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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Aug 22. 2023

“모든 가능성은 내 안에 있다”

-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  그림책




다름이 우열인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는 서로 각각의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같은 곳을 보지만 다른 생각을 하고, 공감을 하면서 또 엇갈립니다. 감정의 크기는 제각각이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 또한 같지 않죠. 타고난 기질과 성격이 다르고,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그동안의 경험이 다르기에 당연한 겁니다.      


  그들과 저는 그저 다를 뿐이고, 각각의 고유함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데 감정은 다르게 반응합니다. 우리의 다름이 우열의 구분인 것처럼 느껴져 서글플 때가 많습니다. 저와는 다른 그의 감성과 능력이 탐날수록 제가 못나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제가 아닌 다른 삶을 꿈꿀수록 저를 향한 미움은 커지고, 변명도 늘어나고 있지요.

        

  그때마다 외면하고, 억압하고, 삭제하고, 편집한 기억이 불쑥불쑥 튀어나옵니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저에게조차 보이고 싶지 않아 저 깊은 무의식 안에 가두었는데 예상하지 못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감정은 과하게 표출되고, 약점을 숨기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거나, 사소한 일에도 전전긍긍합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까지 하고는 후회할 때도 많아지지요. 그림자를 자각하고 수용해야 온전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한 칼 구스타프 융의 말을 듣지 않아 그런가 봐요. 그래서 제가 가진 것이 아닌 남이 가진 것에 집중하고, 콤플렉스에 지배를 당하면서, '살지 못한 삶'에 미련과 후회를 반복하고 있나 봅니다.



무의식, 그림자, 콤플렉스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는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칼 구스타프 융(1875 ~ 1961)의 핵심 개념인 '그림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프로이트와 아들러에게 크게 영향을 받은 융은 분석심리학의 창시자로 집단무의식, 콤플렉스, 그림자, 페르소나 등의 이론을 발견하고 확장했습니다. 자서전의 시작을 “내 인생은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라고 했던 융은 무의식에 가려진 본성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의식하고 있는 자아뿐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의 중심에 있는 자기를 깨닫고 내면의 욕구를 실현해야 행복할 수 있다고 했지요. 선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융의 바람처럼 되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림자의 목소리를 듣고, 그림자를 보살펴야 온전한 자신이 될 수 있지요. 융 연구소에서 수학한 정신분석가이자 심리학자인 로버트 존슨과 임상심리학자인 제리 룰의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는 융의 이론을 해석해 그림자를 마주하고 잠재력을 깨우칠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그림자는 상처와 결핍, 분노와 증오, 트라우마와 콤플렉스가 모여 있는 곳입니다. 마주 보기 힘들다며 방치하고, 고통스럽다며 도망가고, 가리고 싶어 안달하면서, 내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는 저의 반쪽이죠.   

  

  그때 그랬더라면, 이라는 미련과 갈망은 그림자가 됩니다. 그 때문에 난데없이 슬프고, 억울하고, 초라하고, 화가 날 때가 있습니다. 무의식에서 작용하는 콤플렉스 역시 알아차리고 가꿔야 하는 그림자입니다. 억압하면 할수록 콤플렉스는 변화에 맞게 대응할 수 있는 창의적인 능력을 방해하지요. 그래서 그런가 봐요. 고정된 사고와 행위로 똑같은 문제를 반복하고 있는 이유가 말이죠. 그 때문에 마음은 쉽게 무너지고, 머릿속은 복잡합니다. 콤플렉스를 우아하게 가꿔보겠다고 결심했는데 저의 못난 부분을 인정하기란 쉽지가 않네요.   

      

  '살지 못한 삶'을 사랑하는 이가 대신해 주길 기대하면서 요구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 무거운 짐을 다른 이에게 떠넘기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저의 욕구를 타인에게 투사해서 제멋대로 해석하고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 때문에 소중한 관계를 망치고 있지는 않은지 책장을 넘길 때마다 뜨끔하더군요.     


내 인생은 그림자와의 치열한 전투였다. 내 안의 슬픔과 상처와 결핍이 빼곡하게 모여 있는 바로 그 '그림자'라는 존재야말로 내가 싸워야 할 최고의 적수였다. 그런데 내 안의 그림자를 깊이 들여다볼수록 '그림자와의 전투'는 점점 '그림자와 친구 되기'라는 정반대의 경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너무 치열해서 더욱 쓰라리고 아팠던 내 그림자와의 전투를 그림자와 다정한 친구 되기로 바꾸어준 결정적인 멘토가 바로 로버트 존슨이다. 융 심리학의 다정한 안내자이자 고통받는 사람들의 따스한 멘토, 로버트 존슨은 어렵고 힘들게만 느껴졌던 융을 내 곁의 가장 가까운 스승으로 만들어주었다.
 (중략)
   로버트 존슨은 우리가 남들에게 보여주는 뛰어난 연기력, 즉 페르소나 뒤에 감춰진 어두운 그림자를 길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일깨운다. 야생마처럼 거침없이 날뛰는 우리의 분노와 증오가 모여 있는 곳, 그곳이 그림자가 모여 있는 곳이다. 그런데 그림자를 방치하고 그림자로부터 도망치려 하면, 이상하게도 인생이 잘 풀리지 않는다. 트라우마나 콤플렉스 따위는 내 인생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척'하는 것은 페르소나의 뛰어난 연기력일 뿐이다. 나는 이제 오히려 '내 상처와 콤플렉스가 모여 있는 마음의 자리', 즉 그림자에 집중한다. 끝없이 피하는 것보다는 용감하게 대면하는 것이 훨씬 지혜로운 일임을 알기 때문이다.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추천의 글, 정여울 -            



내가 되기 위한 싸움, 사실은 회피



  간신히 감췄는데 그림자가 또 저를 괴롭힙니다.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질겨지고 있지요. 근거 없는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고,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르는 미움과 죄책감은 갈수록 커집니다. 제 안에 있는 또 다른 저는 자기를 부정했다면서 날이 갈수록 심술궂고 고약해집니다. 『내 안에 내가 있다』의 주인공이 강물에 괴물을 밀어 넣는다고 해서 사라지는 게 아니었듯이, 저의 그림자를 가면 뒤에 숨긴다고 해서 숨겨지는 게 아니었던 거죠.     



내가 항상 나인 건 아니었다.
 내가 되기 전까지, 난 내 안에 없었다.    

- 내 안에 내가 있다 -
 

  『내 안에 내가 있다』를 처음 봤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표지를 넘기자마자 멈칫했지요. 면지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림이 있었거든요. 이렇게 불쑥 인체 해부도를 만날지 몰랐습니다. 뼈, 근육, 혈관 등 몸을 이루고 있는 것들은 흉측하고 기괴하더군요. 실제 사진도 아니고, 세밀하고 자세하게 묘사한 것도 아닌데 이 그림은 꽤 자극적이었습니다. 불특정 누군가의 몸이 아닌 제 몸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보니 한없이 낯설고 징그럽더라고요. 이렇게 『내 안에 내가 있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저를 구성하고 있는 내면의 물리적인 요소들을 생각하게 했고, 도저히 알 수 없는 인체의 신비와 함께 그보다 더 알 수 없는 저의 내면을 헤매게 한 그림책입니다.      


  서술자 '나'는 매일 저녁 피의 강가에서 괴물과 목숨을 건 싸움을 합니다. 강물에 던진 돌이 더 많이 튀어 오르면 이기는데 이긴 쪽은 상대를 잡아먹습니다. 물수제비에서 주인공은 매번 괴물을 이기지만 자신을 닮은 괴물을 먹을 순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 괴물을 피의 강에 밀어 넣습니다. 괴물은 사라진 듯 하지만 다음 날 저녁이 되면 다시 또 나타납니다. 무겁고 공허한 침묵 속에서 돌만 던지던 '나'는 괴물 안에 비밀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나'는 괴물을 먹거나 괴물에게 먹히기로 결심하고 싸움에서 집니다. 괴물에게 먹혀 그 안으로 들어간 주인공은 괴물 안이 자신의 안이었음을 알게 되고, 드디어 소리를 지릅니다.     


  『내 안에 내가 있다』의 이야기는 은유와 상징이 난무하고, 그림은 기괴하고 우울한 수수께끼를 품고 있습니다. 문장과 문장을 연결할 때마다 물음표가 생기는데 그림은 더 난해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머리를 갸웃하지만 무언가가 자꾸만 가슴을 두드립니다. 그래서 자꾸만 보고 또 봅니다. 묵직한 글과 기괴하면서 아름다운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제 안에 있는 또 다른 제가 싸움을 걸어옵니다. 왜 계속 자기를 외면하냐며 집요하게 저를 붙잡고 늘어집니다. 저 역시 입을 닫은 채 그 괴물을 더 깊은 곳으로 밀어 넣습니다.     

 

  '진짜 나'를 찾겠다며 고민하고 애썼지만 사실은 '진짜 나'를 피해 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저였으면 했어요. 보기 싫은 모습은 제가 아니었으면 했지요. 『내 안에 내가 있다』의 주인공이 괴물을 이겨놓고 제압하지 못했듯이 저 역시 제 안에 있는 그림자를 자각해 놓고 어쩌지 못했습니다. 주인공이 괴물에게 침묵하면서 괴물과 자신을 별개로 여겼듯이 저도 그림자를 외면한 채 제 것이 아니라 부정했습니다. 내면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도, 크게 소리를 지를 수도, 괴물을 잡아먹을 수도, 괴물의 몸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저는 매번 모르는 척하면서 시치미를 뗐지요.  주인공이 괴물과 자신이 같음을 깨닫고 침묵을 깬 것처럼 저 역시 제 반쪽인 그림자와 싸우고 화해하면서 통합을 이뤄야 온전히  저 자신이 될 수 있는데 말이죠.



마주하고 싶지 않은 반쪽            


  

샘에 늑대의 얼굴이 비쳤어.
겁 많고 어수룩한 토끼의 모습이었어.

- 마음샘 -


  처음에는 호기심이었습니다. 사람의 성격을 아홉 가지로 분류한다는 에니어그램에 대해 궁금했고, 알면 재미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알면 알수록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 어떤 유형도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고, 모두가 약점과 강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마음은 달랐습니다.     


  에니어그램의 목적은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여 약점을 보완하고,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면서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함이라 하는데 저는 에니어그램을 통해 저를 더 부정하고 구속했습니다. 다른 유형의 약점은 그럭저럭 괜찮거나 그마저 매력적이었는데 저의 강점은 시시하고, 답답하고, 형편없었죠. 판단해서는 안 되는데 판단하려 했고, 맹신해서는 안 되는데 그 유형 안에 저를 가두고는 공격했습니다. 제가 기대하고 꿈꾸는 모습이 저였으면 했고, 그런 모습만 보이고 비치길 바랐죠.     


   『마음샘』의 늑대도 그런 마음입니다. 물을 마시러 간 샘물에 토끼의 모습이 비치자 늑대는 토끼를 쫓아내려 합니다. 용감한 늑대에게 겁 많고 어수룩한 토끼가 있다는 건 치욕이죠. 다른 동물들이 자기를 우습게 보고 놀려댈까 봐 늑대는 두렵습니다. 들키기 전에 없애야 하는데 소용없습니다. 쫓아내려 해도, 잡으려 해도 토끼는 늑대에게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한껏 실랑이를 한 후 지친 늑대가 토끼를 바라봅니다. 가까이에서 보니 토끼가 꽤 영리하게 보입니다.     


  융은 그림자를 거부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지만 그것을 의식하고 받아들이면 긍정적으로 변한다고 했습니다. 그림자에는 가능성과 잠재력이 많기에 없애는 게 아니라 가꿔야 하는 곳이죠. 늑대에게 토끼가 없다면 위험한 상황마다 무모한 짓을 할 겁니다. 늑대에게 토끼가 있기에 위험을 피할 수 있고, 친구들에게 다정할 수도 있는 거죠. 늑대가 토끼의 손을 맞잡고 자신을 받아들이는 장면을 보면서 제 안에 있는 그림자와 손을 맞잡을 때 온전한 제가 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느낍니다. 그래서 이제는 제 안에 있는 그림자에게 손을 내밀고 싶어 집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자각할 때, 우리는 현재의 한계를 넘어 더 깊고 원대한 자각을 이루는 원동력을 얻게 된다. 자아와 '더 높은 자기'가 결합해 새로운 통합체를 이루는 것이다. 자아란 인간 의식의 중심이며, 자아의 상위 개념인 '더 높은 자기'는 총체적 현상으로서 통합된 인격의 중심을 이루는 힘이다.
 
 -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          



살지 못한 삶이 모여 있는 만약의 세계         



만약
 그 일이 잘 됐다면
 
 만약
 그 길을 택했다면
 
 만약
 그 사람이 곁에 있다면
 
 만약…….   

- 만약의 세계 -  


  '살지 못한 삶'이란 무엇인가? 거기엔 이제껏 경험으로 적절히 녹아들지 못한 우리의 본질적인 측면이 모두 담겨 있다. '살지 못한 삶'은 우리 뒤통수에 대고 희미하게나마 끊임없이 불평을 늘어놓는다. "그랬더라면……. 그럴 수 있었는데……. 그랬어야 하는데……." 다른 선택에 대한 미련. 늦은 밤까지 잠 못 들게 하는 갈망. 난데없이 솟구치는, 예기치 못한 슬픔, 분명 이뤄야 할 일을 왠지 놓쳤거나 실패한 것 같은 기분.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지금의 삶은, 처음에 계획했던 것과 너무나 다른 이 삶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우리에겐 이루지도 키우지도 못한 채 묻어둔 재능과 잠재력이 무척이나 많다. 설령 삶의 주요한 목적을 달성해 후회할 일이 거의 없는 것 같아도,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유의미한 경험은 여전히 존재한다.  
 
 -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       


 

  요시타케 신스케의 그림책을 볼 때면 감탄이 나옵니다. 단순한 그림과 짧은 글 안에 심오한 철학이 담겨 있거든요. 너무 재미있어서 낄낄대며 웃다가도 생각을 하게 하는 그런 책이지요. 『만약의 세계』 역시 그렇습니다. 이 그림책은 후회와 열등감으로 매일의 세계를 작게 만들고 있는 제게 이 세계 역시 멋진 곳이라고 알려줍니다.       


  잠자고 있는 아이 방 창문으로 고양이가 들어와 로봇을 물고 갑니다. 로봇은 아이를 찾아와 자기는 만약의 세계에 가게 됐다고 말합니다. 만약의 세계가 뭐냐고 묻는 아이에게 로봇은 네가 살고 있는 매일의 세계가 아닌 네 마음속에 있는 또 다른 세계라고 설명하지요. 아무리 해도 할 수 없었던 일, 늘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 변하지 않았으면 했던 것이 만약의 세계에 모여있습니다. 만약의 세계가 점점 커지면 매일의 세계는 아주 작아지죠.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지만 작아진 매일의 세계는 곧 다시 커집니다. 만약의 세계가 큰 사람일수록 매일의 세계도 커다랗게 만들 수 있다고 로봇은 아이에게 말합니다. 만약의 세계는 너만의, 너만을 위한 에너지 뭉치라면서 너에게 있는 두 개의 세계 모두를 천천히, 소중하게, 커다랗게, 즐겁게 만들어 가길 바란다는 말로 로봇은 작별 인사를 대신합니다. 로봇은 자기를 잃고 슬퍼할 아이를 위해 만약의 세계에 대해 알려준 거죠. 잠에서 깬 아이가 자기 방에 로봇이 없는 것을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아이는 당황하고 슬프고 화가 날 테지만 만약의 세계에 있을 로봇을 상상하며 그 감정을 건강하게 풀어가겠죠.   

  

  만약의 세계와 매일의 세계는 제 안에 있고, 저를 중심으로 연결된 곳이기에 결국 중요한 건 저 자신입니다. '살지 못한 삶'에서도 저는 후회하고, 상처를 받고, 선택하지 않은 것을 꿈꾸고 있겠죠. 지금 제가 살고 있는 매일의 세계가 그곳에서는 만약의 세계이면서 '살지 못한 삶'일 거고요. 그곳에서 저는 지금의 저를 동경하고 있을지도 몰라요. 결국은 어떤 삶을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삶을 바라보고 사느냐가 중요한 거죠.



  상상이라는 특별한 형식 안에서 우리는 '살지 못한 삶'을 살아보고 택하지 않은 길을 택했을 때의 느낌을 알아낼 수 있다. 그 길의 장점과 단점을 모두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핵심 단어는 '경험'이다. 상상력을 통한 경험도 엄연히 경험이며 그 경험이 우리를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의지와 진정성을 갖고 적극적으로 임한다면, 내적 경험은 심리적으로 진짜가 될 수 있다. 이 기술은 백일몽이나 소극적인 환상, 과대망상과는 거리가 멀다. 진정으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시간을 들여야 하고, 집중력과 열린 마음가짐이 필요하며, 의식 차원의 관점을 희생할 각오도 있어야 한다.
 (중략)
   많은 경우 '살지 못한 삶'이 현재의 삶보다 딱히 멋지거나 굉장하지도 않고 그저 다를 뿐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경험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참된 존재함에 꼭 필요한 에너지는 어떤 식으로든 표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          



모든 가능성은 내 안에 있다     



  '영원한 아이' 정신을 방해하는 수많은 걸림돌 중 흔한 것으로 완벽주의를 꼽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내면의 비평가'에게 휘둘린다. 이 내면의 비평가는 자신이 가진 행운과 자신이 이룬 성과는 아랑곳하지 않고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는, 미숙하고 파괴적인 형태의 '현명한 어른'이다. 어떤 잘못이나 문제에 자신을 탓하고 옥죄는 그 태도가 바로 문제의 원인일 수 있다. (중략) 강인함에 도달하려면 취약성과 개방성을 거쳐가야 한다. 실수도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실수란 두려워하거나 숨기거나 피해야 하는 것이라 배운다.
 
 -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          

  


  열흘 전부터 쓴 글을 이제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몇 줄 쓰고 딴짓하고, 힘들다며 멈추고, 며칠 동안은 쳐다보지도 않았기에 진전이 없었지요. 그러는 동안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아 잡생각을 많이 했고, 그 덕에 잘 알지 못했던 그림자 하나가 추가되었습니다. 당연히 괴로움도 더 커졌지요.


  그러다 문득, 감정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감정에 감정만 얹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 상황에서 이 감정을 느끼는 게 맞는지, 이 정도의 크기가 적당한지 따져보니 과장과 엄살이 심했더라고요. 문제가 생기면 다 제 탓인 것 같아 회피하고 싶었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면 책임질 자신이 없어 다른 사람이 대신해줬으면 했어요. 남에게 잘 보이고 싶고, 좋은 얘기만 듣고 싶고, 갈등은 없어야 했기에 새로운 일을 할 때면 늘 움츠리고 예민했습니다. 해결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고, 의외로 쉽게 풀릴 일이었는데도 경직되었지요. 우리는 그저 다를 뿐인데 그 다름을 우열의 논리로 본 것도, 차이를 차별로 전환한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였습니다. 결국 제가 저를 못나고, 하찮은 사람으로 만들었지요. 모든 이에게 인정받아야 하고, 갈등은 없어야 한다는 비합리적 신념이 저 자신을 열등한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오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제게 누군가가 화를 냈습니다. 상대는 감정을 억누르면서 고상한 단어를 선택하려 했지만 터져 나오는 짜증과 황당함이 휴대폰 너머로 고스란히 느껴졌어요. 중간에 말을 전한 사람이 어떻게 얘기했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무책임한 사람이 되어있더라고요.     


  평소 같았으면 오해를 하고 있는 그분을 이해시키려 굽신거렸을 거예요.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사실마저 확신이 없어 변명처럼 늘어놓았겠죠. 그러면서 자책하고, 자기혐오로 시간을 보냈을 거예요. 그런데 오늘은 의외로 차분해지더라고요. 그분 역시 뜻하지 않은 변수로 예민해져 있을 테고, 그 입장에서 저는 충분히 무책임하고 꽉 막힌 사람으로 보일 수 있다고 여기니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무엇보다 그녀가 저를 어떻게 판단하든 제 인생에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제 입장에서 저는 그럴 수 있다고 인정했거든요. 상대가 아닌 제 입장에서 바라보니 그녀의 관점도 헤아리게 되더라고요. 갑작스러운 요구에 잠시 마음을 졸였지만 그럭저럭 잘 끝났습니다. 불안한 마음에 혹시나, 하고 준비를 했는데 그게 어찌나 다행이고 감사하던지요.      

     

  모르고 있는 사이에 제가 그림자를 받아들이고 있나 봅니다. 아직은 그림자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 자신은 없지만, 뿌듯하고 행복한 중에도 불안을 떨칠 수는 없지만 지금은 저를 믿어보려고요. 아직은 그럴 수 있다고, 당연한 일이라고, 그림자를 인식했으니 나아질 거라고 중얼거립니다. 오늘은 제게 좀 너그러워지려고요.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에서 가장 마음에 와닿는 문장으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모든 가능성은 내 안에 있다.”  
 


* 『내 그림자에게 말 걸기』, 로버트 존슨 & 제리 룰 지음, 신선해 옮김, 가나출판사 펴냄

* 『내 안에 내가 있다』, 알렉스 쿠소 글, 키티 크라우더 그림, 신혜은 옮김, 바람의아이들 펴냄

* 『마음샘』, 조수경 지음, 한솔수북 펴냄

* 『만약의 세계』, 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양지연 옮김, 주니어김영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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