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 1월 12일 금요일. 지긋지긋한 석사 논문을 제출하고는 정말이지 어디든 떠나고 싶었다. 혼자 여행을 가본 적도, 비행기를 타본 적도 없어 좀 망설였지만 그래도 도쿄 정도라면 혼자 가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일주일 정도 고민만 하다가 크게 마음먹고 비행기표를 예매해 버렸다. 1월 20일 토요일 아침 비행기로 도쿄에 갔다가 22일 월요일 저녁 비행기로 돌아오는 일정, 숙소는 신주쿠 부근.
비행기 타는 것을 무서워하는데, 이유는 흔들림 때문이다. 흔들리면 곧 떨어질 것 같은 공포에 휩싸인다. 뭐라도 붙잡아 보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만, 붙잡을 만한 것도 다 같이 허공에 떠서 흔들거리는 신세인걸. 종교는 없지만, 눈을 꼭 감고 기도하며 버티곤 했다. 도쿄로 가는 중에도 난기류를 만난 비행기는 때때로 흔들거렸고 그때마다 도망치거나 주저앉아버리고 싶은 마음을 맞잡고 기도했다. 긴장될 때마다 참고 있던 숨이, 착륙하고 나서야 다 쉬어졌다. 휴우우우. 일단, 무사히 도착했으니 다시 비행기를 타야 한다는 생각은 잊고 놀자!
나름 순탄하고 무탈하게 도쿄에서 시간을 보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은 오후 6시발 비행기라 오전에는 도쿄 시내에 있었는데 제법 눈 줄기가 굵어 우산을 써야 할 정도였다. 차와 버스들이 도로 위에서 기어갔고 시내에 눈이 쌓여갔지만, 곧 떠나니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오후 4시쯤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마치고 탑승을 기다리는 동안 에비슈 맥주 한 캔을 땄다. 잠자리가 바뀌어 3일간 10시간도 채 못 잔데다가 뚜벅이처럼 걷기만 해 피곤이 만땅이었는데 알코올을 추가하니 긴장이 쫙 풀렸다. 비행기가 흔들리든 말든 푹 자는 거야. 그럼 인천공항에 도착해 있을 것이고, 나의 첫 솔로 여행은 무사히 끝나는 거야!
공항 밖은 계속 폭설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4년 만의 이례적인 폭설이라고 했다. 이륙이 한 시간 정도 지연되었지만, 탑승은 하라고 해서 비행기가 뜨기는 하는구나 안도했다. 선반 위에 짐을 넣고 좌석에 앉아 눈을 감았다. 활주로 제설 작업 중이니 조금만 대기해달라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올 때 눈을 떴다가, 다시 감고. 승무원이 현황설명을 해 줄 때 눈을 떴다가, 다시 감고. 그렇게 몇 번 눈을 떴다 감았다 하다 보니 어느덧 자정이 넘어가고 있었다. 창문 밖 풍경은 눈발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불 꺼진 기내의 고요함이, 곧 저 눈발에 깨질 것만 같아 불안해졌다.
새벽 2시쯤. 기내에 불이 켜졌다. 폭설이 멈추질 않아 활주로 제설작업이 어렵다는 것, 이 상태로는 당분간 이륙이 어려우니, 공항으로 나가 대기해줄 것이 안내되었다. 그럴 거면 진작에 공항으로 나가라고 했어야지, 판단이 이렇게 느려서 되겠냐, 보상은 어떻게 할 거냐! 와 같은 분노들이 쏟아졌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을 헤치며 비행기 밖으로 나오는데, 꿈속처럼 멍했다. 탑승구로 나가는 통로에서 침낭 1개, 비스킷 한 통, 500mL 물 한 병을 받았다. 그것들이 손에 쥐어지자, 처한 상황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공항으로 쫓겨나오니 나리타공항은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거대한 난민촌이었다. 공항과 시내를 잇는 교통수단은 전면 통제되어, 공항은 고립된 섬이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일단, 밤을 지새울 자리를 잡자! 공항 밖으로 먼저 쫓겨난(?)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선점한 상황이었다. 좋은 자리라는 건 침낭을 안 펴도 되는 벤치, 사람들이 덜 왔다 갔다 하는 구석 자리, 콘센트가 있는 자리...! 맞다! 나도 콘센트가 필요했다. 핸드폰 배터리도, 무선 와이파이 기기의 배터리도 전력이 얼마 안 남은 상황이었다. 이런 긴급한 상황에 인터넷도 안 되고 전화도 안 되면? 어휴. 난감해질 것이다. 더군다나 난 혼자인데!
콘센트가 남아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꼭 찾아야 한다는 간절함 때문이었는지, 아시아나항공 탑승 수속 카운터 부근에서 2개의 콘센트 구멍에 아직 주인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 어찌나 감사하던지... 배터리가 한 칸 남은 핸드폰을 콘센트에 연결해 충전을 시작하면서 그 옆에 침낭을 깔고 자리를 잡았다. 전자기기류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이렇게 의지하게 될 줄이야. 따뜻해진 핸드폰을 꼬옥 쥐고 있었다.
우왕좌왕 시끌시끌하던 공항도 점점 안정을 찾아갔다. 사람들은 화장실에서 세수도 하고 면세점에서 산 과자들도 까먹고 대화하며 웃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귀도 쫑긋, 발도 쫑긋, 긴장과 경계도 쫑긋 세우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그것도, 공항에서 밤을 지새우다니. 낯설어 날이 섰다. 사람들은 모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거나,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새벽 5시쯤이 되자 공항은 고요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잠드는 사람들이 신기했다. 내 주변 사람들은 모두 잠들었고, 옆 사람은 코까지 골았지만 나는 ‘혼자니깐 자면 안 돼’. ‘여기서 자버리면 집에 못 돌아갈지도 몰라’ 하면서 졸음으로부터 버티고 있었다.
눈알이 뻑뻑해, 잠시 눈을 감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눈을 감자, 딴 세상으로 순간이동을 한 것 같달까. 마치 꿈속에 있는 것 같달까. 순식간에 몽환적인 기분에 휩싸였다. 그러고 보면 대학교 졸업 후부터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헤매는 꿈을 자주 꾸곤 했는데... 혹, 지금도 그 꿈속인 걸까. 수업 시작종이 울렸는데 교실을 찾아 학교 안을 헤매는 꿈, 평소 타던 버스가 이상한 곳에 내려주어 회사를 찾아 헤매는 꿈, 다리에 모래주머니가 달린 것처럼 잘 걸어지지 않아 집까지 도저히 걸어갈 수 없는 꿈. 이런 꿈들을, 자주 꿨다. 가고 싶은데 가지를 못해 애가 닳고 땀이 나는 고생스러운 기운은, 기상 후에도 몸에 잔류하여 하루를 힘들게 했다.
그러니깐 지금은, 꿈 속에 있는 건 아니어야 한다. 이번에는 꼭 집으로 돌아가야만 해.
저 멀리에서부터 저벅저벅 발소리가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덜컹덜컹 바퀴 굴러가는 소리도 다가왔다가 멀어졌다. 귓가 주변으로 너무나 생생하게 소리가 다가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좀... 이상하다? 생각하다가 눈을 번쩍 뜨니, 공항 바닥에 오른쪽 뺨을 대고 누워 자고 있었다. 분명, 절대 눕지 않겠다고 90도 직각 자세로 앉아 있었건만. 분명, 잠시만 눈을 감고 있자고 했건만. 쩝... 차가워진 볼을 어루만지며 공항을 둘러보니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 7시 언저리. 공항 밖은 아직 어두웠지만, 눈은 그친 듯했다. 그간 친근함이 생긴 건지 사람들은 눈이 마주치면 잘 잤냐는 듯 미소를 나누었다.
침낭을 접은 뒤, 통유리창 근처로 자리를 이동했다.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눈물 날 정도로 따뜻한 태양이었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눈의 일은 그쳤고 태양의 일은 시작되었다. 활주로와 비행기에 쌓였던 눈이 녹으면서 비행기가 한 대씩 이륙을 시작했다. 발이 묶였던 비행기가 워낙 많아 내가 타는 비행기는 오후 3시로 이륙이 결정되었다. 이상하게 배가 하나도 안 고팠지만, 무언가를 먹고 싶어졌다. 비스킷 한 통을 뜯어 물과 함께 먹으며 지겹도록 햇빛을 쳐다봤다.
한참을 대기한 끝에 드디어 탑승한 비행기. 평소 같았으면 불편하고 무섭기만 한 비행기가 몹시 안락했다. 좌석에 푹 기대앉아 창가를 바라보는 척하며 좌석 시트에 오른쪽 뺨을 대었다. 차갑고 딱딱한 공항 바닥에 비한다면, 마치 내 침대에 누워있는 것처럼 포근하고 안락했다. 돌아오는 중에, 비행기가 흔들려도 무섭다는 생각을 안 했다. 이 비행기만이 내 집으로 가게 해 줄 테니깐. 꿈속에서는 이루지 못했던 꿈을 이루게 해 줄 테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