 굳이 나오셔서, 개와 나에게 동시에 호통을 치시기 전에 그냥 코로나라고 말씀만 하셨으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문은 약 40% 정도의 성공률을 기록했다. 어떤 집에서는 수고한다고 환대도 해주셨지만, 어떤 집에서는 잡상인 취급을 받았다. 어떤 집은 그냥 문도 안 열어주셨고.

  그런데 이상하게(?) 괜찮았다. 이게 '다 공부지요'라는 김사인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위아래 돌고, 옆 라인에 갔다가 돌아와서 엘리베이터에 내리자 역시 옆집의 '개소리'가 나를 반긴다. 어쩐지 수미상관이 잘 맞는 동 대표의 저녁이었다.


  *


  동 대표를 하며 많은 날들을 보냈지만, 지금 <어쩌다 관장 - 스핀오프> 편으로 동 대표 시절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어쩐지 그날 저녁이 떠올랐다 2년 여가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집은 사람보다 개소리가 더 잘 들린다. 어쩌다 마주쳐 인사를 드려도, 할아버지는 얼굴에 '흥'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는 외면하신다. 근데 나는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물론 할아버지 제외 다른 식구분들은 인사를 잘 받아주신다). 지금 생각하면 처음 만난 날, 나의 마음 상태 덕분이 아닌가 싶다. 그날의 나는 새로 이사 온 앞집 어르신을 뵙는 것이 아니라, 동 대표로 공적 임무를 수행하러 간 것이었다. 평소의 소심한 나라면 아주 상처받을 상황이었는데, 당시에는 조금 황당했지만 별다른 타격이 없었다. 내가 아닌, '동 대표'였기 때문이다(동대표는 꼭 개에게서만 '개소리'를 듣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수준 미달의 사람이나 말을 '개'에게 비유하는 건, 정말로 개에게 미안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


  동 대표의 끝과 관장의 시작에 서 있는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저런 '공적인 마인드'다. 나는 대단하지 않다. 그러니 괜찮다. 도서관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공간이 아니며, 많은 이들이 직접, 함께 일궈낸 공간이다. 누가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곳도 아니며, 누군가 특정 목적이나 의도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지금 누가 관장이 되더라도, 그 흐름 위에 존재한다. 나는 그 물결 속 아주 작은 물방울 하나에 불과하다.


  우수는 '비가 내리고, 얼음이 녹는다'라는 뜻이다. 겨울이 지나고, 본격적인 봄의 시작이다. 자연이 그렇듯, 시간이 그렇듯 딱, 떨어지는 무엇이 아니라 늘 연결되어 있다. 지금 당장은 언 땅 같아도, 이미 봄은 오고 있다. 내가 지금 하게 될 일도 그렇다. 내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나 하나에 크게 바뀌겠는가. 잘하든 못하든, 눈은 녹는다. 비는 온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땅은 비옥해진다. 내가 할 일은 때를 알고 기다리는 일이다. 그에 맞게 밭을 갈고, 다가올 계절을 준비하는 것이다. '봄의 첫날, 가을의 끝을 생각하는' 태도다. 너무 큰 걱정도, 너무 큰 부담도 느낄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우리 도서관에는 10명이 넘는 운영진이 있다. 든든한 그들이 있다.  그리고 내가 마을 사람들과 몇 바퀴나 돌며 보내온 사계절의 시간이 있다. 이제 나는 그 흐름을 잘 타기만 하면 된다.  


이 사진의 이름은 <2월의 트리>다. 딱, '우수'다. (c.pixabay)이 사진의 이름은 <2월의 트리>다. 딱, '우수'다. (c.pixabay)


  게다가, 우리 도서관에는 흐름을 이어 갈 자산(이야기)이 너무 많다. 나는 이 역사를 기억하고, 그때 배우고 익힌 마음과 기술을 기억하고 실천하면 된다. '봄'의 시작에 서서, '가을의 끝'을 생각하는 마음을 새기자.

  

  아,

  멀리서 개가 짖는다.

  나는 위에 목탁 소리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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