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설렘이었다. 혈액형이나 별자리로 알아보는 성격과는 달리전문적이고 깊이 있는 이론이라 기대했다. MBTI와도다르다고 하니 더 궁금했다. 부담은 없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어 좋았다. 그랬는데 점점 얼굴이 굳었다. 급기야는 왈칵 눈물을 쏟았다.
에니어그램은 사람의 성격을 아홉 가지로 분류한 이론이다.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고대부터 전해지는 이 성격유형지표는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보고 영혼과 성격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진정한 자기를 알아차리고, 관찰하고, 이해하면서 의식이 깨어난다고 한다. 알아차림, 에니어그램에서는 그게 중요하다고 하는데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모르는 척할 작정이었다. 나를 괴롭히는 나를 만날 이유가 없었다.
알고 있었다. 1부터 9까지의 유형 그 무엇도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모든 유형이 각각 약점과 강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에니어그램은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이지 누군가를 비판하거나 판단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이것을 맹신해서는 안 되며 기준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보지 않으려 했던 내가 다시 나를 공격했다. 다른 유형은 약점마저 매력적이거나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내 본성이라는 유형의 강점은 시시하고, 답답하고, 형편없었다.
그 유형을 대표하는 단어는 '충성가'이다. 홀로 당당하고 자유롭고 싶은 내게 이 별칭은 최악이었다. '성실'이니 '책임감'이니 '충실'이라는 말은 나와 어울리지 않을 뿐 아니라 너무 고리타분하고 갑갑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의존적', '불안', '의심', '안전추구'는 내 삶에서 없었으면 하는 목록이었다. 나는 이 유형이 아니라고 부인했다가, 다른 유형이길 기대했다가, 이 유형만큼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애원했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끝까지 아니라고 우길 수 없어 새어 나온 설움이었다. 어쩔 수 없다면, 다른 건 다 받아들일 테니 불안만큼은 사라졌으면 했다. 나를 한없이 움츠리게 하고, 우울하게 하고, 예민하게 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그 특성만이라도 없애고 싶었다. 내 삶에 불안만 없어진다면 마음껏 시도하고 도전할 자신이 있었다.
내게 불안은 태생적이고 근원적인 감정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충분히 안고 나왔는데 외부환경이 더 강하게 만들었다. 제대로 형성하지 못 한 애착은 양육자들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을 키웠다.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공포는 밤이 되면 더 잔인해졌다. 매일 밤마다 신에게 기도했다. 강도가 들어오지 않게 해 주시고, 불이 나지 않게 해 주시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고 제발 빨리 잠들 수 있도록 해 주세요. 특별히 믿는 신이 없었기에 모든 신에게 매달렸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몸이 굳은 채 고통스러워하는 나를 가족들은 걱정이라면서 비난했다. 너는 왜 그렇게 기가 약하니, 왜 그렇게 예민하니, 왜 덩치값을 하지 못하니, 대체 뭐가 문제니. 지독하고 처참한 일을 당해서 그 트라우마로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그 일을 당할까 봐 미리 겁부터 먹는 나를 나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나를 공격하고 협박했던 게 내 본성이었다고 하니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하면 이 불안을 없앨 수 있는지 묻자 내게 에니어그램을 알려준 친구 K가 고개를 저었다.
"에니어그램은 약점을 없애거나 고치라고 말하지 않아요. 그냥 그런 자신을 수용하라고 하지요. 내가 지금 불안해하는구나, 내 본성으로 인해 더 강하게 느끼는 거구나, 별 일 아닌데 또 이러는구나, 그냥 그렇게 알아차리면 돼요."
K는 내가 그토록 거부하는 이 성격유형이 자기 것인 줄 알고 좋았다고했다. 그녀 역시 자신의 유형을 말하기 싫다고도 했다. 내가 부러워하는 성격이 K는 부끄럽단다. K가 내 강점을 얘기하면서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 그녀의 위로에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무시를 받을까 봐, 안전하지 못할까 봐, 그리고 이유를 전혀 모른 채 떨었던 날들이 다시 또 눈가에 맺혔다. 그제야 새삼스레불안이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있다고생각했다. 내게 불안이 없었다면 아무나 덥석 믿어 몇 번이나 사기를 당했을거다. 무모하게 덤비다가 사고를 칠 게 뻔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 꽤 자주 사고를당했을수도 있다. 걱정이없으니준비성도 없어 무책임, 무능력, 무개념으로 민폐나 끼쳤겠지. 불안은 나를 옭아매는 쇠사슬이기도 했지만 나의안전장치이기도 했다.
오늘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의 불안에게 안녕을 고했다. 헤어지기 위한 마무리가아니라 별 탈 없이공존하길 바란다는 인사였다. 오늘은 얼마만큼의 강도로 심술을 부릴지 모르겠지만 소란스럽지 않은 날이 더 많았다고 안부를 전했다. 덕분이라는감사까지는할 수 없어도 인정할 부분은 인정하기로 했다.내일도 나의 불안에게인사를 건네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