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의 떨림 Oct 23. 2024

나의 불안에게 안녕을

- 안녕? 우리 오늘도 안녕하자

  처음에는 설렘이었다. 혈액형이나 별자리로 알아보는 성격과는 달리 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이론이라 기대했. MBTI와도 다르다고 하니 더 궁금했다. 부담은 없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어 좋았다. 그랬는데 점점 얼굴이 굳었다. 급기야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에니어그램은 사람의 성격을 아홉 가지로 분류한 이론이다.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고대부터 전해지는 이 성격유형지표는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보고 영혼과 성격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진정한 자기를 알아차리고, 관찰하고, 이해하면서 의식이 깨어난다고 한다. 알아차림, 에니어그램에서는 그게 중요하다고 하는데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르는 척할 작정이었다. 나를 괴롭히는 나를 만날 이유가 없었다.


  알고 있었다. 1부터 9까지의 유형 그 무엇도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모든 유형이 각각 약점과 강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에니어그램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지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판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을 맹신해서는 안 되며 기준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보지 않으려 했던 내가 다시 나를 공격했다. 다른 유형은 약점마저 매력적이거나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내 본성이라는 유형의 강점은 시시하고, 답답하고, 형편없었다.  


  그 유형을 대표하는 단어는 '충성가'이다. 홀로 당당하고 자유롭고 싶은 내게 이 별칭은 최악이었다. '성실'이니 '책임감'이니 '충실'이라는 말은 나와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너무 고리타분하고 갑갑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의존적', '불안', '의심', '안전추구'는 내 삶에서 없었으면 하는 목록이었다. 나는 이 유형이 아니라고 부인했다가, 다른 유형이길 기대했다가, 이 유형만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애원했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끝까지 아니라고 우길 수 없어 새어 나온 설움이었다. 어쩔 수 없다면, 다른 건 다 받아들일 테니 불안만큼은 사라졌으면 했다. 나를 한없이 움츠리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예민하게 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그 특성만이라도 없애고 싶었다. 내 삶에 불안만 없어진다면 마음껏 시도하고 도전할 자신이 있었다.


  내게 불안은 태생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충분히 안고 나왔는데 외부환경이 더 강하게 만들었다. 제대로 형성하지 못 한 애착은 양육자들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을 키웠다.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공포는 밤이 되면 더 잔인해졌다. 매일 밤마다 신에게 기도했다. 강도가 들어오지 않게 해 주시고, 불이 나지 않게 해 주시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제발 빨리 잠들 수 있도록 해 주세요. 특별히 믿는 신이 없었기에 모든 신에게 매달렸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몸이 굳은 채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가족들은 걱정이라면서 비난했다. 너는 왜 그렇게 기가 약하니, 왜 그렇게 예민하니, 왜 덩치값을 하지 못하니, 대체 뭐가 문제니. 지독하고 처참한 일을 당해서 그 트라우마로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그 일을 당할까 봐 미리 겁부터 먹는 나를 나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나를 공격하고 협박했던 게 내 본성이었다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하면 이 불안을 없앨 수 있는지 묻자 내게 에니어그램을 알려준 친구 K가 고개를 저었다.


  "에니어그램은 약점을 없애거나 고치라고 말하지 않아요. 그냥 그런 자신을 수용하라고 하지요. 내가 지금 불안해하는구나, 내 본성으로 인해 더 강하게 느끼는 거구나, 별 일 아닌데 또 이러는구나, 그냥 그렇게 알아차리면 돼요."


  K는 내가 그토록 거부하는 이 성격유형이 자기 것인 줄 알고 좋았다고 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유형을 말하기 싫다고도 했다. 내가 부러워하는 성격이 K는 부끄럽단다. K가 내 강점을 얘기하면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의 위로에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무시를 받을까 봐, 안전하지 못할까 봐, 그리고 이유를 전혀 모른 채 떨었던 날들이 다시 또 눈가에 맺혔다. 그제야 새삼스레 불안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게 불안이 없었다면 아무나 덥석 믿어 몇 번이나 사기를 당했을 거다. 무모하게 덤비다가 사고를 칠 게 뻔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꽤 자주 사고를 당했을 수도 있다. 걱정이 없으니 준비성도 없어 무책임, 무능력, 무개념으로 민폐나 끼쳤겠지. 불안은 나를 옭아매는 쇠사슬이기도 했지만 나의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오늘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의 불안에게 안녕을 고했다. 헤어지기 위한 마무리가 아니라 없이 공존하길 바란다는 인사였다. 오늘은 얼마만큼의 강도로 심술을 부릴지 모르겠지만 소란스럽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고 안부를 전했다. 덕분이라는 감사까지는 할 수 없어도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기로 했다. 내일도 나의 불안에게 인사를 건네 한다.


  안녕? 우리 오늘도 안녕하자.


이전 11화 성실한 뻘짓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