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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Aug 10. 2023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서

- 《청춘시대2(6~9회 중심)》 &  그림책



  어렸을 적 나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내가 잠들면 세상도 움직임을 멈추는 줄 알았다. 세상은 나를 위해 움직였고, 나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 시절 세상 모든 것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존재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나 없는 곳에서도 세상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그저 수많은 사람 중에 하나라는 것을 진심으로 깨닫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다른 사람을 내 세상의 중심에 놓기 시작한 것은. 간절히 원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분한 마음에 차라리 나를 미워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오늘 나는 다시 아프게 깨닫는다. 내가 누군가를 미워할 수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누군가에게 미움받을 수 있다는 것을
 
 - 청춘시대 7회 -



세상의 중심이 될 줄 알았는데 



   세상의 중심이라 믿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고,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었죠. 비록 지금은 아니지만 어른이 되면 그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점점 살이 찔 때마다 그건 진짜 나의 모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며 위안 삼았습니다. 초능력을 찾을 때까지는 안전하게 나를 감추기 위해 이 몸뚱이를 뒤집어쓰고 있는 거라고,   비계덩어리 가죽을 벗고 새롭게 태어날 거라고, 부모라 믿었던 사람들이 출생의 비밀과 함께 잃어버린 능력을 찾을 방법을 알려줄 거라고 기대하며 기다렸죠.     


  무의식 어딘가에서는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중심은커녕 변두리 어디에도 제 자리는 없다는 것을요. 자잘하게 있던 재능까지 퇴보하고, 둔해지고, 망가지고 있음을요. 그래서 더 열망했고, 상상과 망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꿈을 꾸었습니다. 볼품없는 현실을 견디기 위해서는 그 방법이 최고였어요. 그래도, 어쩌다가, 혹시라도, 만약에라도 등의 기대를 할 때면 현실감각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차원이라는 걱정과 비웃음을 받았지요.     


  그랬던 적이 있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언젠가는 될 거라는 믿음이 이제는 없습니다. '언젠가는'의 시기가 훌쩍 지나면서부터, 이 정도는 이룰 수 있다고 믿었던 일에 번번이 실패하면서부터, 기대와 설렘이 있던 자리에 욕심과 열등감이 들어차면서부터, 노력이 부족해서라는 성찰 대신 어차피 될 놈만 된다는 패배의식이 자리하면서부터 더는 뭔가를 계획하고 꿈꾸지 않게 됐습니다. 대신 가까운 이가 제 바람을 이룰까 봐 질투하기 시작했고, 남들과 저를 비교하면서 그들을 제 삶의 중심에 놓고 있지요.          



나이와 상관없이 계속되는 고민들


  

  지하철 계단 중간쯤을 오르자 힘들어,라는 말이 불쑥 튀어나왔습니다. 머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입에서 나온 세 음절의 말보다 토하듯이 뱉어낸 감정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가장 먼저 주변을 살펴 누가 있는지 확인했고,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고, 한 시간 동안 저를 무겁게 했던 사람들과 무더위를 떠올렸습니다. 곧 잊어버릴 사소한 사건과 길에서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할 얼굴들이 뭐가 그렇게 버거운지 모르겠더라고요.   


  삶에 지치고 치이는 건 나이가 들어도 마찬가지인가 봐요. 더 살았다고 노련해지는 게 아닌가 봐요. 그리고 어떤 고민은 나이가 들어도 계속 이어지나 봐요. 드라마 《청춘시대》의 이십 대 인물들이 느끼는 혼란과 버거움을 이십 대를 오래전에 지나온 저도 고스란히 느끼고 있는 걸 보면요. 이 나이가 되면 웬만한 일에는 의연하고 담대할 줄 알았는데 어떤 면은 더 소심하고 치졸해지고 있어요. 이십 대에 느꼈던 좌절까지 얹어져 삶은 더 무겁기만 하지요. 그래도 이십 대 때는 다시 시도할 수 있었는데 이제는 엄두가 나지 않네요. 할 수 있다는 희망과 될 수 있다는 기대는 언제 사라져 버린 걸까요? 그런데도 왜 아직 미련을 붙잡고 있을까요? 그 꿈을 이루었다면 지하철 계단 위에서 다짜고짜 힘들다고 내뱉지 않았을까요?     

  

출처 : JTBC


  시즌2까지 제작된 《청춘시대》는 벨 에포크에 사는 다섯 명의 하우스메이트들의 상처와 사랑과 성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문제 없이, 별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들은 각각의 아픔과 고민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서툴게 숨기고 드러내면서 갈등과 화해를 반복합니다. 예기치 않은 사건에 휘말려 위험에 빠질 때면 누구보다 서로를 끌어안으며 보듬다가도 사소한 일로 다투고 삐치면서 이들은 이십 대의 어느 날을 지나고 있습니다. 대본을 쓴 박영선 작가는 이 드라마에 대해 얘기하면서 굳이 청춘에 대해, 20대 여자에 대해 공부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모두의 고민을 그들의 언어와 얼굴로 말했을 뿐이라고 했지요. 작가의 의도대로 등장인물들이 하는 고민은 특정인에게만 생기는 것도, 한 연령대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기에 드라마를 보면서 공감을 많이 했습니다.



노오~~력만으로도 안 되는 것들     



직원 : 다들 꿈을 꾸며 오잖아요.

팀장 : 그렇긴 한데

직원 : 얘네들 앞으로 어떡하냐. 청춘을 다 바쳤는데. 에휴, 진작 관두지.

팀장 : 쫌만 하면 뭐가 될 줄 알았겠지. 우리 회사 오디션에 붙을 정도면 동네에서 날고 긴다는 소리는 들었을 테고. 재능이 있긴 있는데 어정쩡한 재능이고. 어정쩡한 재능은 저주인 거고.

직원 : 그치만 가끔 재능 없는 애들도 빵, 뜨고 그러잖아요.

팀장 : 천에 한 명. 그런 애들이 있긴 있는데 그런 행운 바라고 인생을 계획할 순 없잖아.
 
 - 청춘시대2, 6회 -            


헤임달 : 뭐 힘든 일 있어요?

진명 : 네?

헤임달 : 아, 하긴 쉬운 게 어딨어. 먹고사는 게 다 힘들지. 안 그래요? 아니, 그렇다고 신입이 그렇게 축 처져갖고 걸어 다니면 되겠어요? 대표님이라도 보면 어쩌려고. 뭔지 모르지만 힘내요. 나도 9년 동안 진짜 힘든 일 많았거든요. 드럽고 치사하고 진짜.
 
(중략)

진명 : 진짜 성공할 거라고 생각해요?

헤임달 : 또 또 또 또 또 또 그런다, 또 또. 누난 왜 그렇게 부정적이에요! 무슨 팬이 그래! 걱정 말아요. 반드시 성공하니까. 내가 아직 성공 못 한 건 노력이 부족해서예요. 우와, 이 말 멋있죠? 내가 아직 성공 못 한 건 노력이 부족해서다. 야, 이거 나중에 인터뷰할 때 써먹어야지. 이거 제 명언집인데요. 자, 꿈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꿈꾸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노력의 땀은 배신을 하지 않는다.
 
 - 청춘시대2, 6회 -          

 

  

  벨 에포크 하우스메이트 중 나이가 가장 많은 선배 윤진명은 유일한 직장인입니다. 시즌1에서는 졸업을 앞둔 취업준비생이었는데 시즌2에서는 취업을 했습니다. 공기업과 대기업 낙방 후 눈을 낮춰 들어간 곳은 오앤박 엔터테인먼트입니다. 그토록 바라던 취업을 했지만 수습사원의 삶은 녹록지 않습니다. 하우스메이트 조은은 연예인을 볼 수 있는 진명을 부러워하지만 진명에게 인기 아이돌 그룹은 그저 자기가 처리해야 하는 일 중 하나이죠. 오앤박에 속한 5핫플레이스는 무척 잘 나가고 있지만 아스가르드는 계속 적자인 팀입니다. 결국 회사는 아스가르드와의 전속 계약 해지를 결정하고, 멤버들에게 사인을 받는 일을 진명에게 미룹니다.     


  계약 해지 결정이 난 줄도 모르고 아스가르드 멤버들은 연습실에 모여 열심히 춤을 추고 노래를 부릅니다. 이들을 바라보는 진명의 마음은 복잡합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맡은 일을 하고 있지만 이들의 인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그런 진명의 속도 모르고 헤임달은 오히려 그녀를 걱정하며 자기는 성공할 거라고 자신만만하게 얘기합니다. 아직 성공하지 못한 건 노력이 부족해서라며 더 노력하면 된다고 하죠.     


  『달에 간 나팔꽃』과  『고래가 보고 싶거든』은 원하는 게 있으면 최선을 다해야 하고, 한 눈 팔면 안 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십 대 때 이 그림책을 봤다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불끈 쥐었을 텐데 지금은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뀌고 있습니다. 이젠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아니까요.               


꼼꼼하게 꽃잎을 접은 나팔꽃은
달에 꼭 가보고 싶었습니다.    

- 달에 간 나팔꽃 -


  나팔꽃의 영어 이름은 모닝글로리(Morning glory)입니다. 아침 일찍 꽃을 피우다가 오후가 되면 꽃잎을 오므리는 특징을 갖고 있지요. 늦은 오후까지 피어 있는 나팔꽃이 있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이른 아침에 피어 반나절도 되지 않아 꽃봉오리를 닫습니다. 그런 특성이 있기에 나팔꽃이 달과 함께  있는 것은 불가능하죠.     


  『달에 간 나팔꽃』의 나팔꽃은 그 불가능에 도전합니다. 어느 날, 낮달을 본 나팔꽃은 달에 가 고 싶어 집니다. 그때부터 나팔꽃은 달에 꼭 가기로 결심합니다. 꼼꼼하게 꽃잎을 접은 후에도, 초록 열매가 되어서도, 갈색 열매가 되어서도, 까만 씨앗이 되어서도, 깜깜한 흙속에서도, 눈이 푹푹 내리는 날에도 그 다짐을 잊지 않습니다. 봄이 오자 나팔꽃은 덩굴손을 길게 뻗습니다. 다 온 줄 알았는데 달은 너무너무 멀리 있습니다. 그래도 나팔꽃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갑니다. 나팔꽃은 알지 못하지만 달에 가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달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날을 개미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고래가 보고 싶니?
그렇다면 장미 같은 건 모르는 척해야 해.     

- 고래가 보고 싶거든 -


  '간절히 기다리는 이에게만 들리는 대답'이라는 문구가 있는 『고래가 보고 싶거든』은 고래를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창문이 있어야 하고, 바다도 있어야 하고, 바라보고 기다리고 생각하고 깨달을 시간도 있어야 합니다. 깜박 잠들어서는 안 되고, 장미와 펠리컨 등 고래가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주어도 안 되죠. 오로지 바다만 바라보면서 고래를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합니다.     


  처음 이 그림책을 봤을 때는 고래를 보기 위해서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노력만 하면 꿈은 이뤄진다고 믿었죠. 그래서 나태하고 게으른 저를 미워하면서 질책했어요. 몇 년 후에 다시 찾은 고래가 보고 싶거든은 처음과 전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고래만 봐야 한다고 강요하는 그림책에게, 삶의 다양한 행복과 아름다움을 무시하라는 그림책에게, 그 무엇도 고래와 비교하지 말라는 그림책에게 화가 났어요. 고래만 기다리다 몇 번의 기회를 놓쳐버린 제 시간이 너무 억울하고 후회되었지요. 간절히 기다리는 이에게만 대답이 들린다는 이 문장은 또 어찌나 황당하던지요. 이렇게 높고 단단한 기준을 설정해 놓고 네가 고래를 보지 못한 건 간절함과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한다면, 맞아요, 결국 제 책임이고 제 문제인 거죠.    

 

  각자의 특성과 외적인 상황을 무시한 채, 설령 그것이 불가능한 꿈이더라도 원대한 목표를 세운 후에는 어떻게든 그것만 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해서 저는 이 그림책들이 불편합니다. 나팔꽃이 달에 가겠다고 다짐하면 박수를 치고 응원해야 하는 걸까요? 고래만 보겠다며 한 눈 팔지 않는 아이는 정말 대단한 일을 하는 걸까요? 개미마저 달에 갔으니 우리도 애쓰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걸까요? 꼭 달에 가고, 고래를 봐야만 위대하고 행복한 걸까요? 꿈을 이루지 못한 자의 좌절과 패배감이 이 아름다운 그림책을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하며 다시 책장을 넘깁니다. 한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을 했었는데 이번에는 다르네요.     


  7년을 계약했지만 5년 만에 해체를 결정한 회사에 멤버 중 누군가는 분노하고, 누군가는 사정하고, 누군가는 차라리 잘 됐다며 받아들입니다. 멤버 모두가 서류에 사인을 하지만 단 한 명, 헤임달은 그렇게 못하겠다며 사인을 거부합니다. 급기야 회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지요. 팀장은 대체 일을 어떻게 하는 거냐며 진명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진명은 헤임달에게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느낍니다.       


  인기가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연습생 생활을 하고, 데뷔를 했지만 아스가르드를 아는 이들은 없습니다. 꿈을 꾸며 청춘을 바친 대가는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는 자신을 확인하는 것이죠. 헤임달은 인기가수가 되는 것만이 성공이라 여기며 더 노력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으니까요.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일이 있고, 포기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에는 그동안 해 온 게 너무 억울하고 아쉽습니다. 단지 인기를 얻지 못했을 뿐인데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 같고, 여기에서 포기하면 낙오자가 될 것만 같지요.   

  

  포기를 결정한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새로운 시작을 응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관대하지 못합니다. 포기를 나약하고 비겁한 결정이라 여기며 그런 인내심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비난합니다. 타인의 시선은 스스로를 몰아세우기에 충분합니다. 고래 외에 다른 건 무의미하다 여기고, 고래를 보지 못한 자신을 가치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럴 때면 자존감은 떨어지고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나 때문은 아닌지 덜컥 겁이 납니다.      


진명 : 이런다고 뭐가 달라져요?

 헤임달 : 참, 뭔 참견?
 
진명 : 시위에는 목적이 있을 거잖아요. 원래 계약대로 2년을 채운다고 해봐요. 그래서 좋을 게 뭐 있어요?
 
헤임달 : 그 사이 빵, 뜨지.
 
진명 : 5년 동안 안 된 게 왜 그때 되겠어요.
 
헤임달 : 원래 기적이라는 건 마지막에, 마지막에, 마지막에 일어나는 거예요. 포기하지 않는 사람한테. 10년 무명이다가 한 순간에 빵 뜬 사람도 있고, 어쩌다 라디오에 한 번 나와서 차트 역주행도 하고. 사람 일 어떻게 될 줄 누가 알아? 뭐 싸이는 원래 월드스타였나? 우연에 기적이 겹친 거지!

진명 : 왜 하필 그 기적이 당신한테 일어나야 하죠?

헤임달 : 노력하니까!

진명 : 노력하는 모든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나진 않아요!

헤임달 : 그래, 너 잘 났는데 그래도 난 한다고. 난 성공할 거라고. 그러니까 참견하지 말라고!
 
진명 : 한 번만 제대로 생각해 봐요!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아스가르드 7명 중에 6명은 팀 해체를 받아들였어요. 7명 중에 6명이 더 이상 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근데 혼자만 못 받아들이고 있잖아요. 본인한테 진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요?
 
헤임달 : 있어.
 
진명 : 좀 잘하는 거 말고! 모두가 인정하는 재능!
 
헤임달 : 있어, 재능! 나 재능 있다고! 네가 뭘 안다고! 남들이 시키는 대로 공부해서 남들이 좋다는 대학 가서 진짜 자기가 원하는 거 뭔지도 모르고 산 주제에 네 걱정이나 해. 미치게 하고 싶은 게 뭔지, 피가 철철 나는 노력이 네가 뭔지 알기나 해?
 
진명 :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함부로 말하지 마.
 
헤임달 : 어휴, 그러셨어요? 책상머리에 앉아서 머리 꽤나 아프셨겠어요. 아주 대단하세요!
 
진명 : 그래, 너보다 잘났다. 지 못난 거 생각 못하고 남의 탓만 하는 너보다는 100배 잘 났다. 네가 진짜 재능이 있었으면 어떻게든 살아남았겠지. 너 재능 없어. 인정하기 싫겠지만 넌 나머지 중에서도 나머지야.  
 
 - 청춘시대2, 9회 -     

 


세상의 중심에서 문제의 중심이 된 기분         



나 때문에     

- 나 때문에 -


예은 엄마 : 한 변호사한테 들었어. 너 또 이상한 놈한테 연락 온다며. 행실을 어떻게 하고 다녔길래 또 이런 일이 생겨! 한 번만 더 이런 일 생기면 당장 집으로 들어간다고 그랬지? 네 방 어디야!
 
(중략)
 
예은 엄마 :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진짜. 연애질만 하고 다니니까 이런 일이 생기지. 다른 집 딸들은 안 그러는데 너만 왜 그러니? 이모 딸들 봐봐. 생전 이런 일이 생기나. 사람들 몰래 그 일 처리하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는 줄 알아? 딸 하나 있는 게 집안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어디서 배운 건지, 천박하게. 두 말할 거 없어. 짐 싸서 집으로 가!

예은 : 엄마, 이러지 마요. 학교는 어쩌고.

엄마 : 지금 학교가 문제니?
 
예은 : 내가 뭘 어쨌다고.

엄마 : 너, 또 남자 생겼다며! 너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렇게 남자를 밝히니? 으휴, 증말. 결혼도 안 한 게 남자 집이나 드나들고. 네가 행실을 그따위로 하니까 이런 일이 생기지. 아니, 그리고 또 얼마나 지났다고 또 남자를 만나? 아휴, 이게 소문이라도 나 봐. 내가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니?     
 
(중략)
 
예은 : 잘 있어. 그동안 나 때문에 불편했지?
 
은재 : 네! 불편했어요.
 
예은 : 미안했다. 잘 있어.
 
은재 : 싫어요! 가지 마요! 왜 아무 말도 못 해요? 예은 선배 할 말은 하는 사람이잖아요. 또박또박 말 잘하잖아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얄미운 말 탁탁 잘하면서 왜 지금은 아무 말도 안 해요? 선배 엄마가 잘못한 거잖아요.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 선배가 뭘 잘못했다고 엄마한테 그런 말을 들어요? 선배는 피해잔데 왜 선배 탓을 해요? 사과하라고 해요. 엄마한테 사과하라고 해요. 바보같이 왜 듣기만 해요!
 
 - 청춘시대2, 8회 -


   세상의 중심에 내가 있다며 가슴 벅차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문제의 중심에 있는 기분입니다. 모든 게 다  탓인 것만 같고,  때문에 일을 망쳐버릴까 봐 슬프고 불안하지요.     

  

  조은이 새로운 하우스메이트가 된 이유는 복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은은 헌책방에서 발신인도, 수신인도 없이 벨 에포크의 주소가 적혀 있는 편지를 발견합니다. 휘갈겨 쓴 문장마다 상처받은 이의 저주와 원망이 가득하지요. 은은 누군가를 위해 복수를 결심하고, 벨 에포크로 향합니다. 벨 에포크의 그녀들은 이 편지가 다른 하우스메이트에게 온 거라 확신하면서, 자신에게 온 편지는 아닌지 의심하면서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프게 깨닫습니다.     


  갑자기 해체 통보를 받은 아스가르드 멤버들은 회사를 원망하지만 결국 그 화살을 자기들에게 돌립니다. 데뷔 무대에서 실수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거라며 죄송하다는 멤버도 있지요. 1인 시위를 하는 헤임달도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한 회사에 분노하지만 재능이 없는 자기 때문은 아닌지 심란합니다.     


  데이트 폭력을 당한 예은은 사람들이 두렵습니다. 벨 에포크 안에서는 여전히 귀여우면서 얄밉지만 밖에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혼자서는 절대 나가지 못하고, 머리카락과 어두운 색 옷으로 자신을 가리고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피해자인데도 예은은 사람들의 시선과 수군거림을 견뎌야 합니다. 자기를 비난하는 엄마에게조차 예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나 때문에』의 고양이도 자기 탓을 하며 슬퍼합니다. 자기 때문에 아이들이 울고 있다면서요. 엄마에게 쫓겨났는데 그 이유가 아빠가 발을 다쳤기 때문이지요. 고양이는 자기가 식탁 아래에서 펄쩍 뛰어올라 화분이 깨져 그런 거라며 울상을 짓습니다. 이야기는 시간의 역순으로 진행됩니다. 결과를 먼저 보여 주고 왜 이렇게 됐는지 그 이유를 다음에 알려줍니다. 고양이와 아이들은 순수하고 기쁜 마음으로 행동했는데 그게 원인이 되었습니다. 고양이는 ' 때문에'라며 자책을 합니다. 아이들 역시 엄마와 아빠가 싸운 이유가 자기들 때문이라며 눈물을 흘립니다. 사실 아빠가 발을 다친 건 고양이 때문이 아닙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영상을 보면  꽃병이 깨졌는지 알 수 있지요.     


  청춘시대 예은을 비롯한 인물들도, 나 때문에의 고양이와 아이들도 이해받고 싶은 사람에게 이해받지 못하면서 작아집니다. 사랑을 원할수록 상처받고, 잘하고 싶은 일에 좌절하면서 휘청입니다. 세상의 중심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모두가 나를 미워하고 우습게 보는 건 아닌지 불안하지요. 이럴수록 내가 나를 인정해야 하는데 가장 매정하고 혹독한 사람이 자기 자신입니다. 달에 가지 못한 것도, 고래를 보지 못한 것도, 팀 해체를 통보받은 것도, 데이트 폭력을 당한 것도, 누군가의 저주가 담긴 편지를 받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도,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것도 다 나 때문인 것 같아 정신을 차릴 수 없습니다. 나 때문이 아니라며 항변해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내 탓이 아닌 것까지 끌어안으며 자책하고 있지요. 고작 이것밖에 아닌 나를 받아들이는 것도,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나를 내세우는 것도, 내 실수를 인정하는 것도, 내 실수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너무 어렵기만 합니다.         


 

그래봤자그렇기에가 되는 순간         



그래! 나 개구리다!      

- 그래봤자 개구리 -


    그래봤자 개구리의 표지는 이중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개구리 모양으로 타공이 된 종이 표지가 개구리알이 그려진 양장 표지를 감싸고 있지요. 개구리알들이 개구리의 눈이 되고, 무늬가 되어 시선을 끕니다. ‘그래봤자라는 제목 역시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비웃음에서 끝날지, 전혀 다른 가치를 내포하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면지에도 개구리알이 가득하네요.    

    

  알은 여기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가만히 기다리면 되는지 알 수가 없지요. 올챙이로 태어나면서부터는 어떤 일이 펼쳐질지, 내가 누구인지, 언제쯤 날 수 있는지 기대가 됩니다. 위험은 곳곳에 도사리고 있지만 그것을 알지 못한 올챙이는 개구리가 되어 신납니다. 그러다 자신보다 거대한 존재와 마주하고, 살아남기 위해 애쓰면서 자신이 한없이 나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올챙이 시절에는 꽃길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그때는 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는데 자신을 위협하는 천적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한 개구리가 되죠. 겨우 위험에서 빠져나왔지만 끝난 게 아닙니다. 지금은 살았지만 또 어떤 순간이 닥칠지 알 수 없습니다. 매 순간 '그래 봤자 개구리'라는 비웃음은 반복되고요. 극한의 공포와 위기의 순간에 개구리는 크고 당당하게 외칩니다. "그래! 나 개구리다!" 그렇게 개구리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발휘합니다. '그래 봤자''그렇기에'가 되는 순간입니다.       


  여백이 많은 간결한 그림과 같은 말이 되풀이되는 짧은 글로 이루어진 이 그림책 안에는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천적 앞에 있는 개구리를 조롱하는 그래봤자 개구리라는 목소리와 살아남은 개구리들이 말하는 나는 개구리가 반복적으로 교차하면서 고통과 기쁨이 거듭되는 삶을 보여줍니다. 자기가 누구인지 모르던 때를 지나, 뭐든 될 수 있다고 믿었던 시기를 거쳐, 고작 이것밖에 되지 않는 자신을 알아가고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온전한 자신이 될 수 있음을 개구리의 생태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극한의 공포와 나약함 앞에서 그래! 나 개구리다!”라고 크게 외치는 장면은 통쾌합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자신을 깔보는 목소리를 향해 당당하게 소리치는 개구리는 더 이상 그래봤자가 아니지요.       


  죽음의 위기에서 벌벌 떨다가도 살아남은 개구리는 기쁨을 마음껏 누립니다. 개구리는 자신의 한계 안에서 용기를 내고 즐기면서 새로운 생명을 뿌립니다. 개구리는 절대로 뱀이 되길 꿈꾸지 않고, 날지 못하는 자신을 질책하지 않습니다. 생존의 위협을 느낄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작고 나약하고 하찮은지 깨닫지만 개구리는 개구리인 자신을 받아들이면서 노래도 하고, 울기도 하고, 뛰어오르기도 하고, 웅크리기도 하고, 새로운 생명을 낳으며 살아갑니다.            



세상의 중심 따위     



은 : 매미는 일주일밖에 못 산다며?
 
은재 : 응. 굼벵이로는 7년 살다가 매미로는 7일.
 
은 : 되게 안 됐다.
 
예은 : 그래서 그렇게 바락바락 우나 봐. 억울해서.
 
진명 : 굼벵이는 매미가 될려고 사는 걸까?
 
은재 : 네?
 
진명 : 굼벵이 시절이 더 행복할지도 모르잖아. 매미는 그냥 굼벵이의 노년이고.
 
(중략)

헤임달 : 전엔 뭔가 되게 억울했거든요. 7년 동안 고생한 게 뭔가 싶고, 이대로 관두면 내 인생 실패하는 거 인정하는 거 같고. 연예인 된다고 동네방네 소문은 다 났는데 쪽팔리고 미안하고. 근데요, 굼벵이는 매미가 될려고 사는 게 아니라면서요. 굼벵이는 굼벵이 나름 행복했을 거고.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7년 동안 재미있었거든요. 뭐 정신승리일지도 모르지만 배운 것도 많고.
 
 - 청춘시대2 12회 -          


  지하철 계단 위에서 내뱉은 힘들다는 그 말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뜬금없어서 잠시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곧 내가 바라는 나로 살고 있다면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았을까, 물었지요. 그 꿈을 이뤘다면 상대가 나를 황당한 얼굴로 보지 않았을 텐데,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그를 가볍게 무시했을 텐데 하면서 얼굴을 찡그렸습니다. 8월의 날씨를 탓했지만 찝찝하고 껄끄럽고 거북한 마음은 햇빛 때문은 아니었죠.    

 

  포기할 때는 포기해야 하고, 안 되는 건 억지로 할 수 없다고 해놓고는 달까지 가지 못한 제가 미웠습니다. 자꾸 한 눈을 팔아 고래를 보지 못했다며 저를 책망했지요. 그들의 들러리가 되어 억지로 웃으며 박수를 칠 때마다 겨우 이 정도인 제가 부끄러웠고요. 그 꿈은 제 삶의 많은 바람 중 하나일 뿐이고, 단지 그것 하나 이루지 못한 건데 삶 전체가 흔들리려 했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사는 것도 아니고, 그게 없어도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데도 어딘가 텅 빈 것 같았지요.     


  너무 헛된 꿈을 꾼 건 아닌지, 주제도 모르고 꿈을 크게 가진 건 아닌지, 어정쩡한 재능으로 어마어마한 행운을 바라는 건 아닌지 심란한 제게 그래 봤자 개구리가 위로하면서 공격합니다. 포기도 못하고, 붙잡지도 못하는 제게  『달에 간 나팔꽃』과 『고래가 보고 싶거든』은 불편과 찔림을 주고요. 이 모든 게 다 저 때문인 것 같아 『나 때문에』의 고양이 눈망울이 마음을 아프게 하네요.     


  당분간은 이 상태가 지속될 것 같은데 한 번 놔둬보려고요. 대낮에 지하철역에서 힘들다고 푸념한 게 뭐 대수라고요. 세상의 중심 따위가 대체 뭐라고요. 그냥 오늘도 무거운 저를 안고 세상 어딘가에 있어보겠습니다.            




* 청춘시대 시즌2(JTBC, 2017. 8. 25 ~ 10. 7, 14부작) / 이태곤, 김상호 연출 / 박연선 극본

* 달에 간 나팔꽃 / 이장미 지음 / 글로연 펴냄

* 고래가 보고 싶거든 / 줄리 폴리아노 글 / 에린 E. 스테드 그림 / 김경연 옮김 / 문학동네 펴냄

* 나 때문에 / 박현주 지음 / 이야기꽃 펴냄

* 그래봤자 개구리 / 장현정 지음 / 모래알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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