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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Apr 21. 2023

아무 것도 아닌 그 무엇

-  『일수의 탄생』 & 그림책



  백일수 어린이는 어느덧 4학년이 되었어요. 4학년 선생님 역시 가끔, 일수가 자기 반이라는 걸 잊어버렸지요.
  '백일수…….'
  4학년 선생님은 '특기사항'을 적으며, 처음으로 일수에 대해 깊이 생각했어요. 일수에 대해서 적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요. 특이한 게 있다면 '같아요'를 좀 많이 쓰는 것뿐이었어요.
  '백일수…… 도무지 감이 안 잡히네.'
  선생님은 키와 몸무게, 성적을 샅샅이 훑어보았어요. 100미터 달리기 기록을 점검하고, 체육 시간 일수 모습을 애써 떠올려보았죠. 그리고 놀라운 특징을 발견했어요.
  '일수는 모든 면에서 딱 중간이구나. 이렇게 완벽하게 보통인 아이는 처음인걸!'
  선생님은 차마, 놀라운 특징을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었어요.

- 『일수의 탄생』 中 -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애매한 인간



  곱씹어보니 저는 늘 그랬습니다. 아마추어라고 하기에는 뛰어났고, 프로라고 하기에는 부족했어요.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애매한 실력 때문에 주목받지 못한 날이 많았지요. 그래도 가끔은 그 어중간한 실력 때문에 누군가를 고민하게 했고, 누군가를 기대하게 했고, 누군가를 실망시켰지만 그뿐이었습니다. 더 나아가지 못한 채 어중간한 자리 어딘가를 맴돌기만 했지요.


  얼마 전부터 다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가 답답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저 멀리 가고 있는데 저는 우두커니 그들의 뒤통수만 바라보고 있더라고요.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면서 욕심이 생기고,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욕망은 커지고 있습니다. 열정이 아닌 부러움과 질투가 자리 잡으니 무기력해지더군요. 나는 누구인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생각할수록 더 미궁에 빠졌지요. 책을 읽어도 집중이 되지 않았고, 눈부신 햇살과 피어나는 꽃들 속에서 괜히 서럽기도 했답니다.


  뭘 해도 흥이 나지 않고, 무엇에도 몰두하지 못한 채 시간만 보내는데 갑자기 일수가 생각났습니다. '일등 할 때 일(一)과 수재 할 때 수(秀)'를 쓰는 7월 7일생 백일수가 말이죠. 6년 만에 책장에서 책을 꺼내는데 반가움과 짠함이 뒤섞여 웃음이 나오더군요. 일수의 삶은 가물거렸지만 그에 대한 느낌은 여전했습니다. 존재감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특기사항에 적을 만한 특기와 특이점이 없는, 모든 것에서 완벽하게 보통인, 말썽과는 거리가 멀 정도로 조용하고 소심하지만 일처리가 서툴러 사고를 치는 일수는 저랑 너무나 많이 닮았지요.



존재감이 존재하지 않는 일수





  "일수 군, 이제 열여섯인가?"
  "네."
  "자네 좌우명은 뭔가?"
  '좌우명?'
  일수는 정확하게 좌우명이 뭔지 몰랐어요. 사자성어, 가훈, 교훈과 비슷한 거라는 것만 알았지요. 화선지처럼 하얘진 일수 머릿속에서 검고 커다란 글자 아홉 개가 떠올랐어요.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게 좌우명입니다."
  일수는 날마다 쳐다보는 새마을중학교 3학년 2반 급훈을 얘기했어요.
  (중략)
  "자네 쓸모는 누가 정하지?"
  (중략)
  "모르는 것 같아요."
  명필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어요. 일수는 고개를 팍 떨구고 남은 만두를 입에 쑤셔 넣었지요.

-  『일수의 탄생』 中 -



  『일수의 탄생』은 일수가 태어나기 전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자신을 찾겠다며 헤매는 서른 살 일수의 이야기로 마무리를 합니다. 일수 부모의 첫 만남과 결혼, 오랫동안 기다렸던 아이의 탄생, 7월 7일에 낳은 아기에게 일어난 일, 일수라는 이름의 뜻, 일수에 대한 엄마의 기대와 바람, 너무나 평범해서 존재감이 없는 어린이 시절과 청소년 시절의 일수, 무엇 하나 잘하는 것이 없어 사고만 치는 청년 일수, 가훈업자가 되어 잘 살아가다 마주친 일수의 고민 등이 담겨 있습니다.


  오랫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아 고민하던 부부에게 드디어 좋은 소식이 찾아옵니다. 그토록 바라던 아이는 행운의 7일 두 개나 있는 7월 7일에 세상에 나옵니다. 엄청난 태변을 물고 태어나 큰일 날 뻔했지만 다행히 아이는 별문제 없이 자랍니다. 아이의 이름은 백일수, '일등 할 때 일(一)과 수재 할 때 수(秀)'로 '일등 하는 수재'로 키우겠다는 어머니의 강한 바람과 의지가 들어있습니다. 아버지의 똥덩어리 태몽을 황금덩어리 꿈이라 오해한 어머니는 일수에게 거는 기대가 높습니다. 아들이 세종대왕을 닮길 바라면서 자신을 돈방석에 앉힐 거라 굳게 믿고 있지요.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일수가 죄책감을 느끼며 살지 모른다며 기대를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욕심을 버리지 않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이 받아쓰기 시험에서 연달아 100점을 맞는데 어떻게 기대를 접을 수 있겠어요. 그런데 받침이 있는 글자를 받아쓸 때부터 일수는 약한 모습을 보입니다. 겹받침은 혼돈 그 자체이죠. 엄마의 바람과는 달리 일수는 평범해도 너무 평범하게 자랍니다. 동네 사람들과 친구들은 일수가 옆에 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담임조차 일수가 자기 반이라는 걸 잊을 때가 있으니 일수가 얼마나 존재감이 없는지 짐작이 갑니다. 매 학년 담임들은 일수의 특기사항을 적을 때면 고민입니다. 일수에 대해 쓸 게 정말 없거든요. 일수 역시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상대의 질문에 '몰라요', '같아요'로만 대답합니다. 스스로 결정하는 건 정말 너무 어렵습니다. 특별활동부를 정할 때에도 일수는 어디에도 손을 들지 못합니다. 결국 5학년 일수는 담임의 결정으로 서예부에 들어갑니다.

  

  부모님이 문구점을 운영하기에 일수는 서예 도구를 잘 챙깁니다. 어머니는 문구점에서 제일 좋은 화선지를 주면서 일수를 자랑스러워합니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만들고, 아들은 서예가가 될 거라면서요. 개교 30주년 기념 전시회에 서예부 대표로 5학년 일수의 작품이 전시되자 어머니는 동네 최고의 명필이 운영하는 서예 학원에 일수를 보냅니다. 그리고 일수는 14살에 잘립니다. 자기 글씨체가 없기 때문이죠. 명필에 의하면 마음을 담는 게 서예인데 일수는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기의 감정도 모르는 아이라고 합니다. 교본에 있는 걸 따라 하기만 하는 일수는 결코 서예를 할 수 없다며 호통을 치네요.



  "일수는 자기 글씨체가 없습니다. 그날그날 교본에 있는 걸 따라 할 뿐이에요. 당연하죠.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감정이 뭔지도 모르는 녀석인데."
  명필은 조금도 떨지 않고 대답했어요.
  "뭐라고? 우리 일수가 뭘 모른다고?"
  어머니 목소리가 커졌어요.
  "당신 아들은 자기감정을 몰라. 자기 마음을 담는 게 서옌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해. 더 이상 하면 독이 될 뿐이야!"
  명필 목소리도 커졌어요. 어머니보다 더 크게, 더 세게 반말을 했죠.
  "이제 겨우 열네 살인데, 두고 봐야 아는 거 아닙니까."
  어머니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어요. 어머니는 자기보다 목소리가 큰 사람 앞에서, 기가 죽는 경향이 있거든요.
  "겨울 열네 살? 우리 학원에서 자기가 무슨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지 모르는 애는 당신 아들뿐이야. 어떤 작품이 마음에 드는지 모르는 애도 당신 아들뿐이고."

- 『일수의 탄생』 中 -



  중학생이 되어서도 있는 듯 없는 듯하던 일수가 고등학교에서 존재감 있는 학생이 됩니다.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한 일수는 기계를 다루면서 제일 많이 다치는 학생이거든요. 여기저기 다친 후에야 일수는 자신이 '기계 공포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자격증 없이 학교를 졸업한 일수는 취업이 되지 않습니다. 군대에 간 일수는 이발 보조병이 되어 기술을 배우려 합니다. 그런데 가위질이 서툰 그는 사고만 칩니다. 취사병이 되어 조리사가 되려고도 했는데 이곳에서도 그는 제대로 하는 게 없습니다. 제대 후에 일수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님이 운영하는 문구점 일을 돕는 것뿐입니다. 일수와 달리 그의 유일한 친구 일석이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짜장면이 맛있는 일석 반점의 아들 일석이는 중국요리사가 되기 위해 늘 새로운 요리를 시도하지요. 초등학교 때 서예부에 들어간 것도, 일석 반점에서 가장 가까운 고등학교에 지원한 것도 자신의 꿈을 위한 과정이었죠. 일수는 일석이처럼 분명한 인생을 살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 슬프고 답답합니다. 그러다 스물다섯 살 일수에게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옵니다. 동네 아주머니의 부탁으로 아이의 숙제인 가훈을 써주면서 가훈업자가 된 거죠. 수십 가지 어린이 글씨체, 십여 가지 성인 남녀 글씨체, 서너 가지 노인의 글씨체까지 다양한 글씨체를 갖고 있는 일수는 구(區)에서 가장 유명한 가훈업자가 됩니다. 어떻게 하면 독창적으로 서투르게 글씨를 쓸 수 있는지 고민할 때면 자신감도 생깁니다. 그렇게 일수는 서른이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등학생 아이에게 뜻하지 않은 질문을 받습니다. "선생님 댁 가훈은 뭐예요?" 일수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가훈을 써주었으면서 자신의 가훈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죠. 자신의 인생관도 모르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일수는 혼란에 빠집니다. 일석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한 목표를 갖고 열정적으로 요리를 하던 일석이도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괴롭습니다.   



평범에도 존재하는 계급





"그거 아니? 평범함이 우리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단다.
다른 재료와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우리가 그 재료를 돋보이게 만들기 때문이야."    

- 평범한 식빵 -



  일수만큼 조용하고,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낸 저는 이름마저도 당시 너무 흔했습니다. 한 반에 성만 다른 같은 이름을 가진 아이가 있거나, 발음이 비슷해서 혼동되는 이름을 가진 친구들이 꽤 있었죠. 제 이름 끝에 있는 '연'은 누군가에게는 '영'이었고, 누군가에게는 '현'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은'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수에게는 아예 기억조차 없었죠.  그래서 특별하고 싶었습니다. 홀로 반짝이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고 싶었습니다. 여전히 제일 높은 자리에서 가장 빛나고 싶은 저는 『평범한 식빵』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합니다. 샌드위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음 한쪽은 반박하고 있지요.


  표지에 있는 제목 '평범한 식빵'이라는 글자는 잘 구워진 빵처럼 노릇노릇한 갈색을 띠고 있습니다. 둥근 모양의 글씨에서 도톰한 질감이 느껴지네요. 『평범한 식빵』은 제목처럼 평범한 식빵의 이야기입니다. 식빵은 자신이 너무 평범해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크루아상의 울퉁불퉁한 근육과 도넛의 화려한 무늬가 부럽습니다. 다른 빵은 속이 꽉 차 있거나, 달콤한 시럽이 있는데 식빵은 너무 밋밋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너무 볼품없어 식빵은 마음이 작아집니다. 그 순간 식빵은 빨간 토마토와 초록 양상추가 가득 담긴 샌드위치를 발견합니다. 식빵은 샌드위치에게 어떻게 멋진 빵이 되었는지 묻습니다. 한때는 평범한 식빵이었던 샌드위치는 친구들을 만나 멋져졌다고 말합니다. 평범하기에 다른 재료와 어우러질 수 있고, 그 재료를 돋보이게 만든다며 평범함이 우리를 특별하게 만들어준다고 하죠. 이제 식빵은 슬프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멋진 빵이 될 테니까요. 작가는 남들과 비교하는 자신을 생각하며 이 그림책을 쓰고 그렸다고 합니다. 식빵이의 앞날에 무궁무진한 가능성 있지만 '그냥 식빵'으로 남아도 괜찮다는 글도 덧붙였지요. 누군가에게는 그게 더 좋을 수 있다면서요.


  그런데요, '그냥 식빵'으로도 괜찮으려면 다른 식빵과는 다른 무언가의 특별함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혹은 특별한 행운이 따르거나요. 다른 재료와 잘 어울리면서 중심 재료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그럴만한 자격과 요소가 있어야 하고요. 그렇지 않으면 괜찮은 재료마저 볼품없이 만들 수도 있잖아요. 결국 식빵 사이에도 서열이 존재합니다. 고급 샌드위치가 될지, 빵가루가 될지, 그냥 폐기될지는 그들이 갖고 있는 고유성과 특별함에 따라 달라지죠. 그러니 평범한 식빵이 멋진 샌드위치가 되기 위해서는 결코 평범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다른 재료를 돋보이게 하는 평범함이 특별하다는 말도 속상합니다. 매번 다른 이들의 들러리를 하면서 특별하다고 포장하는 건 서글프고 공허한 위로가 아닌지요. 누군가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은 자신이 충분히 두드러진 후에 해도 되지 않을까요.


  한때는 평범한 게 위대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고개를 젓습니다. 평범은 그냥 평범입니다. 과거의 언젠가였으면 샌드위치의 말에 수긍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네요.



진정한 자화상을 그리기 위해서는




  "비 우(雨), 이슬 로(露), 우로마예요."

- 우로마 -



  일수가 존재감이 없는 이유는 평범해도 너무 평범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하지도, 특이하지도 않으니 잘 보이지 않지요. 그리고 또 하나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 어떤 마음인지 모르니 그럴 수밖에요. 일수는 자신의 생각을 담아야 하는 글짓기가 아닌 그대로 글씨를 베끼는 경필 쓰기가 편합니다. 책상과 몸 사이를 주먹 정도 떨어지게 앉는 것은 할 수 있지만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인지 물으면 대답할 수 있는데 너는 누구냐고 물으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정한 가훈은 얼마든지 써줄 수는 있는데 자신의 가훈을 결정하는 건 너무 어렵습니다. 자기를 돈방석에 앉힐 거라는 어머니의 기대는 버겁기만 하고, 누군가가 너는 누구냐고 물을까 봐 겁이 납니다. 그래서 일수는 확고한 꿈을 갖고 노력하는 일석이가 너무 부럽습니다.


  일수의 유일한 친구 일석이는 짜장면이 맛있는 일석 반점의 아들입니다. 이 둘은 초등학교 때부터 서른이 된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고 있습니다. 백일수와 백일석, 이름은 비슷한지만 이 둘은 많은 게 다릅니다. 존재감도, 꿈도, 목표도 없는 일수와는 달리 일석은 모든 게 분명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처럼 맛있는 중국음식을 만드는 요리사가 되겠다는 일석은 특별활동부를 정할 때에도 거침이 없습니다. 5학년 때에는 남자아이들이 거의 없어도 상관없다며 요리부를, 6학년 때에는 요리 이름을 멋지게 붓글씨로 쓰겠다며 서예부를 지원합니다. 대학을 가지 않겠다면서 인문계 고등학교를 지원한 이유도 자신의 꿈과 관련이 있습니다. 일석 반점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에서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사귀어 평생 단골로 만들겠다는 야심이 있지요. 모든 게 확실하고 분명한 일석이에게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뭐든 빨리 정해서 강하게 밀고 나가는 게 싫다며 여자 친구가 떠났거든요. 서른 살 일수와 일석은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무척 괴롭습니다. 일수는 가훈을 한 글자도 쓸 수 없고, 일석은 불 앞에서 멍해질 정도지요.


  누구나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은 고통스럽습니다. 일수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 답답하기도 하고, 일석이처럼 굳건했던 가치관이 흔들리면서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국민, 시민, 누구의 자식, 직업 등의 객관적인 사실을 제외한 '나'는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을 깨달을 때마다 다른 이의 기대에 미치지 못해 좌절하기도 하고, 다른 이에게 자신의 욕구를 강요하면서 갈등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글을 쓰는 중국의 국민 작가 차오원쉬엔과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이수지의 합작품 『우로마』는 진정한 자신을 만나기 위해 절망하고 도전하는 우로의 칠전팔기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이 대신해 주길 바라는 아빠와 자화상을 완성하기 위해 시도하고 절망하는 우로의 이야기가 강렬하면서 섬세한 그림과 함께 펼쳐집니다.


  우로의 아빠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포목점 주인이 됩니다. 아빠는 자신의 꿈을 우로가 이뤄주길 바라며 유명한 화가에게 그림을 배우게 하지요. 아빠는 우로에게 자화상을 그려보라고 권하고, 둘은 캔버스 천을 사기 위해 화방으로 갑니다. 여기저기 다니지만 마음에 쏙 드는 천이 없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화방에서 마음에 드는 천을 만납니다. 천 종류는 비 우(雨), 이슬 로(露), 우로마이지요. 유명한 화가 서창 선생이 주문한 천이지만 그는 엊그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우로마는 우로의 것이 됩니다. 우로는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천이 너무 마음에 듭니다. 아까워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정도로요. 캔버스 앞에 앉아 붓을 대지 못하는 우로에게 아빠는 이건 그냥 천 조각일 뿐이라며 예술 작품으로 바꾸라고 합니다. 망설인 끝에 붓을 든 우로는 드디어 자화상을 완성합니다. 엄마도, 아빠도 그림이 너무 마음에 듭니다. 아빠는 우로의 그림 선생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서 자화상을 보러 와달라고 합니다. 그들이 우로의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랄 생각을 하니 흐뭇하지요. 하지만 손님들이 도착한 다음 날, 우로의 자화상은 흘러내린 물감으로 엉망이 됩니다. 너무 놀란 우로는 꽃무늬 천으로 캔버스를 가리고, 방문을 닫습니다. 그날 모인 손님들이 돌아가고 상황을 파악한 아빠의 얼굴이 굳습니다. 끼니를 거른 채 다시 붓을 든 우로는 망가진 그림 위에 물감을 덧칠합니다. 캔버스 위에 멋진 우로가 나타나지만 다음 날이 되면 또 물감이 흘러내립니다. 그런데도 우로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또 물감을 덧칠합니다. 아빠가 다른 캔버스에 그리면 된다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우로는 울면서 이 캔버스만을 고집하지요. 우로는 계속 그림을 그리고, 완성을 한 다음 날이 되면 그림은 또다시 엉망이 됩니다. 야위어가는 우로를 볼 때마다 엄마는 애가 탑니다. 결국 일곱 점째 그림마저 물감이 흘러내리자 아빠는 캔버스를 갖다 버립니다. 화가 난 우로는 캔버스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갑니다.  


  우로는 다른 캔버스가 아닌 엉망이 된 그림 위에 덧칠하는 방식으로 자화상을 그리고 그리고 또 그립니다. 아빠는 다른 천에 그리라고 하지만 우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캔버스 속 자화상은 단순한 그림이 아닌 우로 자신이니까요. 마음에 들지 않아도, 다른 이에게 내보이기 부끄러워도 자신을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엉망이 된 그림을 예쁜 천으로 덮는다고 해서 숨겨지는 것도 아닙니다. 자랑하고 싶고, 칭찬받을 수 있는 모습만이 아니라 감추고 싶은 부분까지 마주했을 때 진정한 자화상이 완성되는 거죠.



아무것도 아닌 것의 그 무엇




"너를 놀라게 했으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

- 아무것도 아닌 단추 -


출처 : https://www.youtube.com/watch?v=xamkxf1HllY


  우연히 유튜브에서  <희극인의 삶>을 봤습니다. 개그 프로그램이 폐지된 후에 코미디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콘텐츠라고 하더라고요. 관심 있는 개그맨이 나오는 영상을 시작으로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의 영상도 몇 개 봤습니다. 그중 개그맨 류근지 씨 편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근황토크를 하겠다는 말에 류근지 씨가 민망하게 웃으면서 근황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앞에 있던 개그우먼 박소영 씨가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된다면서 잔소리를 합니다. 지금 계속 살아가고 있는데 어떻게 근황이 없을 수 있냐면서요. 그 얘기를 듣는데 웃음이 터지면서 머릿속이 환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요. 살아있는데 어떻게 근황이 없을 수 있겠어요. 뭔가 근사하고, 남들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것만 근황은 아니잖아요. 우로가 그려야만 했던 자화상에는 예쁘고 멋진 모습만 있어야 하는 게 아니었듯이 말이죠. 하는 게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근황이 없다고 하지만 계속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그런 일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단추마저 결코 그렇지 않거든요.


  <모 윌렘스의 코끼리와 꿀꿀이는 책을 좋아해 시리즈> 중에 하나인 『아무것도 아닌 단추』의 그림은 단순하고 또렷합니다. 이야기는 대화로만 진행되는데 캐릭터들의 언어는 직설적이고 간결하지요. 약간 과장된 캐릭터들의 표정과 몸짓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터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가 가벼운 건 아닙니다. 다 읽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게 될 거예요.  


  노랑이가 빨간 단추를 들고 빨강이와 파랑이에게 달려옵니다. 단추를 본 빨강이와 파랑이는 흥분합니다. 대체 뭐 하는 단추인지 너무 궁금하지요. 노랑이는 아무것도 안 하는 단추라고 말합니다. 노랑이는 의문을 품는 두 친구들 앞에서 직접 단추를 누릅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서 자신의 말이 맞다고 강조합니다. 파랑이와 빨강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니 직접 눌러서 확인을 해야지요. 단추를 누른 파랑이가 눈을 크게 뜨고 날개를 펼칩니다. 정말 누르기 쉬운 단추라면서 놀랍다고 하네요. 그러자 빨강이가 "너를 놀라게 했으니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데?"라고 말합니다. 놀라움을 느끼고 싶은지 빨강이도 단추를 누릅니다. 그런데 전혀 놀랍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슬픕니다. 슬픈 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는 파랑이의 말에 노랑이가 화를 냅니다. 아무것도 아닌 단추가 어떻게 슬프게 하고, 놀라게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거든요. 노랑이에게 이 단추는 아무것도 아니어야 하는데 빨강이와 파랑이는 자꾸만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일수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속상하지만 존재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아닐 수는 없지요. 일수가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지 않는다고 해서, 느낌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고 해서, 다른 이의 눈치만 보다가 입술을 다문다고 해서 생각과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요. 특별하지 않아도, 남들의 기대만큼 대단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다, 하찮다, 특별하다, 평범하다, 특이하다 등의 기준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너무 달라져서 뭐가 평범한 건지, 뭐가 특별한 건지 애매하고 모호하기만 합니다. 갑자기 『평범한 식빵』을 다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특별하지도 않아도 되는 것들



  아무것도 아닌 줄 알았던 단추가 놀라게 하고, 슬프게 하고, 화나게 하고, 재미있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을 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름이 있고, 존재하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지 않더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며 자책하고, 그 무엇도 아니라며 저를 갉아댔는데 저 역시 뭐라도 하고 있고, 어떤 역할이 있긴 해요. 그게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이에게 내세울 수 없다고 해서, 그럴듯한 결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함부로 폄하할 필요는 없는 거죠. 대단하지 않아도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잖아요. 평범한 식빵도 꼭 있어야만 하지요. 제가 하는 어떤 일은 보잘것없고, 쓸데없기도 하지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지 않으니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거라고 오늘의 저를 다독입니다.

 

  평범함이 특별하다는 샌드위치의 말이 여전히 달콤한 허상처럼 들리지만 다시 한번 곱씹어봐야겠습니다. 평범함이 갖는 위대함이 무엇인지, 평범하다는 게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서도요. 일수가 서예를 쓰면서 겹받침에 대해 정확히 알게 되었듯이, 우로가 망가진 그림 위에 덧칠하면서 자화상을 완성했듯이 이렇게 고민하고 절망하고 웃다 보면 어느 날 느낌표 하나가 떠오르겠죠. 그때가 되면 그냥 식빵이라 좋았다고 얘기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일수의 탄생』, 유은실 글, 서현 그림, 비룡소 펴냄

* 『평범한 식빵』, 종종 지음, 그린북 펴냄

* 『우로마』, 차오원쉬엔 글, 이수지 그림, 신순항 옮김, 책읽는곰 펴냄

* 『아무것도 아닌 단추』, 캐리스 메리클 하퍼 지음, 이순영 옮김, 북극곰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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