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ht-Flight-Freeze
잠이 들기 전, 이대로 영원히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며 침대에 몸을 뉘었다.
차라리 내일 아침 눈 뜰 수 없기를 바랐다.
하지만 두어 시간도 채 못 되어, 휘젓지 않아도 느껴지는 침대 옆 공허함에 눈물 흘리며 잠에서 깼다.
한동안 그렇게, 부서진 가슴을 움켜쥐고 억지로 일어났다.
깜깜해진 밤,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는 이대로 20년이 흘러 60대 할머니가 돼었으면 했다.
남편없는 생이, 세 아이들을 데리고 혼자 감당해야 할 삶이 어떠할지 아득하기만 했다.
문득 그냥 ‘60살 할머니가 되고 싶다’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이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어떻게든 결론이 나있겠지. 아이들도 성인이 되어 내가 맘 편히 울 수 있겠지.'
내가 맞이할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두려웠기에, 프로포폴을 맞고 헛소리를 짓거리다 깨는 환자들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을지 모른다.
해 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질 때마다 이대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나는 종종 잡담 중에 10년 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애들 모두 성인이 되면 난 펑! 하고 사라져 버릴 거야"라고 웃으며 말하곤 했었다.
사람들은 농담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나에게 10년 뒤 미래는 없었다.
오늘 하루가 버거웠다.
미친 듯이 회사일을 하며 중간중간 가족들을 살피다 지친 몸으로 집에 들어오면 남편의 빈자리가 견딜 수 없었다. 맥주캔을 하나 따서 마시면 괴로운 마음 없이 아이들 밥도 챙기고 남은 집안일을 할 수 있었다.
두 캔에서 세 캔으로 점점 늘어났다.
집에서는 취할 만큼 마시지는 않았던 터라 나도 이게 큰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정도 위로도 없다면 어떻게 하루의 긴장을 풀 수 있겠냐며 스스로를 정당화시켰다.
내가 마시는 술에 대해 가장 걱정했던 것은 둘째 아이였다.
둘째 아이가 나를 쫓아다니며 잔소리를 해대기 시작했다.
"엄마 술 너무 많이 드시는 것 같아요. 드시지 마세요."
"이미 두 캔 드셨잖아요. 그만 마셔요"
나는 이 정도는 괜찮다고는 했지만 내가 마신 맥주캔을 세보는 둘째 아이의 눈치가 보였다.
가뜩이나 아빠도 아파서 불안한 아이들한테 나까지 걱정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보드카 한 병을 옷장에 숨겨두고 아이들 몰래 한 샷씩 마셨다.
혼자 취해서 잠드는 날이 늘어났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있던 어느 날, 지인에게서 와인 한 병을 선물 받았다. 내일은 늦잠을 자도 된다는 안도감 속에서 아이들과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만들며 와인을 홀짝홀짝 비웠다. 한 모금씩 기분이 풀릴수록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며 선물을 들고 웃는 아이들의 얼굴이 마음을 녹였다. 그 모습에 취해 나도 모르게 술잔이 자꾸만 비워졌고, 결국 깊이 취했다
다음날 둘째 아이가 침울한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엄마 취한 모습을 보면 너무 무서워요."
큰아이도 거들었다.
"엄마 어제 좀 이상하기는 했어"
나는 그 순간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내 괴로움을 달랜다고 마신술이 아이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미안했다.
술이 기분을 전환해 준다는 건, 내 착각이었다.
술은 마음을 달래주지 못했다.
마취 연고를 바른 듯, 현실을 잠시 둔하게 만들어 괴로움을 차단할 뿐, 마취가 풀리면 더 혼란스러운 고통이 선명하게 밀려왔다. 그뿐 아니라, 몸속 곳곳에 퍼져나간 알코올은 다음 날의 활력까지 분해해 버렸다. 몸이 힘들어질수록 마음도 무거워졌고, 그러면 또다시 술의 힘을 빌리고 싶어졌다.
오리혀 나에게 독이 되는 행동을 위로라고 착각하고 무한반복 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지난 몇 달을 돌아보았다.
이 어리석은 행동을 멈추기로 했다.
고통은 마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을 피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견디며, 그저 나 자신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남편이 신경과에 입원하며 염증치료를 하고 있을 때, 나는 회사에서 암환자를 대상으로 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바로 옆팀은 암환자들의 경과를 관리하는 팀이었는데 담당하는 환자들의 상태 공유를 받을 때마다 손에서 땀이 났다.
'ㅇㅇㅇ님 아산병원 결과 나왔데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치 남편 결과를 받은 것처럼 머리가 쭈뼛 섰다.
회사에서 한참 문서 작업을 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이었다.
근무시간에는 보통 문자를 보내는데,
'오늘 나온다는 fMRI검사 결과가 안 좋은 건가'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남편의 목소리는 약간 흥분되어 있었다.
"결과가 나왔는데 이것도 꽝이야. 별거 안보인데. 내일 뇌척수액 검사 다시 해볼 거야"
남편의 검사 결과를 들을 때마다, 그의 상태가 더 나빠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을 때마다, 세상이 잠시 멈춘 듯 눈앞이 흐릿해졌다.
시가 사람들의 폭언과 거친 표정을 마주할 때면, 숨이 멎을 듯 가슴이 조여왔다.
큰아이의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선생님의 전화가 올 때마다, 마치 차가운 물을 끼얹은 듯 온몸이 얼어붙었다.
불가능해 보이는 업무 지시가 떨어지면 입안이 바싹 말랐고, 업무에 대한 냉담한 반응들은 머릿속을 하얗게 덮어 버렸다.
퇴근 후 집 앞에 붙어 있는 법원 우편물 도달 안내 스티커를 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상대방 변호사가 협조를 강요할 때면 온몸이 굳었다.
난 거의 매일 밤, 다리 경련으로 몸을 비틀면서도 스스로를 더 쥐어짜며 겨우겨우 견뎌냈다. ‘이러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짓눌렀다.
어느 순간부터, 주말이 되면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겨우 정신을 차려 아이들에게 밥을 주고 나면, 다시 침대로 쓰러져버리곤 했다. 그렇게 반복되는 날들 속에서, 나는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회사에서 새로운 세미나 기획 업무가 나에게 맡겨졌다.
강의를 맡아주실 회사 자문의를 찾아가 일정과 아젠다 조율을 하던 중 HRV 자율신경계 검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말이 나온 김에 나도 검사를 받아 보았다.
검사를 한 자문의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팀장은 내가 생각했던 거랑 정반대야! 교감신경이 너무 많이 떨어져 있는걸. 고갈됐어."
회사에서 너무 일을 많이 시키는 것 같다며 이번 세미나가 끝나면 좀 쉬라고 하셨다.
HRV(심박변이도) 검사
• HRV는 심박의 시간 간격 변화, 즉 심장 박동 사이의 변동성을 측정하는 지표로, 자율신경계의 상태를 반영한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균형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척도.
• HRV가 낮아지는 이유:
장기간의 스트레스는 교감신경계를 과도하게 활성화시킨다. 이는 심장을 빠르게 뛰게 하고, 스트레스 반응(일명 ‘투쟁-도피’ Fight or Flight 반응)을 지속시킨다. 이로 인해 심박의 변동성이 감소하고, HRV가 낮아지게 된다. 낮은 HRV는 신체가 스트레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하며, 만성 스트레스나 과로, 심리적 압박이 심할수록 HRV는 더욱 낮아질 수 있다.
피검사도 해보았다.
내 DHEA 레벨은 60대 할머니도 아닌 70대 할머니 수준이었다.
너무 낮았다.
DHEA
• DHEA는 부신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으로,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티솔과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한다. 면역 기능을 조절하고, 항염증 작용을 돕고, 스트레스에 대한 신체의 회복력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DHEA가 낮아지는 이유:
장기간의 만성 스트레스는 부신 피질에서 코티솔의 과도한 분비를 유발한다. 부신은 코티솔과 DHEA를 동시에 분비하는데, 장기간의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코티솔이 지속적으로 분비되면서 부신 기능이 과부하된다. 그 결과, DHEA 생산이 감소하게 된다. DHEA가 감소하면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력과 면역 기능도 함께 저하되며, 이는 만성 피로, 우울증, 면역력 저하 등의 증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장기간의 스트레스와 갱년기 증상이 겹치면서 호르몬 조정이 필요했다.
직구로 DHEA를 사서 아침마다 다른 영양제와 함께 복용하기 시작했다.
며칠 만에 몸에 변화가 느껴졌다.
'어, 좀 살 것 같다.'
무더웠던 한여름 밤의 퇴근길, 맥주 한 캔이 너무 마시고 싶어 오랜만에 편의점에 들렀다.
5개 만원 세일을 하길래 5캔을 사 왔다. 치킨도 한 마리 시켰다.
집에 와서 땀에 젖은 몸을 씻고 오랜만에 맥주 한 캔을 마시니 그날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딱 한 캔만 더 먹고 자야겠다 싶어 냉장고에 가서 한 캔을 더 꺼내는데 둘째 아이가 화를 내며 내 팔을 잡고 막아섰다.
"엄마! 딱 한 캔만 먹는다고 했잖아요! 이제 그만 마셔요. 알코올 중독이에요!"
"엄마 몇 달 만에 마시는 거야. 그리고 알코올중독 아니야"
이제 나보다 덩치가 더 커진 둘째는 물러나지 않고 맥주를 뺏으면 말했다.
"안 돼요. 그래도 하루에 한 캔 이상은 안 돼요."
"엄마 오늘 하루종일 힘들게 일하고, 땀도 많이 흘렸어. 이 치킨 한 조각 이랑 딱 한 캔만 더 마시면 좋겠다!"
둘째에게 부탁도 해봤지만 뺏은 맥주캔을 냉장고에 다시 넣고 나를 밀어냈다.
몇 달 전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이 있어, 자존심도 상하고 화도 났다.
몇 마디 실랑이를 하다가 포기하고 그냥 소파에 앉아서 혼자 분을 삭이고 있었다.
'내 맘대로 맥주도 못 마시다니! 오늘 너무 덥고 힘들었는데...'
혼자 씩씩거리고 있는 내 앞에 막내아들이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엄마, 이거 누나 안 볼 때 빨리 마셔"
숨겨온 맥주캔 하나를 나에게 잽싸게 건넸다.
나는 딸아이의 걱정과 아들이 몰래 주는 리프레시 한 캔을 냉큼 받아서 한여름 밤의 열기를 마저 식혔다.
그거면 충분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무너뜨립니다. 그 파도가 밀려올 때, 우리는 그저 휩쓸리지 않으려고 발버둥칠 뿐입니다. 내가 간신히 버텨낸 방법들이,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작은 빛이 되기를, 그것이 완벽한 해결책은 아닐지 몰라도, 어둠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쉼터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