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교육 season 1_09
1. 자코토의 불문학 수업
1818년 벨기에 루뱅 대학 불문학 수업을 담당하게 된 조제프 자코토(Joseph Jacotot, 1770-1840)는 깊은 사색에 잠겼다.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고 있는 벨기에로 정치적 망명을 와 조용한 여생을 보내려고 한 프랑스인 자코토는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학생들에게 프랑스 문학을 가르쳐야 했다. 문제는 자코토가 네덜란드어를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와 학생들이 서로 공통으로 사용할 언어가 전혀 없었다. 스승의 본질적인 행위는 자신의 지식을 설명하는 것인데 자신이 가르치고자 하는 바를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음악을 전혀 모르는 강사가 음악을 가르쳐야 하고, 미술을 전혀 모르는 스승이 미술 수업을 진행해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아주 난감한 상황이다. 프랑스 철학자 쟈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 1940-)는 자신의 저서 『무지한 스승(Lemaitre ignorant)』에서 자코토의 ‘지적해방’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실제로 자코토의 무모한 실험은 대성공을 거두었고 당시 교육시스템의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자코토의 교육법은 모든 사람의 지능은 동등하고 누구든 스스로 배울 수 있다는 ‘보편적 가르침’에 근거하였다.
그러나 그의 교육법은 당시 전통적 교육법의 기반 전체를 전복시킬 만큼 혁명적이었다. 도대체 어떠한 교육법이었기에 무식한 스승이 유식한 제자를 길러낼 수 있다는 말인가? 타고난 천재적 소질과 미적감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술분야에서 또한 알지 못한 상태에서 가르칠 수 있다는 그 비법은 무엇일까? 모든 수업을 가능하게 하는 조제프 자코토의 교육방법을 살펴보자.
2. 용감한 무지
용감해야 한다. 네덜란드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코토가 프랑스 문학을 네덜란드 학생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모험인 것이다. 단순히 언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문학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문화에 대해 토론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만약 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성과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데자코토는 물러나지 않았다.그는 먼저 기존 교육학의 신화를 무너뜨렸다. 스승은 자신의 지식을 설명하는 것인데, 그는 우선 ‘설명’이라는 것이 스승의 역할이 아니며, 또한 교육학의 신화는 ‘바보 만들기’를 통해서만 유지된다고 주장하였다.
열등한 지능과 우월한 지능을 나누고, 지식을 익힌 스승이 알지 못하는 학생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학생들이 바보일 때 진가를 발휘한다. “너 이해했니?” 그 순간 스승은 신의 위치에 존재한다. ‘이해’는 누군가가 바보인 나에게 설명해주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쓰는 말이다.
이해는 나의 이성을 멈추고 스승의 지능에 복종하게 하는 과정과 같다. ‘나는 이해가 안 되는데, 이해가 안된다고 하면 나를 무식하다고 생각하겠지?’ 우리는 분명 이런 경험들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점점 더 의심스러운 질문이 없애고 침묵 속에서 선생의 입술만 바라보게 된다. 자코토는 수업에서 1699년 출판된 프랑스 작가 페늘롱(Fénelon)의 저서 『테레마코스의 모험』의 네덜란드 번역본을 교재로 사용하였다.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문장을 서로 비교할 수 있는 이 책을 학생들에게 전달했고, 네덜란드어를 보며 내용을 이해하고 프랑스어 문장을 외우고 쓰는 것을 시켰다. 결과는 놀라웠다. 그는 프랑스어 문법이나 철자법에 대해 전혀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시간이 지나자 평범한 프랑스인들보다 더 뛰어난 어휘로 된 시를 쓰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코토는 깨달았다. 스승의 용감한 무지가 진정한 교육으로 이르게 한다는 것을.
3. 보편적인 가르침의 세 가지 원리
자코토는 1822년 『보편적 가르침: 모국어』라는 책을 출판한다. 실제 그는 자신이 전혀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회화나 음악 같은 과목과 네덜란드어로 하는 변론법을 또한 가르쳤고 그는 여전히 네덜란드어를 몰랐다. 그의 특별한 교육법의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수많은 학생들의 그의 수업을 듣기위해 몰려들어 정교수들의 강의실이 텅텅 빌 정도였다. 전통 교육계에서의 엄청난 반발이 있었지만 네덜란드 국왕은 자코토에게 국가훈장을 수여하고 ‘보편적 가르침’만을 사용하는 학교를 별도로 설립하여 교육하게 하였다.
그의 논리대로 이 ‘보편적 가르침’의 원리만 알면 진짜 모든 교육이 가능할까? 그 원리를 살펴보자. ‘보편적 가르침’의 세 가지 원리중 첫 번째는 ‘모든 사람이 동등한 지적능력을 갖고 있다’이다. 성적이 더 좋거나 IQ점수가 높다고 지적능력이 더 뛰어나지 않다는 말이다. 우등과 열등의 구별이 없다면 설명할 필요도 없기에 선생의 역할은 학생들이 스스로 알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지적능력을 해방시키도록 돕는 일만 하면 된다.
두번째, ‘누구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다’이다. 선생의 역할이 학생의 의지를 북돋아주는 것이고 지적능력을 해방시켜주는 것이라면 선생은 전문적인 지식을 갖출 필요가 없다. 학생이 안다는 것은 배워서가 아니라 암기를 통해 기억한다는 말이다. 갓난아기가 언어를 배우는 과정을 생각해보자. 반복과 기억의 연속이지 부모는 단지 관심과 사랑을 줄 뿐이지 않는가.
셋째,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이다.즉,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안다는 말과 같다. 한권의 책을 쓰기 위해 인간의 모든 지적능력이 총동원되어 있기에 한 권의 책을 통해 학생이 얻고자 하는 모든 체계를 한꺼번에 깨달을 수 있다는 말이다. 이는 단지 책이 아니라 하나를 완전히 알면 모든 것을 알게된다는 말이다. 이 세 가지 방법이 바로 자코토의 보편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4. 무지한 스승의 유산
스승 될 자격이 될까? 자코토와 같이 무지한 스승 밑에서 배웠다고 가정해보자.부모입장에서 미술에 ‘미’자도 모르는 사람에게 아이를 맡겨 좋은 대학을 보낼 수 있을까? “그래도 명문대는 나와야지, 상도 좀 받고.” 자코토가 지금 이 시대에서 보편적인 가르침의 해방(평등)교육을 펼칠 수 있을까? 아마 학부모들의 항의와 사회제도, 법률의 제재를 통해 감옥에 가게 될지도 모른다. ‘무면허’, ‘돌팔이’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길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교육이라는 것이 누구를 위한 것임을. 우리가 배워 온 것이 아니라 배움을 통해 자신의 삶을 자신답게 가꾸어 갈 학생들의 미래를 향한 것이자 바로 우리들의 자녀들, 후손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물론 자코토의 방법대로 모든 것이 다 가능하다고 믿을 수 없을 수도,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보편적 가르침을 제대로 체득한 스승이 많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렇게만 한다면 내가 직접 하겠어” 부모의 입장에서 직접 나설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스승의 역할은 학생의 의지를 북돋아 주고 스스로 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적정의 거리유지로부터 나온다. 그 거리를 좁혀 의지박약으로 만들거나 넓혀 방임으로 이끈다면 부모도, 스승도, 체계도 모두 쓸모없는 ‘짓’이 될 수도 있다.
자코토의 교육방식은 당시 전통교육계의 불신이 너무 커서 ‘보편적인 가르침’을 통해 깨우친 학생들조차 그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바로 동등한 지적능력을 가졌다는 전제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자코토 사후 이 위대한 ‘보편적인 가르침’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왜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너와 나의 지적능력이 동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왜 잘 그린 그림과 못 그린 그림이 구분되어야 할까?
우리의 교육은 ‘잘하고 못하고, 잘 그리고 못 그리고’가 아니라 ‘나의 의지로부터, 어떠한 사유를 가지고 있는가?’에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지한 스승이 남겨준 위대한 유산이다.
글 |두두그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