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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형원 Feb 20. 2022

슬프지만 기쁘다고 했다  

"슬프지만 기뻐요. 이상하죠. 그런데 정말 그래요."


지난여름. 그녀 남편의 예상치 못한 부고를 접했다. 그녀가 충격과 슬픔으로 곧 남편을 따라 갈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떠난 자에 대한 슬픔보다 먼저 다가왔다. 그녀의 남편을 잘 알지는 못했다. 몇 번 마주치기는 했지만, 조금 차갑다고 느꼈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봤을 때 이전보다 더 유심히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눈동자가 그처럼 맑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깊고 청량한 겨울 호수를 보는 듯했다.


그런 그가 한 달도 채 안 돼서 이 세상을 떠날 줄은 결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심장병이라고 했다. 여든을 훌쩍 넘겼으니 죽음이 삶보다 더 가까운 것은 당연했지만. 아무도 그가 그녀보다 먼저 떠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태어나자마자 죽을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고 늘 연약한 체구와 허약한 몸으로 살아온 그녀를 보살펴온 남편이었다. 가는데 순서가 없다지만, 누군가 먼저 가야 한다면 그가 그녀의 뒤를 이을 거라 짐작했었다.


그러나 죽음에는 순서 따윈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를 본 건 그녀의 지난 전시회 오프닝 날이었다. 대상포진이라는 몹쓸 병을 앓고 있어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던 그녀를 대신해 그는 찾아온 이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었다. 코로나로 일 년 반 만에 열리는 전시였고. 전시가 시작되는 날은 일 년간 지속되었던 봉쇄 조치가 온전히 풀리는 날이었으며, 본격적으로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기도 했다.




그 전시회에서 그녀가 세상에서 말하는 유명 화가라는 걸 새삼스레 실감했다. 코로나 봉쇄 기간 동안 외진 산골 동네에서 조용히 지내며 그림만 그려온 그녀였다. 그녀와 작품을 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아와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선 모습을 보고. 종종 나에게 전화를 걸어 꼭꼭 존댓말로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전화했어요'라고 하는 어린아이 같은 할머니 혹은 할머니 같은 어린아이와. 십 년 넘게 전시회를 찾아다녔다는 팬을 지닌 유명 화가와의 간극이 바다처럼 벌어지는 장면을 그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는 에너지가 넘쳤으며 행복해 보였다. 전시 전날까지도 직접 갤러리와 화실을 왔다 갔다 하며 마지막 수정이 필요한 그림들을 운반하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한 위대한 예술가가 존재하기까지는 주변의 무조건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와 그녀를 보며 알 수 있었다. 전시가 끝나고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그가 갑작스러운 심장 수술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다 잘될 거예요. 수술 잘 받으시고 건강하게 돌아오실 거예요.


정말 그렇게 믿었다. 어느 이삼십 대 보다 생기 넘치던. 그토록 맑은 눈동자를 지니던 그였다. 생명력이 그깟 나이가 아닌 에너지라면 그는 누구보다 충만한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부고를 접하고 이와 같은 믿음이 얼마나 덧없음을 깨달았다. 모두들 남겨진 그녀를 걱정했다. 그녀에게 이 슬픔을 견딜 힘이 남아 있을 거라 믿지 않았다. 몇 달 동안 그녀와 연락이 닿지 않았다.


한 계절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에게 전화가 왔다. "우리끼리니까 하는 말인데요.. 그는 여전히 나와 함께 있어요. 그림 그릴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잠잘 때도 늘 함께 있어요. 그래서 슬프지만 기뻐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에게는 비밀이지만 나는 그녀와 통화하며 자주 울었고, 지금도 여전히 종종 눈물을 훔친다.




크리스마스 일주일 전. 인터뷰를 위해 촬영팀과 함께 그녀를 찾았다. 그녀가 남편이 세상을 뜬 후 한동안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끊었다고 들었었다. 연락하는 사람마다 모두 슬픔과 괴로움을 말하는 게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우연인지 촬영팀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가족을 잃은 경험이 있는 이들이었다. 중년의 감독은 몇 년 전 암으로 배우자를 잃었고. 촬영 감독 역시 몇 년 전 사고로 이십 대의 아들을 잃은 슬픔이 있었다.


가족을 잃는다는 게 어떤 슬픔인지 그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이들이었다. 아무도 그의 죽음에 대해 먼저 말을 꺼내는 이도 섣부른 위로를 하는 이도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우리가 머무는 동안 수시로 그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했다. ‘마음은 남편이 항상 살아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도 층계로 올라오고. 방에도 들어오고. 식사시간에도 나타나고. 매일매일 함께 사는 것을 기뻐하면서 슬퍼하고 있어요.’


어렴풋이 알 것 같았지만, 가까운 이의 죽음을 겪어보지 못한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몇 년 전 암으로 아내를 잃은 감독의 눈가는 촉촉해지더니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며 '무슨 말인지 이해해요'라고 했다. 그렇게 그 깊은 겨울, 고요한 산속 마을에서 며칠 동안 우리는 기쁘고 슬프게 혹은 슬프고 기쁘게 죽음을 이야기했다.


내가 여태껏 겪은 기쁘면서도 슬픈 감정은 사랑할 때 찾아오곤 했었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을 시작할 때 주로 찾아왔다. 이십 대 초반 지금 남편을 만나고 사랑을 시작하며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다. 사랑의 감미로운 행복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는 없을 거라는 두려움 혹은 슬픔이 동시에 나를 덮쳤었다. 지금도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게 뭐냐고 물으면, 남편이 먼저 죽는 거라 답할 것이다.


하지만 매일매일 함께 사는 것을 기뻐하면서 슬퍼한다는 혹은 슬퍼하면서 기뻐한다는 그녀의 말에 생각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이 먼저 떠난다고 멈추지 않는다는 걸. 어쩌면 사랑은 기쁨과 슬픔으로 시작해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고 난 후에도 기쁨과 슬픔으로 영원히 지속되는지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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