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과 생각의 연결고리

자녀교육 season 1_10

by 두두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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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별아 어떻게 생각해?”, “응! 생각해서 생각해”한 아버지와 다섯 살 아이의 대화이다. 아버지는 특정한 현상에 대해 아이에게 의견을 물었고, 아이는 너무나 당당하게 생각은 생각이라고 대답하였다.아마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대답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보자! 우리는 항상 어떠한 의미를 찾는다. ‘어떻게’, 또는 ‘왜’라는 의문부사는 현상에 대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는 말이다.


우리는 또한 항상 어떠한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것이 특정한 것에 대한 설명이든, 교육의 한 방식이건 간에 우리는 현상 이면에서 현상을 드러내는 특별한 목적을 찾아야만 한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너는 이 작품을 왜 그렸어?” 언어를 통해 인류는 끊임없이 의미를 규정해왔다. 그런데다시 생각해보자. “왜?” “어떻게 생각해?”가 언어화 된 어른들의 사고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닌지.


선생이 학생들을 데리고 미술관에 간다고 가정해보자. ‘이 작품의 의미가 뭐지?’,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더 잘 설명하기 위해 미리 정보를 공부해가거나, 전시해설사의 도움을 얻는다. 거기에는 ‘나는 미술에 대해 잘 모르는데 어떻게 설명하지? 틀리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과 주저함이 작용한다. 아이의 대답을 보자. “생각해서 생각해”라고 답한 것은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대한 것과 ‘생각은 단지 생각’이라는 것에 대한 답이다. 아이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롭다.


아이는 의미화 되기 이전 현상 자체를 통해 사물을 바라본다.언어 안에 있는 의미가 아니라 현상 그대로의 현상을 바라본다. ‘생각’의 사전적 정의는 ‘머리를 써서 사물을 헤아리고 판단하는 작용’이다. 아이는 생각이라는 질문에 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생각의 바깥, 즉 언어의 규칙에 관계 맺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는 직관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는 당당함이 있었다. ‘생각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생각은 생각일 뿐인데, 당연히 생각해서 생각하는 것이지.’


물론 어린아이가 의미들을 모두 헤아리고 대답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이들에게 혹은 타인에게 어떻게 질문하고 있는가? 질문에 대한 답의 범위를 미리 설정해놓고 질문하진 않을까? “너의 생각은 어때?”라는 질문은 나의 생각이 이미 있고 난 후에 묻는 질문이다.동어반복과도 같은 아이의 대답에 우리는 다시 어떠한 질문을 할 수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믿음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 BC470-399)는 문답법으로도 유명하다. 뛰어난 논쟁가인 그는 항상 질문을 통해 답을 찾아갔다. 소크라테스 이전 많은 고대 철학자들이 우주의 생성원리와 근원을 알고자 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세계를 아는 것보다 인간의 삶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근원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선이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물었다. 누군가 그에게 “용기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면 “그렇다면 고집은 무엇인가?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은 남다른 집요함, 즉 인내를 보여주는데 이것도 용기인 것인가? 또한 이것도 존경할 만한가?”라고 되묻는다.


그의 논리를 따라가다 보면 최초의 질문자체가 가진 결함을 깨닫게 된다. 그 결함은 질문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질문을 할 수 있는 특정한 믿음으로부터 생겨난다. 그 결함은 ‘용기’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근거와 범위는 과연 어디로부터 출발하며 어떻게 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을 생성시킨다.


하나의 질문을 하기 위해서는 질문에 대한 질문자의 믿음체계가 확고해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나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자기 확신에 다시 질문을 한다. “너의 확신을 진정 확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물론 소크라테스의 질문은 언어와 이성을 통한 변증법으로 철학적 진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며, 그가 가진 자기확신, 즉 믿음을 통해 질문자에게 다시 질문을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우리가 확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을 말로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정말 잘 설명할 수 있을까?“네가 그림을 이렇게 그린 이유가 무엇인지 말해볼 수 있겠니?” “몰라요” “잘 생각해보렴. 이 그림은 무엇을 표현한 것이야?” “그냥 그렸어요” 선생님의 확신과 학생의 확신은 모두 명확하다. 무엇인가에 대한 의미가 있다는 확신과 자신의 행위에 대한 확신. 믿음체계는 아이든 어른이든 모두 동일하다.

다만 그것이 언어화되고 사회화의 정도에 따라 다를 뿐이다. 부활한 예수를 의심하는 도마는 ‘내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한다’는 믿음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직관이건 이성이건 간에 우리의 질문은 자신의 믿음체계로 향한다. 그것이 생각에 대한 직접적인 발원지에 접근하는 길이자 인류가 추구하는 바람직한 또는 이상적인 방향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하기의 물음


1842.jpg?type=w1 마르크 샤갈, <손가락이 일곱개인 자화상>, 1913, Oil on canvas, 127cm × 107cm © Stedelijk Museum Amsterdam

프랑스 표현주의 화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작품 <손가락이 일곱 개인 자화상>(1913)을 보면 어떠한 생각이 들까? 질문을 시작해보자. “왜 손가락이 일곱 개일까?” “샤갈이 그리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림에 그려진 농촌풍경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색상에서 어떠한 변화가 느껴지는가?” “화가는 어떠한 삶을 살았고 시대적 상황은 어땠는가?”이러한 질문들을 통해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답은 무엇일까?


하나의 그림을 보고 여러 질문들을 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러한 질문들은 그림에 갇혀있다. 그림 바깥으로 결코 나갈 수가 없는 것이다. 바로 ‘의미’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는 그림 안에 혹은 그림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올바른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에 대해 답해 줄 전문적인 식견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만약 화가가 나타나서 “나의 작품은 이러하다”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의 믿음은 화가와 권위자에 의해 묵살되고, 그들의 말이 당연한 정답임을 결코 의심하지 않는다.


미술관의 큐레이터, 전시해설사, 평론가의 견해는 작품을 이해하는 하나의 의견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술가가 작품을 만들지만 그 작품의 해석과 감상은 관객의 몫이다. 바람직한 감상을 위해 우리는 어떠한 질문을 할 것인가? 만약 선생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해야 한다면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어떻게 생각해?” 라고 묻는다면 학생들의 대답을 예상할 수 있다.


반대로 학생들에게 질문을 하게 해보자.“이 그림을 보고 어떠한 질문들을 할 수 있을까?” “그림이 아니라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질문이 지속되는 한 그림을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빛에는 ‘생각들’로 가득 차게 된다.


선생의 역할은 무엇일까? 정답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삶에서 바람직한, 혹은 올바른 믿음의 범위 안에 도달하게 할 수도 있고, 인식의 방향을 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생각’에서부터 나온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상상력과 창의력은 수많은 예술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삶 전체를 생각하는 자신의 생각으로부터 나온다. 위대한 ‘생각의 탄생’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이미 잠재되어 있다. 선생은(부모는) 학생들이 그 생각에 접근하게끔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전에 이미 선생의(부모의) 생각이 자신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생각’의 자기확신으로 향해야 가능한 일이다. 의미가 아닌 생각들로 가득 찬 바람직한 믿음체계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만약 한 학생이 “생각해서 생각해”라고 대답한다면 어떠한 질문으로 그 학생과의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까? 생각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 우리에게 던져졌다.


글 | 두두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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