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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쥴 Oct 29. 2023

분노 Anger

상실을 대하는 두 번째 단계



원인이 외부에 있다는 점에서 슬픔과 분노는 동일하지만, 나를 슬프게 한 대상에 대한 항의 감정이 분노라는 점에서 약간 차이가 있다. 그런데 감정이란 역동적이어서 슬픔은 언제든지 분노로 바뀔 수 있다. 슬픔이 분노로 바뀌면 슬픔은 사라진다. - 인간의 모든 감정 中


그들은 우리의 결혼이 애정 없이, 부모님과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적었다.

대학교 정문 앞에서 수업 끝나고 나오는 나에게 환하게 웃어주던 24살의 남편, 나의 첫 직장 앞 지하철역에서 힘차게 손 흔들던 그 모습, 남편의 가장 찬란했던 2,30대는, 그의 부모도, 우리 아이들도 아닌 나의 기억에 고스란히 있었지만, 서면에 담긴 시가의 목소리는 내 마음을 갉아내는 것 같았다.


그 누가 우리의 처음을 아는가? 남편과 나의 젊은 시절의 싱그러운 날들과 사랑했던 수많은 밤들을, 그리고 우리가 함께 이룬 결실들을!  

그들의 새빨간 거짓말에 내 가슴은 활활 타올랐다. 그러나 우리의 25년은 수많은 사진과 주고받은 메시지, 그리고 나의 일기장들 속에 생생하게 남겨져 있었다.


남편을 ‘돈 버는 사람’으로만 보았다는 역겨운 말들은 나의 심장을 도려냈다.

서면에서는 나의 사랑과 지지를 단순한 계산과 거래로 표현하려 했다. 나는 남편이 22살이었을 때부터 그의 꿈을 응원했다. 나의 헌신과 힘겹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언제나 남편과 함께 그 힘든 시간을 나누었다.

남편의 시련이 곧 나의 시련이었음에도 서면의 삐뚤어진 글들은 나를 찌르고 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 지하생활자의 수기, 도스토에프키




변호사님은 구석명신청서¹를 제출하며 상대방의 거짓 주장에 대한 자료를 요청했다.


남편이 당사자로서 소송을 요청했는지, 위임계약서²나 약정서의 서명과 날인 부분이 확인될 수 있도록 그 약정서 제출을 요청했다.


엄마가 남편에게 전화해 폭언을 했다는 거짓말에 대해, 전화 수발신 내역을 요청을 하자, 그 주장은 사라지고 시누와 엄마가 전화 통화를 하였다고 말을 바꾸며 녹취가 있다고 했다.


이제 피고의 모친이 원고가 아닌 원고의 누나에게 이혼을 언급하였다고 바꿔 주장하였고 녹음증거도 있다고 하였던바,  그 녹음파일을 중략이나 전략, 후략 없이 모두 제출해 주길 바랍니다.(피고 서면 中)

우리는 내용일체가 확인되는 통화 음성 파일의 원본을 제출하라고 구석명신청 이후에도 3차례에 걸쳐 추가 서면으로 요청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내지 못했다.


시부모님들이 병원의 공개된 장소에서 피고에게 폭언을 한 내용이 부분이 분명히 나타나 있을 것이므로, 원고가 보유하고 있다고 한 전화통화 녹음파일 원본의 제출 등 피고가 석명을 구한 부분에 대한 적정한 답변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피고 11월 준비서면 中)


남편은 상황을 오해할 수는 있어도, 이런 유치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원고가 녹음 증거에 대해 강하게 서면에서 언급을 하였다가 이후 회피하는 정황 상, 원고가 주변인들로부터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듣고, 피고가 하지 않은 말을 했다고 오해를 하고, (피고 22년 9월 준비서면 中)


난 분노했다.


내가 견뎌왔던 그들, 탐욕을 채우기 위해 나를 이용하고, 상처를 주던 시가의 가면을 벗기고 싶었다.


끊임없이 나에게 성경을 외우게 했던 시부모들. 예수의 가르침에 역행하며 성경을 입맛에 맞게 취사선택하고, 십계명의 "부모에게 순종하라"를 강조하며 헌금과 생활비, 효도를 강요하던 그들!


그들은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강박 때문에 종교에 집착했다. 순수한 믿음이나 종교적 자질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단지 종교를 통해 자신의 욕심을 충족시키고, 나를 제어하려 했다.


주말근무로 교회를 못 나간다는 말에 '하나님이 너를 벌할 거다'라고 저주를 퍼붓고, 걷지 못하게 된 아들에게 '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어서 이렇게 된 거야'라고, 소리치던 시부.


상종할 수 없는 쓰레기라며 자신의 남편을 버렸다가, 내연남이 떠나자 다시 전남편과 재혼하러 기어들어간 STI³병력의 시누.


그리고 내가 온전히 견뎌온 시모.



내 마음속에 깊이 파여 있는 학대의 흔적들과 그들의 민낯을 온 세상에 고발하고 싶었다.




가사조사관


가사조사⁴ 일정이 확정되자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배정된 가사조사관이 나이가 좀 있으신 남자분이에요."

변호사님의 목소리에서는 걱정이 느껴졌다.

"가부장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아이들과 함께 얼마나 힘들게 기다리고 있는지, 그리고 현재의 어려움을 중점적으로 이야기하세요."




가사조사관은 이번에 자신이 조사해야 할 내용은 간단하다고 했다.

"나는 ㅇㅇㅇ씨 본인 의사인지만 조사하면 돼요"


분노에 찬 나는 우리 가족이 겪게 된 시련을 시모가 보내왔던 문자와 함께 쏟아내고 말았다.




가사조사서에 등장한 여자


가사조사관이 시가를 방문해 작성한 것을 보고 느낀 심한 배신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시가의 도움을 받고 있는 남편이 어느 정도는 시집의 입장을 대변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제출된 조사서를 읽는 내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 안에 묘사된 우리의 결혼생활은 내가 알던 우리가 아니었다.


원고는 피고와의 2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거의 날마다 다퉜고 지금까지 다툼이 축적되어 왔으며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졌다. -  가사조사서 중


가사조사서에 등장하는 남편의 아내는 지옥 같았던 20년 결혼생활을 벗어나고 싶어 이혼하자는 남편의 말에, 애 셋을 낳아 경단녀로 만들어 무능력하게 만들어놓고 이제와 이혼을 하잔다며 원망을 퍼붓고 절대 이혼해 줄 수 없다고 스스로 자해까지 하는 여자였다.

또한 그녀는 사업실패로 좌절한 남편을 외면하고 몸이 축나도 좀 더 돈을 벌어오라며 무리한 근무를 하도록 종용하는 돈밖에 모르는 여자였다.


무엇 보다 그녀는 시부모에게 냉담했다. 용돈 주기조차 꺼리며, 항상 돈 때문에 시끄럽게 하고 시부모와 남편에게 상처를 줘왔다.


자기 누나에게 전화해 막말을 퍼붓는 그녀는, 시집에는 용돈도 안 드리고 인사도 안 드리다가 남편이 아프게 되자 챙길 것을 다 챙기고 자신을 시집에 버리는 뻔뻔함을 보였다.


이런 여자라며 그 면전 앞에서 당당히 이혼 선언을 하고,

부모에게 도움을 구해 사랑하는 아이들을 패륜엄마로부터 데리고 나와야 하지 않는가!

왜 전화 통화를 거부하는가. 왜 문자로만 답하는가. 왜 서면으로만 이혼을 요구하는 가!


상대방은 가사조사관에게, 내가 기록하고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 자료들을 엄청 낼 거라 했단다.
우리가 함께 경험한 수많은 추억, 세 아이들을 포함한 가족의 사랑스러웠던 시간들을 나의 행위에 초점을 맞춰 구겨 비틀고 사진 찍고 자랑한다는 프레임을 씌웠다.


남편이 그의 DSLR⁵로 직접 찍은 가족의 모든 순간들을 지운다 하더라도,

설사 아이클라우드⁶에 1 테라바이트 가까이 보관된 사진과 동영상, 우리의 대화들이 삭제된다 하더라도,

지난 25년 우리가 함께 썼던 그 많은 추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가사조사관은 모든 게 남편의 진정한 의사라고 했다.

원고는 조사관의 신분증을 보여 주자 이름을 정상인과 다름없이 읽었고 1시간 여 대면조사 시간 동안 의식이 분명한 가운데 차분하게 진술하였으며 어떤 사항에 대하여는 흥분하여 열변을 토하느라 숨이 약간 차 오르기 도 할 정도로 정신이 온전하였다. - 가사조사서 원고 조사서 중


남편을 그토록 흥분하게 한건 무엇이었을까?

남편 잡아먹는 그 년⁷ 인가?
옆에서 그 X을 벌하라 기도하는 시부인가.

헌금을 안 하고 만족할만한 생활비를 안주는 바로 그 X을 증오하는 시모인가.

있지도 않았던 장모의 폭언을 녹취했다는 시누인가.


가사 조사관은 나에게 시부모님, 시누를 모두 함께 만났다고 했다.


가사조사관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물이 바다덮음 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목사인 시부가 모두를 두고 안수기도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종교는 그 자체로 선과 악을 담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고, 삶의 길을 밝혀주는 따스한 불빛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불빛을 자신의 욕망으로 흐리게 만드는 이들이 있다. 신앙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채우려는 이들, 그들 앞에서 진심으로 믿음을 따르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상처를 입고 만다.


더 안타까운 건, 그런 상처를 입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믿은 신앙이 오히려 그들을 이용할 뿐인데도.


교단은 자기 정화의 능력을 잃어버렸다. 누군가가 그 어둠 속에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하지만, 그 목소리는 억눌리고 침묵 속에 갇힌다. 그 사이, 믿음을 팔아 이득을 취하는 이들의 손아귀에서, 진정한 신앙은 조금씩 무너져 내린다.




아! 이제 이해가 됐다.


서면의 대상인 피고는 내가 아닌 바로 그X이었다.

'아들이 번 내 돈, 아들 죽으면 다 저X에게 가겠다.

지금도 돈이 없는데 여기 내가 니 남편 데리고 있으니 이제 네가 빨리 생활비 보내라!


남편은 사랑하는 아이들을 배제할 사람도, 나에게 생활비를 달라고 요청할 사람도 아니다.


그들은 그X에게 그런 메시지들을 보냈던 것이다!


서면을 작성한 원고는 남편이 아니라 시모다.

내 전화는 받지 않고, 전신마비 상태에서 생활비를 달라며 굳이 장문의 문자를 보낼 이유가 무엇인가!


“내 생활비나 보내”라는 등 시비조의 대화를 하기 시작하더니, “애 셋 키우면 남편은 내다 버려도 된다는 거냐? 어처구니가 없네. 생활비는 못 준 다면서 들어오면 돌봐준다고? 그걸 믿으라는 거냐? 집에 있으면 돈 안 드냐? ”라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피고 준비서면 中)
서운하면 나에게 전화로 불평하면 됬을것이다. 전신마비환자가 전화도 안받고, 힘들게 문자를 보낼 이유가 없다. 남편은 육성으로 나에게 불평하며 이혼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시댁에 있는 남편한테 매주 주말에 오기는커녕 / 두 시간 기다렸다가 데려가면 되지 / 이혼도 안 한 남편인데 남편 취급을 이렇게 할 수 있다 있나? / 어느 집 마누라가 아픈 남편 시댁에 맡겨 놓고 지는 애들 데리고 휴가 가고 놀러 가고 / 와서 얘들 보는 동안 기다렸다 데려가 급한 일 있으면 딴 날을 잡고 내돈 내고 택시 태워 보면 남의 돈드는 줄 아는 모양인데”라면서 피고가 원고를 매주 찾아와 만 나지도 않고 이혼도 안했는데 남편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거나 시댁에 남편을 맡겨 놓았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고, 피고가 방학에 자녀들과 야외로 나 간 것까지 비난하였습니다. (피고 22년 9월 서면 중中)


사람마다 목소리가 다르듯, 문체 또한 사람마다 다르다.

난 이런 문체의 메시지를 수도 없이 받아왔기에 누가 메세지를 썼는지 알 수 있었다.


시누는 예전에 말했다

"난 엄마 메시지 보지도 않아. 길이는 또 엄청 길어. 어떻게 자기 하고 싶은 말만 그렇게 쉬지 않고 적는지 원"




내가 만약 곧 죽는다면,

재산이 다 무슨 소용인가.

상대가 죽도록 밉더라도,

남겨질 어린자식들 걱정보다 더하겠는가.




“광기를 저지르고 싶은 이 갈망은 우리와 평생을 함께한다. 바닷가 열길 낭떠러지 위에서 혹은 고층 빌딩 위에서 함께 서 있던 누군가를 갑자기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자책이 따라올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또 어떻고? 우리의 존재 자체가 내 안의 어두운 힘에 대항하는 투쟁에 다름 아니다. 산다는 것은 가슴과 영혼 속 거인들과의 전쟁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찧고 까부는 일이다.

-헨리크 입센⁸”



나는 남편의 음성으로 이혼을 하자거나, 헤어지거나, 원망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법원의 서면으로 처음 접했다.

변호사도 이런 케이스는 없다고 했다.




제 상처를 드러내야만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기에 망설임 끝에 글을 적었습니다.

오랜 시간 고민하고 정제하고 걸러냈지만,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자극적인 부분이 상당히 있어서, 읽으시는 분들께 불편함을 드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도 됩니다.

독자분들의 댓글에 많은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첨부된 문자들은 비실명 처리한 실제 문자메시지이며, 시모와 남편사이의 문자는 남편의 폰에서 발췌했습니다.



1. 구석명신청서

구석명신청(求釋明申請)은 소송에서 당사자의 주장이나 증거가 명확하지 않을 때, 당사자에게 해당 사항에 대해 설명하거나 입증하도록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구석명신청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할 수 있다.  

당사자의 주장이 모호하거나 일관성이 없는 경우

당사자의 증거가 부족하거나 명확하지 않은 경우

당사자의 주장이나 증거가 서로 모순되는 경우


2. 위임계약서

소송을 진행하기 위해 변호사에게 위임하는 내용을 담은 계약서. 적법한 위임절차가 없었다면 소송대리인으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3. STI(Sexually Transmitted Infections)

성병을 의미하는 용어로, 성행위를 통해 전파되는 감염병을 말한다.


4. 가사조사

가사조사는 가사사건, 특히 이혼 사건에서 진행되는 절차 중 하나로, 가사조사관이 당사자들의 혼인생활, 이혼사유, 자녀의 양육 등에 대해 조사하는 것을 말한다. 주로 면담과 가정방문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당사자가 가사조사관에게 자신의 혼인생활과 이혼사유, 자녀의 양육 등에 대해 솔직하게 진술해야 한다.


5. DSLR(Digital Single-Lens Reflex Camera)

높은 화질과 다양한 렌즈 선택 가능성 등의 장점이 있어 사진작가나 사진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많다. 많은 아빠들이 그러하듯 남편의 취미도 DSLR수집과 그것으로 가족들의 사진 찍어주는 것이었다.


6. 아이클라우드

아이클라우드(iCloud)는 애플(Apple)에서 제공하는 클라우드 서비스로, 사용자의 데이터를 인터넷상의 서버에 저장할 수 있게 해 준다. 나는 대부분의 사진, 동영상, 문서, 메모를 그곳에 저장해 놓았다.


7. 들어도 듣지 못했고, 보아도 보지 못한 것처럼에 언급되어 있다.


8. 헨리크 입센(Henrik Johan Ibsen)

노르웨이의 극작가이자 시인. 해당글은 인간 본성의 법칙(로버트 그린) 책에서 재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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