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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쥴 Oct 31. 2023

메이크업을 지우고, 플레이를 멈추면

코스프레


박수홍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지난 13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횡령) 위반 혐으로 기소된 박수홍 친형 부부에 대한 8차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박수홍의 아버지는,

“제가 30년 넘게 수홍이 뒷바라지를 해줬다. 방에 있는 콘돔까지 다 치워줬다. 큰아이는 너무 절약했고, 박수홍은 너무 돈을 잘 썼다. 그게 못마땅했다. 김다예가 박수홍의 재산이 탐나서 그래서 이 작당을 한 것 같다”


 “수홍이가 여자를 너무 좋아한다. 내가 아는 이름만 여섯이다. 산부인과에 간 여자도 있다. 형이 뒤처리를 해주기도 했는데 우리 보고 빨대라고 한다. 세상 이런 억울한 일이 어디 있나. 이렇게 핍박받아 가면서 돈을 모아줬는데 큰 애는 수갑을 차고 있다. 성질이 안 나겠나"라고 했다.


박수홍의 어머니도,

“세무사, 노 변호사, 김다예 이렇게 셋이서 수홍이에게 계획적으로 접근했다. 언론에는 ‘엄마가 빨대를 꽂았다’고 하는데 이런 미XX들이 어디서. 성질이 난다. 저것들이 쓰레기지, 내가 쓰레기인가”라고 했다.


박수홍의 형수는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 혐의로 피소됐다.

동생의 수익을 빼돌린 친형 박 모 씨는 구속됐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는지가 중요하다.

왜라는 질문을 파고들 때 이야기는 보편성을 얻는다.




왜 그들은 나를 학대하고, 손주들을 외면하고, 병든 아들의 가정을 파괴하면서까지 돈을 챙기려 할까?


나는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그 근본원인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그것은 시부의 욕망도, 시모의 거짓도, 시누의 시기질투도, 남편의 무력함도 아니다.


저들 중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고,

유일한 돈줄이었던 아들이 더 이상 그 구실을 못하게 된 것.

이것이 사건의 본질이다.


거기에서부터 각자의 인식과 감정, 생각과 판단, 말과 행동이 이루어졌을 뿐이다.

내 가치관과 우선순위에 따라 내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들이 처음부터 경제활동을 안 했던 건 아니었다.


대학생시절 친구로 지내던 남편과 나는 부모님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아빠가 목사라고? 너도 교회 다녀?"


나의 놀란 질문에 남편은 웃으며 대답했다.

"난 그냥 시간만 때우고 와. 어릴때부터 교회에 앉아있는 게 익숙할 뿐이야. 신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남편의 웃음에 나도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앞으로는 너한테 얻어먹을 생각 하면 안 되겠다. 네 용돈은 교회 사람들의 헌금에서 나왔을 거 아니야."


"돈을 엄마가 벌어. 아빠는 사업을 여러 번 시도했지만 계속 실패해서,  엄마가 그냥 목사나하라고 그랬어. 그래서 이번에 안수받으셨어."

당시 24살의 남편은 미간을 찌푸리며 부모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야기하는 남편의 얼굴이 어두웠다.


남편은 빨리 결혼하고 싶어 했다.

그렇게 남편의 대학 졸업식 기념사진엔 아내인 내가 함께 서있다.




신혼시절엔 매주 토요일 시가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다음 일요일 시부의 교회에 나갔다.


남편의 수련의 기간 동안엔 혼자 젖먹이를 데리고 70킬로 거리를 운전하고 가는 일이 빈번했다. 갓난아이는 운전하는 나를 원망의 눈빛으로 보며, 왜 자길 안 안아주냐는 듯 박박 울어대곤 했다. 자지러질 듯 계속되는 아이의 울음소리에 젖이 불어 옷이 졌었고 흐르는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 참지 못한 나는 아이를 안아 젖을 물린 채로 운전을 하며 경기도의 끝에서 끝을 다녔다.


그러다 시부가 교회 명의를 자기 이름으로 해달라며 시모를 폭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가격 당하다 쓰러진 시모를 시부가 끝까지 발로 밟았고 시모는 목뼈가 골절되는 큰 부상을 입어 입원 치료를 받아야했다.


그때 시누는 이렇게 말했다.

"이래서 우리가 다 빨리 결혼했잖아. 이 꼴 보기 싫어서"


그 사건 이후 시부모는 더 이상 자기 교회에 나와 사람들에게 인사하라고 하지 않았다.


신혼시절, 연휴에도 인턴당직으로 바빴던 남편과 시가의 호출로 바빴던 나. 시모는 필기도구를 지참하고 오라고 하여 나에게 성경공부를 직접 시켰다. (20년전 다이어리 中)


처음엔 시가의 요구들을 뭔지도 모르고 받아냈다.

나는 어렸고,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하려면 어쩔 수 없이 치뤄야 할 희생이라 생각했다.


가정주부였던 시누는 남편이 출근한 사이 이삿짐을 싸 시모집으로 들어가길 3차례 반복 하다 결국 이혼했다. 시누의 어린 내연남은 아버지 교회의 신도였다.
시누는 임대 유치원의 운영권을 물려받았지만 경영은 쉽지 않았다.


불과 한 해 만에,

유치원은 폐업했다.

시누의 내연남도 떠났다.

교회의 신도들도 떠났다.

교회는 폐교했다.


남편의 병원도 폐업했다.

남편은 다시 응급실로 돌아갔고,

시누는 전남편에게 돌아갔다.


모든 사업이 차례대로 망했지만 그들의 특권의식은 더 높아졌다.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강박 때문에 목사, 의사에 더 집착했다.


일방적인 메세지들. 심리치료사는 시모의 메세지를 보고 경계성장애 진단은 내려질것이라고 했다.


시모와 시누의 체면을 위한 백화점 소비는 이어졌고, 주님의 선택받은 가족, 목사로서 받아야 하는 대우는 여전히 계속되어야 했다.

.

남편이 새 휴대폰으로 교체하며 남겨둔 폰에 시모의 일방적인 메세지가 수도 없이 남겨져있다.


사라져 버린 그들의 위상을 채우고 싶은 몸부림처럼 보였다.


ㅇㅇㅇ은 널 이용해 / 잔머리 굴리는거에 너는 못당해 / 여자의 끝없는 욕심 / 아들 이간질하는 것 같아 가만있었다만 / 아무리 발악을 해도 그리 못났냐(피고의 외모 비하) / 내아들 실컷 하고 싶은 것도 못해보고 장 가가서 고생하고 / 부부간은 필요 상 사는거고 네 수중에 네 통장에 돈이 있어 야 / 프리미엄 부쳐서 (병원) 팔아넘겨라 쥐도 새도 모르게 너 혼자만 알고 / ㅇㅇ한데도 말하지 말고 / ㅇㅇ이 만드는 음식 기름 범벅하던데 먹지마라(피고 준비서면 中)  



부당한 요구와 거짓말, 무리한 행동들이 이어졌고 우리는 점차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시모의 난도질에 나는 갈가리 찢겼고 가정이 흔들렸다.

내 마음의 병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고 뒤이어 남편도 병을 얻었다.

시모의 문자에 흔들리지 않던 남편이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남편의 병이 심상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던 어느 날,

시부와 시모 그리고 시누가 황망한 얼굴로 우리가 있는 병실을 찾아왔다.

잘 걷지 못하는 아들을 목도한 그들의 절망을 나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함께 슬퍼했다.


아들이자 남편, 그리고 세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그를 놓고, 우리는 잠시, 같은 마음이었다.

남편이 이 병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날 수 있길 함께 기도했다.

나는 남편이 나을 수만 있다면 어떤 부당함도 기쁘게 감내하겠다고 다짐했다.


시부는 남편의 머리를 잡고 외쳤다.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시고자 아들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으니 이 병을 극복하여 주님의 자녀로 거듭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그 기도의 끝에, 의기 양양한 시부는 소리쳤다.
"ㅇㅇㅇ! 왜 내 말을 안 들어! 목사 아들인 네가, 내말을 안듣더니 결국 이렇게 된거야. 교회 안오고 헌금도 안하면 잘살 줄 알았지? 꼴 좋다 아주."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아무 말 없이 서로 눈이 맞을까봐 시선을 떨궜다.


그들이 돌아간 뒤 고개 숙인 남편에게 나는 어떤 위로도 할 수 없었다.




절대적으로 옳은것도, 절대적으로 그른것도 없다.


나는,

아이들에대한 모성애로 무장하고 불의에 맞서며 고난을 헤쳐나가는 나만의 드라마를 만들 생각은 없다.

나는 내가 인식한 상황에서 내 가치관과 우선순위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했을 뿐이다.


그들 또한 그렇게 했다.




가사조사관


가사조사관은 시부모가 아픈 아들을 누구보다 잘 챙길 거라며 나를 달랬다.

자신의 노모도 그렇게 하실 거라고 했다.


나는 반문했다.

"조사관님의 어머님도 손주 3명을 아빠와 떼어 두고 조사관님만 데려가셨을까요?"


아이가 셋이라는 조사관은 잠시 생각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우리 어머니는 저보다 애들을 먼저 데리고 오실 분입니다."





강빈이 심양에 있을 때 은밀히 왕위를 바꾸려고 도모하면서(...) 인군의 처소와 아주 가까운 곳까지 와서 큰소리를 지르며 발악하였고(...) 하루라도 목숨을 부지하게 할 수 없으니, 폐출한 다음 사사(賜死)하라.
- 승정원일기 93책 (탈초본 5책),
인조 24년 3월 15일 (임술)


소현세자는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인조 23년 음력 2월에 9년 만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귀국 두 달 만에 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남편이 죽자 그의 아내 강빈과 아이들을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인조 24년 그녀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사당했다.


“狗雛强稱以君上之子, 此非侮辱而何?
개새끼 같은 것을 억지로 임금의 자식이라고 칭하니,
이것이 모욕이 아니고 무엇인가?”
- 인조실록 47권, 인조 24년(1646년) 2월 9일 (병술)


인조는 강빈을 '개새끼 같은 것'이라고 칭하였고,

강빈이 낳은 세 아들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어 셋째 경안군만 남기고 첫째 석철과 둘째 석린은 병으로 죽게 되었다.


소현 세자의 큰아들인 이석철이 제주에서 졸하였다. (...) 성상의 손자가 아니었 단 말인가. (...)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를 제주도로 귀양 보내어 결국은 죽게 하였으니, (..) 슬플 뿐이다.
- 《인조실록》 49권, 인조 26년(1648년) 9월 18일



소현세자 사망 후 그의 아들 원손 - 영화 올빼미 中




사람들의 가증과 거짓말, 폭력과 욕설을 모두 걷어내면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보인다.


나는 살아내야 한다.

내가 지켜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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